77세, 희수(喜壽). 저승사자가 오면 “염라대왕에게 전하시오. 아직은 이승에서 좀 더 즐기다 가겠다”고. 고령화를 풍자한 가상 우스개다. 그런데 70대 중반에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외쳐도 우스개가 아닌 ‘사건’이 발생했다. 77세의 퇴역 기자가 언론현장에 복귀하여 화제다. 주인공은 본회 함정훈 사업단장. 지난 4월 10일 아시아경제 편집위원으로 입사, ‘인생 2막’ 무대에 ‘요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편집 전설의 귀환, 70대 함정훈 기자, 아시아경제 편집위원으로 다시 뛴다.’(아시아경제 4월 10일자) ‘편집에 나이는 없다…계급장 떼고 후배들과 함께 호흡’(기자협회보 5월 7일자) ‘77세 아경 기자 입사, 함정훈 편집위원 언론계 화제로’(미디어 다음 5월 19일자) ‘내 마지막 편집은 내 묘비명…아직 그 제목을 못 달았다.’(중앙일보 5월 19일자) 미디어가 앞 다퉈 그의 신기한 행보를 조명했다. LA에서도 반응이 날아왔다. 30년 전 이민 가 소식 끊긴 그의 친구들이 미주 중앙일보를 보고 “야, 그 함정훈이 맞나? 축하한다”며 연이어 전화가 온다는 것. ‘77복귀’가 글로벌 뉴스가 됐다.
화제를 몰고 온 함 단장을 만나러 지난 5월 21일 오후, 충무로 아시아미디어타워 10층 아시아경제 편집국을 찾았다. 그는 모니터 앞에 앉아 이상국 편집 에디터와 제목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일하던 때가 생각나 “낯설게 보입니다”고 인사를 건네자 “46분의 1입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편집국 170여 명 가운데 편집 팀(오프라인, 온라인, 미술, 교열)은 46명. 인원이 예상 보다 많아 사세를 짐작케 한다.
●老 기자 25시
석간인 아시아경제는 하루 32∼40면 발행. 함 편집위원은 그 가운데 사회·스포츠·피플 등 스트레이트와 유통·부동산 등 전일 제작 간지 등 하루 5∼6개 면 편집을 데스킹 한다. 박종인 편집국장의 “조간 재탕 엄금”, 이상국 에디터의 “맹물 편집 엄금”지침을 염두에 두고 수습 중이라고 겸손해 한다. 이 에디터에게 물었다. “어떴습니까” “저로서야 대선배를 모셨으니 영광”이라고 한다. 한방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채용 면접 때 뭘 물어 보던가요?
“경영진과 편집국장 면접테스트를 받았지요. ‘건강은 어떤가’, ‘현장 떠난 지 얼마냐 됐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일로 대답을 가름 하겠다’고 했죠”
-보수는 만족하십니까?
“고용약정에 보수는 비밀로 하라는 문항이 있어서…. 과분한 대접이라고 말하고 싶네요”(웃음)
-젊은 후배들의 반응은?
“제가 입사 후밴데…. 그래서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어요.” 모니터를 통해 기사를 읽고 제목을 생각한 뒤 ‘온라인 쪽지’를 통해 의견을 제시한다. 시간이 촉박할 땐 편집기자 자리로 찾아가 “내 생각은 이런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조율한다. 왕년에 “이것도 제목이냐”고 목청을 높이며 ‘빠꾸’시키던 시절과 변해도 너∼무 변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술자리에 합석한 국민일보 후배는 “그렇게 사근사근해서야 함빠꾸 색깔이 나겠느냐”고 일침을 놓는다.
“마음은 앞서 가는 데…. 차츰 감각을 찾아가는 수습기간”이라는 그는 이상국 에디터에게 고침을 당한다”며 웃는다. 함빠꾸가 강적 ‘이빠꾸’에게 빠꾸당하는 격이다. 함빠꾸는 전성기 시절, 후배가 편집해 온 레이아웃이나 제목을 툭하면 ‘퇴짜 놓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자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 에디터는 중앙일보 편집기자 시절부터 정곡을 찌르는 제목과 독창적 편집을 해 그의 지면을 눈 여겨 봤으며 편집에 대한 열정과 수월성이 부럽다”고 ‘체험담’을 털어놓았다.
-일산서 출근하려면 바쁘시겠어요?
“새벽 4시 30분에 알람을 맞춰 놓지만 긴장 탓인지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더군요.” 새벽 시간은 쏜살 같이 흐른다. 05시37분에 출발하는 경의선 첫 차를 타려고 바쁘게 서두른다. 신록의 향기 묻어나는 새벽 공기는 상큼하다. 열차에 오르면 좌석은 거의 비어있다. 조간신문은 이 때 읽는다. 서울역서 지하철 4호선으로 환승하여 충무로 편집국에 도착하면 06시 38분. 책상에 아침 대용 빵과 우유, 주먹밥이 놓여 있다. 11시 최종 강판시간에 쫒기며 편집과의 전쟁을 치른다. 점심은 회사가 주변 식당과 예약해 놓아 사인만 하면 된다. 오후엔 간지 대장을 보거나 약속이 있는 날은 조기 퇴근을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그만큼 바빠진다.
●파격의 편집
1991년 4월 19일. 당시 석간인 국민일보 1면 톱 기사. ‘그 파란 물은 검은 死海였다’ 어께 제목인 부제 아래 주제 제목은 없고 ‘먹판’이다. 신문이 나오자 편집국이 술렁거렸다. “오류 아닌가?” “ 함빠꾸, 또 하나의 실험인가”라는 비판과 “파격적이다” “기발하다” “참신하다”는 평가가 엇갈렸다. 독자들도 “인쇄 사고냐” “외부 압력이냐”는 확인 전화가 빗발쳤다. 문자 매체가 문자를 포기함으로써 ‘검은 침묵’의 여운이 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은상의 가곡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환경오염으로 썩어가자 그가 법대 동기 허남훈 환경부장관과 함께 기획한 마산항 빛깔을 되찾아 주기 캠페인 첫 기사다. 국민일보 창간 편집국장인 그는 강판 직전까지 고민을 했다.
그 이른바 편집 사상 첫 ‘無字 흑판’ 제목 탄생의 배경을 그는 ‘국민일보 20년사’(132∼133쪽)에서 이렇게 회고 했다.
<“환경을 정화합시다” ‘그 파란 물은 죽었다’ 오염을 정화한다면서 오염된 상투적 제목만 무수히 떠오를 뿐 우선 내가 나를 납득시킬만한 헤드라인이 오리무중이었다. 강판 시간은 다가오는데 때 묻은 언어는 죽어줘야 했다. 나는 거꾸로 가기로 작심했다. 逆발상의 발상, 없으면 없는 대로 가는 거다. 시커먼 먹판이 1면을 덮었다.>
그 뒤에도 파격의 편집은 이어졌다. 오리무중에 빠진 학력고사 문제지 도난사건수사를 다룬 ‘‘無字 백판’(1992년 1월 30일자), ‘‘無言 흑판’ 등 파격적 편집은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국민일보에서 두 번의 편집국장을 거친 그는 서울신문에서도 편집국장을 거쳤다. 세 차례의 편집국장도 파격이다. 80년대 초 李振羲 서울신문 사장은 당시 함정훈 편집부장을 국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그의 ‘파격’을 인정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함빠꾸의 파격편집 몸짓은 1970년 초 한글 전용 편집으로 기자협회편집상을 수상하면서 지면을 장식했다. “우리말 제목 달기는 곧 漢字추방인데 한문을 한글로 글자만 바꾸니 도저히 뜻을 나타낼 수가 없어 아예 문장을 바꿀 수 없었다”고 회고 한다. “파격은 궁여지책의 산물”이라며 쓴웃음을 짓는다. “우리말 소통의 길을 찾다보니 말랑한 일상용어, 구어체를 즐겨 쓰게 되고 다른 신문과의 차별화가 이뤄지더라”고 말한다.
-‘편집 전설’의 편집이란?
“편집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면체라 생각합니다. 여러 얼굴을 가진 그 무엇이죠. 그 정답을 찾으려 우리 둘이 밤샘 토론을 해도 코끼리 더듬기 일 것 같네요. 다시 편집현장에 발을 담근 것도 최후의 정답에 다가서려는 발걸음의 일환입니다. 인생도 편집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 인생의 마지막 편집은 나의 묘비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그 제목을 달지 못했습니다. 내가 좀 오버 했나요?” 그의 언어는 진언과 현학의 경계를 넘나든다.
●왜 편집인가?
1960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함정훈은 그 해 부산일보 수습기자로 들어갔다. 사회부 기자 초년병 시절, 밤새워 쓴 단독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편집부 선배에게 따졌다. “레이아웃 끝났다. 그 기사 자리 없다.” “단독 기사면 내일 넣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편집자의 예사로운 대꾸에 그는 화가 났다. “조물대감이구나. 편집자가 넣으면 뉴스고 안 넣으면 뉴스가 아닌 거구나 싶어 ‘호랑이 굴’로 자청해 들어갔다”고 한다.
편집에 물이 오를 때쯤 5․16쿠데타가 터졌다, 뒤늦게 입대했다. 만기전역을 한 뒤 부산일보에 복직할까 망설이던 차에 대한일보 견습기자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 다시 수습기자로 입사했다. 전공이 배려되어 발령 난 부서는 사회부 법조팀. 朴容來 편집국장에게 “편집을 하고 싶다”고 두 차례 애걸 끝에 편집부에 입성했다.
그는 늘 새로운 편집에 목말랐다. 신생 국민일보가 그를 불렀다. 미친 듯 편집 쿠데타를 도모, 꿈의 한 자락을 펼치다 퇴임 후 언론연구원정책연구본부장, 서울언론인클럽부회장, 한국홍보포럼이사장, 환경매일 부회장 등을 지냈다. KMC(국민 미디어 클럽)회장으로 국민일보 퇴직 사우들의 가교역할을 하며 올해 새로 출범한 본회 김은구 회장 체제에서 회장 상담역과 사업단장을 맡았다.
-왜 司試 아닌 言試를 선택했나요?,
“정미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구 남매 중 막내였죠.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큰 형님이 ‘우리 집에도 법관 한 명은 있어야 안 되겠나’ 하며 담임선생님께 전화하여 법대에 원서를 쓰게 했어요. 학교를 다니면서도 전공과목 보다는 ‘文思哲’에 관심이 많아 담장 넘어 문리대 강의를 많이 들었어요.” 졸업생은 300명인데 사시합격자는 10명 정도여서 응시해보려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한다. “취향은 문사철 쪽인데다 자질이 어긋난 탓 아니겠느냐”며 웃는다.
-본회 사업단장으로 구상은?
“김은구 회장에게 사의를 밝힌 마당인데…. 김 회장은 힘 있는 대한언론인회를 만들자고 했잖아요. 힘이 있으려면 조직 구성도 젊어져야 합니다. ‘대한노인회’라 소리는 거슬립니다. 나도 현역시절 대한언론인회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가입 절차도 몰랐고 권유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정년을 앞둔 현역 기자들을 미리 파악, 가입을 권하고 현역 국장급은 ‘준회원‘으로 영입하면 대한언론인회가 퇴역과 현역을 아우르는 국내 유일, 최대의 힘 있는 언론인단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함 단장은 “퇴직언론인의 본회 영입노력 못잖게 역으로 우리도 언론사에 들어가는 쌍방향 교류의 길을 찾아보면 어떨까, 제가 역수출의 첫 주자인 것 같다.”며 그래서 어께가 무겁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선례가 될 수 있기에 더 열정을 가지고 해야겠다.”고 다짐한다는 것. “저비용 고효율, 우리는 쉬고 있는 잠재 능력을 ‘기부’할 수 있고 경영자는 퇴직기자 노하우를 ‘염가‘로 재활용할 수 있으니 공생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열쇠는 경영자 쪽에 있어요. ‘아시아 경제’처럼 CEO의 파격적인 오픈 마인드가 중요한데…”
함 사업단장은 우리 언론인회 사업 몇 가지를 내놓았다. “대학과 제휴하는 ‘언론 아카데미’를 개설, ‘기자 실무’를 강의하면 언론사 초년병과 재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학과 ‘홍보’에도 활용할 수 있으니 윈윈 아니겠느냐”고 한다. 현재 발행하고 있는 ‘大韓言論’ 외에 차별화된 새로운 위클리나 먼슬리를 만들어 有價로 배포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왕년에 한가락 하던 600명의 베테랑들이 다시 펜을 들면 아마 지상 최대의 언론 쇼가 펼쳐질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80세 老顔으로 태어난 아이가 나이 들수록 젊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주인공 ‘벤자민 버튼’이 생각난다. 인생 2모작 무대에 올라 인생을 재편집하는 老기자 함빠구의 시계는 여전히 빠꾸하고 있다. 치열한 편집현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