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다시 뛴다(5) 李慶植 영문 월간 ‘Korea Post’ 발행인 -이규섭편집위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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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31일 10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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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4-8-1 <대한언론 2014년 8월호>
인생 2막…다시 뛴다(5)李慶植 영문 월간 ‘Korea Post’ 발행인 겸 회장
인터뷰·사진 / 이규섭 본보 편집위원 ․ 칼럼니스트
영어 인생 60여년⋯“민간외교 긍지로 영문 월간지 만든다”
압록강까지 수복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긴 1951년 1․4 후퇴 때. 서울 청구 중학교 4학년이던 열여덟 살 까까머리 청소년은 피난대열에 끼여 오산 친척 집으로 갔다. 완전무장을 한 미군 정찰 수색대원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이 마을에 적군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알아듣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까까머리 청소년이 나섰다. “며칠 전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도망가고 없다”고 말했다. 미군은 “영어를 잘 한다”고 칭찬하며 초콜릿과 C레이션을 주고 갔다. 학교 영어성적이 좋았던 덕을 톡톡히 봤다.
영어하는 사람이 드문 시절이다. 친척은 “서울은 불바다가 됐다니 장가도 들고 이 마을에 눌러 살라”고 부추겼다. 그는 겁이 덜컥 났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시골에서 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궁리 끝에 오산 인근에 주둔한 미군부대 사령관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썼다. 수취인은 ‘The Supreme Commander(최고 사령관)’. ‘유엔군 통역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다음날 편지를 들고 부대를 찾아 보초에게 전달했다. 잠시 뒤 영국군 중위가 통역관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내일 부대가 이동하니 당장 짐을 싸가지고 오라”는 것.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취직이 됐다. 그 부대는 미군이 아니라 영국 제1연방사단 제29여단 얼스타연대 제1대대였다. 영국군 중위는 던럽, 통역관은 육국통역장교 1기생 이한선씨다. ‘영어 인생’ 60여년의 시작이다.
영문 월간 ‘Korea Post’ 誌齡 27년
까까머리 청소년은 어느새 여든 셋. 본회 李慶植 원로회우다. ‘인생 2막’ 무대를 설치한 건 1985년.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7년 영문 월간 ‘Korea Post’를 창간했다. 27년 간 결호 없이 발행했다. 지난 11일, 때 이른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 성동구 옥수동에 위치한 사무실을 찾았다. 복도 창가에 발행된 월간지를 가지런히 진열해 놓았다. 회장실과 편집실 비좁은 공간에 자료들이 빼곡하다. 세월이 봉인 된 추억의 출판사 풍경이 퇴색한 책갈피처럼 정감이 든다. 李 회우는 왜소한 체격이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건강미가 넘친다. “훌륭한 분들이 많은 데 누추한 곳까지 찾아왔다”며 반갑게 맞이한다.
-활자산업이 전반적으로 사양길인데 영업 전략은?
“올해는 세월호 여파로 광고 수주 등 어려움이 더 많았습니다. 영어 붐이 일면서 잘 나갈 때는 3만 5,000부 찍었으나 최근에는 발행 부수를 줄였어요. 영업 전략이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각국 국경기념일이나 국가 원수 취임식 등 특집기획으로 판매 부수를 늘리고, 105개국 주한 대사들의 지자체 행사 참가와 상무관들의 기업 탐방 프로젝트 운영등으로 지자체 광고를 유치하고 있습니다.”
-‘Korea Post’의 편집방향은?
“고급 정치, 외교, 경제, 문화 등 종합 영문매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지난 뉴스의 보강이나 재탕이 아니라 권위 있는 분석기사로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를 한국에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어요.” ‘광고는 없어도 독자 없이는 못 산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Korea Post’는 국배판 68쪽 전면 컬러다. 세계 232개국의 국가원수, 주한 각국대사 및 각급 외교관, 무역대표부, 다국적 기업의 CEO, 일반인 등 폭넓게 배포한다. ‘Korea Post’ 이외에도 일간 ‘Korean Daily Media Headlines’, ‘영문 인터넷 신문’, 한글 인터넷 版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Top Headlines Today’는 국내 유력 일간지에서 그날의 톱뉴스 헤드라인을 발췌하여, 빠르게 번역한 뒤 10쪽 정도의 분량으로 재편집, 매일 아침 ‘Korea Post’의 고정 유료 독자와 잠재 독자에게 e-메일로 무료 발송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 회장은 지금도 분석기사와 특집기사 대부분은 직접 취재하고 쓰며 노익장을 과시한다.
-주한 외교사절단의 지자체 탐방과 상무관 기업 방문 성과는?
“대사들은 본인이 모르거나 잘 알지 못하는 Tour에는 참가하기를 꺼립니다. 또한 지역축제나 행사에 참석한 기사가 제대로 나와야 본국에 보고하여 자신들이 한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지요. 저희는 그동안 Protocol(외교의전)을 충분히 익혔고 Rule과 Principle을 차질 없이 실천하여 대사들 사이에서 높은 신망을 받고 있습니다.
프로타 포르투갈 대사는 이임하면서 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어요 ‘제가 한국을 즐기면서 살아온 지난 3년 동안 이경식 회장과 직원들은 외교사절들로 하여금 한국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고 했어요. 지자체에서는 투자유치가 늘어나고 자매결연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경제, 문화, 관광 등 교류와 협력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영어에 빠져 영어가 살았다”
이야기를 ‘인생1막’ 무대로 되돌린다.
-영국군 부대 통역은 몇 년 했는지요?
“4년 6개월 동안 노포크연대, 왕의 연대, 국왕 직속연대, 사단 헌병대 등을돌며 근무 했어 요. 부대에서 영어로 말하고 쓰며 생활하다보니 영어 실력이 쌓이는 계기가 됐지요. 선배 통역관들이 술 마시고 노는 사이 저는 살아남으려고 영어공부에 매달렸어요. 당시 통역을 잘
못하여 총살당했다는 미확인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았고, 1년마다 계약 경신을 해야 하기에 공부하지 않으면 낙오되기 십상이지요. 하루에 단어 100개씩을 외우기도하고, 타임과 뉴스위크지, 사단 영자신문, 세익피어 명작 등 닥치는 대로 읽었죠.”휴전협정 이후 1955년 그 가 속한 영국부대도 철수했다. 통역관 시절 보류됐던 징집영장이 나와 늦은 나이에 현역입대 했다. 훈련소에서도 통역을 했고, 첩보부대 미 고문관실에 배속되어 통역병으로 근무했다. 3년 만기 제대 후 한국문학 번역에 매달렸다. ‘명품 영어’ 소문이 나면서 일감이 늘었다. 한 대기업 브랜드와 사훈을 번역해주고 A4용지 1장 분량에 300만원까지 받았다. 요즘 화폐가치로 따지면 3억원 정도 되지 않았을까?. 처음 직장을 잡은 곳은 1965년 ‘뉴 아시아 프레스(New Asia Press)’란 통신사. 말이 통신사지 한국 일간신문의 주요기사를 번역해 미국 대사관에 제공하고, 필요한 고객에게 고가로판매하는 곳이었다.
‘명품 영어’로 한국번역문학상 수상
-한국문학번역상도 받으셨지요?
“그렇습니다. 1970년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가 공동 주최하는 ‘한국문학역상’이 있었지
요. 한국일보 창간기념 행사의 하나로 권위가 높았습니다. 번역 작가의 등문인 셈이죠. 심사의 객관성 보장을 위해 당시 영국성공회 리처드 럿(Richard Rutt) 주교가 심사위원장을맡았어요. 박기원의 단편 ‘사랑의 집념’을 번역해 가작 입선, 3만원의 상금을 받았어요.”
자심감이 붙어 이듬해 다시 도전했으나 낙방하고 1973년 오영수 단편‘내일의 삽화’를 번역하여 대상의영예를 차지했다. ‘내일의 삽화’는 인민군 의용군인 주인공이 낙오되었다가 인민군 패잔병으로 편입되면서 일어나는 갈등을 다뤘다. 상금도 껑충 뛰어 20만원 받았다. 원어민이나 원어민과 내국인의 공역(共譯)이 많았는데 내국인의 단독 번역은 그가 처음이다.
본격적으로 한국문학 번역 일을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코리아헤럴드의 고정직은 사양하고 일주일에 한번 칼럼을 쓰기로 했다. 당시 김수용 편집국장을 통해 Journalist English가 일반 영문과는 다른 점을 많이 배웠다. 얼마 뒤 새로 부임한 윤익한 편집국장의 제의로 문화부장 직을 맡았다. “영문은 글쓰는 속도와 질이 정비례합니다. 글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어휘 범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어휘를 알고 있느냐에 따라 문체가 다채로워지지요. 당시 특집부장
까지 겸하게 되어 많은 기사를 썼습니다. 효와 충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정신적 운동인 ‘새마음 운동’ 특집기획 시리즈, 주한 각국 대사와 부인을 인터뷰하는 ‘Bridging the Gaps’, 주한 외교가의 각종 행사를 취재한 ‘People & Events’가 기억에 남습니다. 외교가 행사를 다룬 노하우가 영자 월간지 제작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유탄을 맞고 그는 신문사를 떠났다.
다시 번역 일을 시작하려는데 문화공보부 해외공보관실 전문위원자리
났는데 일해 보지않겠느냐는 친구의 제의가 들어와 정부간행물과 보
도자료를 번역했다. 대기업 기획조정실에서 영문 사보를 창간해
달라는제의를 받고 자리를 옮겼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안정 된 시절이었다. 숙원이던 대학공부를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
통신대학교(The Pacific Western University)에 입학하여 통신 강의를
들었다. 학사, 석사 과정을 거친 뒤 ‘한국의 언론史’(영문)로 1987년 박
사학위를 받았다. “학교 인정 논란이 일고 있지만 개의하지 않습니다.
학위와 졸업증명서는 로펌의 공증이 되어있고 캘리포니아 주정부
교육청은 이를 증명하여 서명을 하고 있어요. 훌륭한 분들을 많이
배출했고, 내실을다지는 계기가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그는 2005년 우즈베키스탄공화국 타시켄트 국립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
위를 받았다. 동양학에 대한 지식과 양국 간 교육과학기술 교류협력과 우호
증진 공로다. 2009년에는 우즈베 키스탄공화국에서 양국 우호 공로훈장을 받
았다.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이다.
“나이 잊고 일하는 즐거움”
-일과는?
“나이 들면 잠이 없다더니 5시 30분경이면 일어납니다. 서빙고동 단독주택
옥상 화분에 물을 준 뒤 아침 식사는 가볍게 하고 7시 30분경에 출근해 신
문을 보고 그날 할 일을 챙깁니다. 낮엔 외교관들을 가끔 만나지요.
-보람은?
“나이를 잊고 일할 수 있는 것이 보람이죠. 일할 수 있다는 즐거움은 보수
로 환산할 수 없잖아요? 영문 월간지를 만들면서 세계 정상들을 인터뷰 한
것도 보람이지요. 영국의 메이저수상(1996), 필리핀 라모스 대통령(1995), 핀
란드 할로넨수상(2002), 나이지리아 오바산조 대통령(2000), 노르웨이 본데빅
수상(2002), 방글라데시 지아 대통령(1995), 몽고의 바가반디 대통령(199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