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덕규(林德圭) 외교전문 영문 월간지 ‘디플로머시’(Diplomacy) 발행인 겸 회장은 “39년 동안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행하면서 어려움이 많았겠다”고 묻자 달관한 듯 에둘러 대답한다. 경영 상태 질문엔 “1억 벌어 1억 1000만원 쓰면 적자, 9000만원 쓰면 1000만원 흑자 아닌가요” 낙천적이다. 순발력과 재치가 돋보인다. “NO를 설득해 YES로 이끌어 내는 것이 민간 외교관”이라는 외교적 수사도 능수능란하다. 한 가지 질문에 생생한 기억력으로 사례를 들며 다층구조로 설명한다.
지난 8월 13일 서울 다동에 위치한 ‘디플로머시’ 사무실을 찾았다. 편집실에 들어서니 표지가 한쪽 벽면에 빼곡하다. 각국 대통령, 수상, 국왕, 석학, UN사무총장 등 세계 지도자와 저명인사가 표지 인물로 등장했다. 창간호 표지는 포드 대통령 가족사진. 커버스토리는 한·미관계와 성조기 변천사, 역대 미국 대통령의 친필 서명, 역대 주한 미국 대사 사진 등 특집으로 꾸몄다. 한쪽 벽엔 그가 세계 지도자들과 만난 사진이 걸렸다. 토니 블레어, 고르바초프, 장쩌민, 후진타오, 후쿠다, 나카소네, 아키노, 인디라 간디, 바웬사, 만델라, 라빈, 마하티르, 아키노, 토인비, 발트하임, 지난해 12월 방한한 촘말리 사야손 라오스 대통령 등 460여명을 단독 인터뷰하며 찍은 사진들이다.
林德圭 회우는 호적 보다 한 살 많은 여든으로 단신에 다부진 체격이다. 빨간 넥타이처럼 열정적이고 달변이다. 인터뷰 2시간과 반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까지 3시간 넘게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를 털어놓으며 수많은 인물들을 줄줄이 꿴다.
‘무관의 전권 대사’
-국가원수 급 섭외가 만만찮을 텐데요?
“주한 외교사절들을 활용하거나 회장을 맡았던 세계국제법협회, AP 등 해외 언론계 지인 등 인적 네크워크를 적극 활용합니다. 국가원수 측에 인터뷰 요청을 하면 실무진이나 비서진들은 “바쁘니까 시간을 내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러면 “바쁘니까 뉴스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한가하면 인터뷰하자고 안 한다”고 말하지요. 끈질기게 설득하면 기회가 열리더군요.”
그가 구축한 어드바이서(adviser) 네트워크는 500여명. 각국의 정상과 장관, 유엔을 비롯한 APEC·EU·아세안 등 국제기구 관계자,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석학, 대기업 총수 등 쟁쟁한 인사들로 ‘글로벌 마당발’이다. 디플로머시 콘텐츠 옆 페이지(6P)엔 ‘Diplomacy Family’ 명단을 깨알처럼 박아놓았다. 그들은 자문에 응하거나 기고로 제작에 참여한다.
-현지 방문 인터뷰가 많겠군요?
“방한하는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만나 인터뷰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현지를 방문해 인터뷰 합니다. 미주나 유럽, 중동 등 잘 알려진 나라도 많지만 피지, 지부티, 부르키나파소, 베냉 등 이름조차 낯선 나라까지 100여 개국이 넘습니다.” 초청형식으로 부부가 함께 간다고 한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내의 내조 덕을 톡톡히 본다는 것. “정부 지원은 1원도 받은 적 없다”며 민간외교 역할을 수행한다. 인터뷰 방향도 경협 등 국익우선에 바탕을 두고 국왕이나 총리·대통령들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그 나라 소개에 역점을 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단점만 들추면 싸움이 나고 장점을 부각시키면 평화가 온다.”고 강조한다. ‘장점 따라 삼만리’가 사훈 격이다. 대인관계도 흉허물은 덮고 좋은 점만 부각시키며 친화력을 발휘한다.
2001년 12월 국제사회에서 줄곧 북한 편만 들어오던 알제리 부테플리카 대통령을 인터뷰하면서 “한국은 김정일과 친한 사람이 필요하니 대통령께서 남북한 간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알제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한국 기업들이 돕도록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외교는 윈윈이자 기브 엔 테이크”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林 회장의 주선으로 2003년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됐다. 외교관들 사이에 ‘닥터 림’으로 통하는 그가 국내에서 ‘무관의 전권 대사’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70년대는 먹고 살기도 힘들고 영문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문 시기에 영문 외교전문지를 창간하게 된 계기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2대 외무장관과 유엔대사를 지낸 임병직(林炳稷) 박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1960년 동국대 법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1963년, 집안 아저씨뻘인 임 박사가 귀국하자 10년 동안 개인적으로 보좌를 하게 됐어요. 그 무렵 철기 이범석 장군, 윤치영 박사, 이갑성 옹, 안호상 박사 등을 만나 독립운동 정신과 그분들의 나라사랑을 알게 됐지요. 임 박사가 인도 대사로 있는 동안 ‘한·인도 친선협회’를 만들어 간사로 활동하면서 외교를 경험했습니다. 1972년 임 박사가 뮌헨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을 알리기 위해 예술단을 이끌고 유럽 순방에 나서기 직전 제게 ‘앞으로 먹고 살 생각만 하지 말고 영어로 잡지를 만들어 외국지도자들을 설득하면 국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고 당부하셨어요.” 그는 영문 잡지 창간이 아무리 어려워도 목숨 걸고 하는 독립운동 보다 쉽지 않겠느냐는 각오와 배짱으로 시작했다. 주위에선 미친 짓이라며 극구 말렸다. 창간 준비에 2∼3년 걸렸다. 유신 때라 출판 등록도 까다로웠다. 가장 큰 걸림돌은 창간 자금이다. 집과 백색전화를 저당 잡히고 사무실을 얻은 다음 1975년 8월5일 창간호를 냈다. 100사람을 만나 광고 한 건 얻어내면 다행이라고 여기며 세일즈맨으로 열심히 뛰며 39년을 달려왔다.
푯대를 향하여
-영어실력이 특출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질문을 자주 받았죠. 논산에서 배웠다고 하면 그 시절 논산에 어학원이 있었느냐고 되묻습니다. 김대건 신부(세례명 안드레아)의 이름을 딴 논산 대건중고등학교는 1945년 대건중등영어강습소로 출범했습니다. 당시 논산군 부적면 탑정리 집에서 학교까지 6㎞를 오가며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운 게 밑거름이 됐습니다.”
林 회장은 목표 지향적이다. 초등학생 때 “중학교부터는 고학을 해서라도 서울에서 다녀야 한다”고 푯대를 세웠다. 시골의 고봉밥 대신 서울의 공기밥 먹는 연습으로 식사량을 줄이기 시작해 소식주의자가 됐다. 목표대로 서울 철도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안 맞아 인천중학교로 전학했다. 6‧25전쟁 통에 대건중학교로 옮겨 대건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휴전 후 서울 동성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한학자인 아버지가 열 두마지기 농사로 겨우 밥만 먹던 고3 때부터 8년 동안 가정교사를 했다.
정치인의 꿈을 키운 건 중학교 때. 대학 입학 후 각 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軍을 무시하고는 큰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육사생도를 참여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대건중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15년 동안 맡아 한·미재단 장학금 등 많은 장학금을 유치하여 모교에 지원하도록 주선했다. 긴 안목의 선거 전략이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때 한국국민당으로 논산·공주 지역구에 출마했다. 선거구가 77곳에서 92곳으로 늘고, 1개 지역구에서 2명을 뽑았다. 민정당 정석모 의원과 함께 당선됐다. 국회에서도 마당발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외무위서 남북양자회담을 촉구했고, 남북총리회담으로 결실을 맺었다. 국제의원연맹 대표로 북한대표를 설득, 남북국회 회담을 최초로 성사시켰다.
-반기문 UN사무총장 탄생의 ‘일등공신’이라는데…
“반기문 UN사무총장 탄생의 막후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UN사무총장을 배출하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죠. 오랫동안 지켜 본 반기문은 애국심, 탁월한 외교력과 전문성, 예의와 겸손함을 지닌 인간미가 넘치는 등 적임자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2004년 초 외무장관이 되자마자 UN사무총장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어요.”
林 회장과 반 총장의 인연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임 회장은 한·인도친선협회 간사를, 반 총장은 인도대사관 사무관으로 있으며 업무관계로 만나 친숙해졌다. 미국은 나토 사령부를 폴란드로 옮기기 위해 폴란드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유엔 사무총장이 아시아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자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해 이번은 아세아 차례인데 아시아 사무총장이 안 나오면 거부권 행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반 장관 방미 땐 라이스 국무장관과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당부했다.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폴란드 대통령으로 하여금 출마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각 나라 정상들과 주한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반사모(반기문 장관을 사랑하는 모임)’를 만들어 선거운동을 펼쳤다. 모임 때마다 ‘반사모’가 인사로 통했다. 언론사 기고를 통해 ‘유엔사무총장은 꿈이 아니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장관직을 사퇴하고 출마하라는 여론이 일 때는 주요 언론 주필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세 차례의 예비투표에서 1등 한 것을 지켜본 뒤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선거운동을 했다.
-보람은?
“IMF 위기 때 제다요 멕시코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경제 위기는 가까운 시일 내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답변을 이끌어 냈어요. AP 통신은 디플로머시 기사를 인용 보도하여 국제신인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게 기억에 남습니다.”
“70년대는 한국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90년대부터는 외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면 한국처럼 될 수 있느냐 조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 일이 많았다”며 “한국의 위상을 피부로 느낀 것도 보람”이라고 한다.
짧은 1막, 긴 2막
林 회우의 인생 1막은 짧고 2막은 길다. 1966년부터 4년 동안 동국대와 서강대에서 국제법과 행정법을 강의할 때 장기봉 신아일보 사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논설위원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언론계 경험이 없다”고 사양하자 “국제법을 전공했으니 국제 동향과 해외언론 관계를 다뤄주면 된다”기에 전공분야라 수락했다. 1968년이다. 그 뒤 동화통신 논설위원을 거쳐 출판국장대행으로 ‘동화그라프’ 화보를 제작한 뒤 출판인으로 인생 2막을 열었다. 언론현장을 떠난 뒤 최석채, 오소백, 이혜복 등 언론계 원로들을 만나 언론인 동호회 결성의 필요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특별히 하시는 운동은?
“국회의원 시절 골프를 쳤으나 선거운동과 뇌 운동만 합니다.”
잦은 해외 출장으로 춘하추동을 모르고 밤낮이 바뀌는 생활을 하다 보니 주말에도 출근을 한다. 중동은 토요일이 월요일, 일요일은 화요일이니 주말에 섭외를 한다. 반기문 총장과의 통화도 반 총장이 퇴근한 저녁이면 한국은 낮이니 자연스럽다고 한다.
충청권 명사들의 모임인 ‘百笑會(백제의 미소) 총무를 맡아 특유의 친화력으로 매월 정기모임을 주선한다. 잡지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8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틈틈이 대학과 관공서를 돌며 해외 정상들 취재 일화를 중심으로 리더십 특강을 한다. “기회가 되면 언론인회 회우들에게도 파워포인트로 보고회를 가지고 싶다”고 밝힌다. 부인 李靜順 여사(81)와의 사이에 3남 1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