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완 원로 회우가 9월 4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은 1929년 1월 2일 서울 출생으로 주앙대 국문과를 수료 1959년 동화통신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 담았다. 1965년 중앙일보 창간 시 편집국 사진부기자로 발탁되어
출판부 사진 미술부 부장 부국장을 거쳐 1984년 정년퇴직했다.
이종완 선배의 명복을 빌며
이 해 범(전 중앙일보 출판국 부국장)
지난 9월 5일 금요일 오후, 존경하던 이 종완 선배의 빈소를 찾았을 때, 80년대 명 가드로 농구코트를 주름잡던 아들 성원씨는 아직 미국에서 귀국 중이였고, 두 따님 향숙씨, 성숙씨, 그리고 두 사위, 또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외 손자 동혁이가 이미 훤칠한 청년이 되어 빈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 송이 흰 국화꽃을 선배의 영전에 바치는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의 비늘들이 저를 과거의 시간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국장을 처음 만난 것은 60년대 말, 어떤 VIP의 도착을 취재하기 위해 김포국제공항 에 갔을 때 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 사진기자들은 조금이라도 촬영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위에 자리다툼을 하며 웅성거리는 현장이었는데, 다소 늦게 도착한 새내기 기자인 저는 선배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어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짧은 스포츠 머리에 듬직해 보이는 몸매의 사나이가 빙그레 웃으며 틈을 내 주셨는데 이 분이 바로 이종완 기자였습니다.
언제인가 밤중에 일어난 사건 현장에서 제가 후래시가 고장이 나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그는 흔쾌히 후래시를 빌려 주어서 간신히 낙종의 위기를 면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던가. 저는 그 분의 집요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중앙일보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고, 그분이 부서를 출판국으로 옮기자, 덩달아 저도 이 국장을 따라갔었지요.
어느날 제가 신당동에 있는 이 국장 댁을 방문했을 때, 북통만한 좁은 방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차이콥스키의 1812년이 꽝꽝 울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양반이 이렇게 클래식을 좋아했던가? 물론 이미 오래전 그 분이 공군군악대 출신이고, 큰북의 고수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광인 줄은 미쳐 모르고 있었던 터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사진전을 열던 무지개회라는 서클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사진가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분의 음악에 살고 사진에 산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그 분을 기리는 것은 그가 후배의 실수를 나무라기 보다는 감싸 안는, 마치 따뜻한 봄날 병아리를 품는 어미닭의 날개처럼 푸근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창피한 이야기지만 저를 비롯한 후배들이 촬영에 실패해서 마감일을 지키지 못하는 난감한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 때마다 그 책임을 자신이 떠 안았고 문제를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하던 방파제였고 해결사였습니다. 이 국장님, 아니 이종완 집사님. 슬픔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