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귀촌은 식자의 꿈이자 로망이다. 향수병 같기도 하다. 농촌 출신이 아니라 도회지 출신에 이런 향수병이 더 잘 걸린다. 특히 기자 출신들에게 마치 유행병 같이 귀향의 유혹이 스미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인생 전반전을 전투라도 치르듯이 치열하게 살아온 탓에 느긋하게 인생2막을 연출해보자는 의도야 아니 멋지랴마는 과연 인생후반전이 그리 만만치만은 않을 것이다.
녹수청산(綠水靑山)에 음풍영월(吟風咏月)을 누리려 영월오지로 귀농 귀향한 고명진 회우(미디어기자박물관장 · 전 한국일보 사진부장)는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별을 보고 점을 칠 시간도, 영월 달을 농월(弄月)할 시간이 없다. 인생2막도 치열하기는 그 전막 못지않기 때문이다. 3,000평 넓은 대지의 한 쪽에 텃밭을 가꾸며 몸에 좋다는 채소라도 길러 보려했으나 씨를 뿌릴 시간이 없어 여기서 자라는 것은 잡초뿐이다. 오히려 덩치 큰 제초기를 들고 위험한 풀깎이를 해야 할 판이다.
고 회우의 귀향소식은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졌다. 영월의 폐교 하나를 구입해 멋진 자연사박물관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 회우의 박물관은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서강로에 자리잡고 있다. 유명한 동강의 맞은편 서강쪽이다. 군의 다운타운과는 승용차로 약20분 정도 거리다.
텃밭 가꿀 시간도 모자라
고 회우가 이곳으로 귀농한지는 이제 2년쯤 된다. 그러나 그의 현직 타이틀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월의료원 이사, 영월박물관협회 부회장, 중앙자살예방센터 미디어위원, 아시아기자협회 감사, 강원도 재능나눔봉사단 위원, 영월군농촌관광협의회 부회장 등 여러 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2막의 액세서리다.
1막에서의 타이틀을 보자.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신문학 석사, 한국사진기자협회 회장, 국민권익위원회 홍보위원, 사회통합위원회 홍보위원,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홍보실행위원 등. 그가 왜 평소 귀농을 꿈꿔 왔는지, 그리고 귀농 후에도 그가 왜 이리 바쁜지 알 만하다.
고 회우의 인생2막은 현재 입구 쪽에 가깝지만 그 내용의 비중으로 보아 출구는 깜깜하게 멀어 보인다.
일단 귀향은 성공적이다. 고 회우는 칸트의 ‘행복론’을 입에 달고 산다. 아주 바쁘고, 바빠서 행복하다는 것이다.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마지막으로 희망이 있다면 더 무엇을 원하겠는가.
고 회우가 어려운 귀향의 길을 과감히 선택한 것도 이 세 가지 조건에 자신이 곡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일이 있고, 있어도 아주 많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희망이야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수수께끼의 해답이듯이 도전적 고 회우에게는 그의 양 어께에 단단히 걸려있다.
고교 때부터 기자의 꿈 키워
차차 스토리가 밝혀지겠지만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고 회우의 1막은 순애보의 장이며 2막은 약속의 장이다.
2012년 2월28일은 고 회우가 서울에서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광전2리로 주소지를 바꾼 날이다. 6‧25 발발 다음해 아버지가 피난갔던 부산에서 태어난 후 서울로 올라와 줄곧 서울에서만 살았던 그가 귀촌을 결정하고 강원도 오지로 부부가 함께 내려 온 것이다.
고 회우는 현역 때 열혈 기자로 용맹을 떨쳤었다.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기록을 남긴다는 철칙에 따라 그는 늘 그 때 그곳에 있는 기자로 뛰었다.
그는 일찍부터 기자의 꿈을 키웠다. 신일고 1학년 때 학교신문의 보도부차장이었다. 그의 종횡무진 활약으로 1학년이면서도 차장자리를 꿰찰 정도였다. 이 때 이미 그의 진로는 결정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카메라다. 그는 고교입학 기념으로 카메라를 선물 받았다. 물론 갖고 싶다고 Ep를 쓰긴 했어도 그의 품에 놀랍게도 당시의 고급카메라인 아사히펜탁스가 안겨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키포인트였다. 이때부터 그는 카메라에 영혼이 팔린 사람 같았다. 그러기에 카메라들은 지금까지 그의 손을 떠나지 못한다. 아니 그가 카메라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카메라 때문에 귀향한 영월에서도 신문과 사진 등이 중심이 된 미디어기자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고 회우는 지금도 강의를 할 때는 중고교시절의 학습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고교시절 미래의 꿈을 키워주신 은사의 얘기를 하면서 후진들에게 진로체험학습을 지도한다.
그는 현역시절 자신의 노후에는 대학강단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려면 학위가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통장하나를 내놨다. 남편의 생각을 아는 부인이 그를 강단에 세우기 위해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한 것이다. 남편 몰래 적금을 들었다가 만기가 돼 돈을 찾았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그 정성으로 2년간 시간을 쪼게 대학원에서 열공을 했고 마침내 학위를 땄으며 나중에 강단에 서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한국일보의 경영상태가 어려워지면서 직원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이 무렵 고 회우의 부인이 병상에 누웠다. 대장암이었다고 한다.
고 회우의 정성스런 돌봄이 있었지만 2년간의 투병 끝에 부인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87년 보도사진집 출판
고 회우의 1막은 이렇게 아픔과 투혼의 계절로 점철돼 있다.
고 회우는 사진기자로서 80년대 민주화 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보고 싶었다. 신문에 나가지 않은 사진, 나가지 못한 사진들을 집대성해 87년 보도사진집 ‘그날 그 거리’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 자신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사진기자는 자신의 기록이 중요하다면서 사진기자들이 취재하는 모습들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열성이 지나쳐 현장취재는 안보내고 취재하는 기자들의 모습만 송고하느냐고 데스크의 질책을 받기도 했다. 이 자료들은 현 미디어기자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고 회우는 2004년 한국일보에서 명퇴하고 통신매체 뉴시스로 자리를 옮겼다. 나중에 서울경제사장을 역임했던 선배 김서웅 국장이 뉴시스를 인수하면서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뉴시스에서는 사진영상국장을 맡았다. 편집국과 사진영상국의 특이한 2원체제가 눈길을 끌었는데 이는 고명진 회우의 고집스런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모든 기자는 ‘카메라를 보유하라’는 특명을 내리고 말 그대로 닥치는대로 현장을 포착하라고 지시했다.
연합통신을 이기는 길은 연합보다 ‘30분 먼저, 그리고 30분 더’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 시간에 현장을 찍는 것은 우리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경영 논문제출 심사받아
어찌보면 ‘질 보다 양’으로 승부해보고 싶은 고 회우의 고집이 아니었나 싶다.
모태신앙의 독실한 기독교도이기도 한 고 회우에게 언젠가 한 교우로부터 만남의 요청을 받았다. 독신으로 사는 모습이 초라해 보였는지 삶의 파트너 한 사람을 소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영월에서 제2의 인생설계를 꿈꾸게 한 현 미디어기자박물관 실장이며 부인 김영숙씨와의 인연이 맺어지는 시점이었다.
먼저 고 회우의 귀촌에 사랑이 작용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보지 않아도 알 만 할 것이다.
여기서 귀향‧귀촌에 대한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풀어봐야겠다.
전원에서의 행복한 인생 2막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 ‘즉흥적으로’ 또는 ‘막연하게’ 귀농·귀촌을 결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귀농 귀촌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다.
귀농·귀촌의 첫 단추는 땅 구하기다. 또 직접 매입을 하든, 임차를 하든지 간에 입지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 ‘개별 땅보다는 지역의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는 충고도 따른다.
그렇다면 고 회우는 어떻게 이 대지 3천평의 폐교시설을 인수했을까. 돈은 몇 억이나 투자를 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당초엔 여주나 단양 쪽에 좋은 곳을 구해 지인들과 함께 사랑방을 꾸며볼까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곳 영월의 정보를 입수하게 됐다.
영월에 폐교를 이용한 박물관이 있는데 현재 문을 닫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박물관은 군청이 지원을 하는 것으로 운영 아이디어가 우수하고 성실히 경영을 할 수 있다는 인정만 받으면 기간에 관계없이 무상으로 임대받게 되는 것이었다.
고 회우는 연구 끝에 장문의 경영논문을 영월군에 제출했다. 결국 심사단의 숙고 끝에 이 박물관은 고 회우에게 인수됐다.
형식상으로는 고 회우에게 고대하던 단감이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그 운영은 참으로 고행의 길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여기에 사랑이 있다는 것이, 희망과 열정이 있다는 것이 그의 힘을 북돋고 있다.
고 회우의 귀촌은 농사를 짓기보다 바쁘게 달려왔던 시간들을 되돌림 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기자생활의 공통점은 누구나 마감시간에 쫓겨가며 ‘빨리 빨리’를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특히 사진기자들은 민첩과 발품이 특종을 낚는 기회와 정비례 한다는 선배들의 말을 하늘같이 믿고 현장에서 쉼 없이 달렸었다.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을 갖자고 귀촌을 설계해본 것이었다.
처음에 부부는 텃밭을 이용한 밭농사를 지었다. 건강한 땅에 건강한 먹거리가 나오고 건강한 먹거리를 식단에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느낀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다.
마을 사람들과 소통의 장
귀촌을 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영월군농업기술센터에서 내 붙인 ‘영월희망농업대학’ 학생모집 현수막을 보고 입학을 결정 한 것이다. 영월로 내려온 지 한 달 만에 국비장학생으로 8개월간을 농촌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생각하지도 않은 학생장을 맡게 돼 함께 농촌대학생활을 하면서 44명의 학우이자 지금의 동료들(최고령 74세, 최연소 29세)을 얻는 대박이 터진 것이다. 지금 활동의 가장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소중한 동기들이다.
고 회우는 지금 다음카페 ‘뱃말이야기’를 운영하면서 마을사람들과 소통의 장을 만들었다.
이 ‘뱃말이야기’는 친근감이 가는 마을의 이야기로 눈길을 끌면서 재능봉사의 개념으로 알려져 KBS, SBS, MBC 방송국에서 현장취재를 했다. 방송은 일약 박물관이 널리 알려지는데 큰 도움을 줬다.
삶은 누구에게나 유한하다. 그 유한한 삶이 끝나는 날까지 가치 있는 삶을 지속하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청년 같은 눈빛으로 다음 목표를 바라보고 가슴 설렐 줄 아는 고명진의 삶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의 꿈은 쉽게 흉내 낼 수 없어도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만은 인생 2막을 준비하는 모든 이에게 자극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꿈을 삶의 목표로 들여놓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며 크고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삶은 유한해도 나이 먹는 것이 더는 두렵지 않은 인생 2막을 연출할 수 있다. 꿈이 거창하거나 특별할 필요는 없다. 어떤 꿈이든 내 가슴을 행복하게 하고 계획을 세워 실천할 수 있으면 꿈과 동행하는 행복한 삶이 가능해진다. 쓸쓸한 노년이 아닌 활력 넘치는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명진의 이런 활력넘치는 꿈에 동참하고 싶지 않을까.
나이 들수록 더 반짝이는 삶, 인생의 내리막길을 오르막길로 돌려놓을 수 있는 비결을 엿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고명진 회우의 삶을 따라가 보면 서로 방향이 남다를 뿐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고뇌와 고독, 성취감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