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전, 일제의 식민폭정과 탄압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 “일본은 망하고 한국은 해방 독립된다!”고 학우들과 주민들을 선도 계몽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 趙誠國(91) 원로회우를 만나 당시의 감회를 들어봤다.
― 趙 원로회우께서는 함남 함흥시 함남중학 재학시절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셨고 그 공훈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습니다. 광복 70주년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요?
“나는 훈장을 신청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부에서 자료를 발굴하고 친구들의 증언을 받아 1982년 대통령 표창장을 주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줬어요. 1944년 5월 함흥고보(뒤에 함남중) 다닐 때 학생서클을 조직하고 단파 三球 수신기를 만들어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몰래 청취했지. 그때 조국이 광복된다는 확신을 가졌어. 방송내용을 비밀스럽게 계속 전해주다가 그해 6월 12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했어. 배후를 대라는 게야. 단독 행위임을 강변했지. 육해군형법, 보안법, 무선전신법 위반으로 기소하고 10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1년6월 장기 3년형을 선고했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12월 인천형무소로 이감된 뒤 1945년 8월 광복 이틀 뒤에 석방되었지요.”
― 왜경에게 엄청난 고문을 당하셨다면 그 후유증은?
“그걸 어찌 말로 다 하나. 살아서는 나가지 못할 거라고 단념했지요.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문과 매질이 날마다 이어지고… 그 때는 죽은 목숨과 같아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했어. 사형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으니까. 그나마 다행한 일은 상급학교 진학을 하고 싶으니 죄명을 좀 낮춰 달라고 애원했는데, 일부를 들어준 일이야.”
― 단파 三球 수신기는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특별한 기술은 없었지. 뭔가 새 소식을 듣고 싶다는 욕망에서 <학생과학> 잡지와 <무선과 실험>이라는 책에서 무선전파 관련 기사를 탐독하고 메가헤르츠를 맞추어 가면서 VOA 방송을 열심히 듣고 그 내용을 전해주었지요.”
― 독립운동 사실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 특별한 사연이라도?
“감옥살이를 했으면 잡범 전과자라는 인식을 갖는 게 일반적인 관념이지. 그 때는 독립운동이 별로 자랑스러운 일도 아닌 것 같았고… 아이들이 아버지가 감옥살이를 한 전과자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어떤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겁니다.”
― 건국훈장을 수상한 것은 개인의 영광이자 가문의 명예 아닙니까?
“수상자 22명이 결정된 뒤 KBS에서 윤치영, 송지영과 내 사진을 띄우면서 방송하고 신문에서 보도했어요. 그때까지 아내는 물론 고3인 큰애도 몰랐지. 가족과 친인척들이 모두 놀랐어요. 그런 큰일을 하고도 숨겼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어.”
― 함남 북청 출신인데 언제 월남하셨습니까?
“광복과 함께 석방된 뒤 고향으로 가서 열 달쯤 지내다가 1946년 6월 단신 월남, 고향에서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으로 서울에서 생활하는데 금세 돈이 떨어지는 게야. 배가 너무 고파 고향으로 가고 싶었지만 공산치하로 들어가기가 싫더군.”
― 조 원로회우는 본회 회우 가운데 유일하게 애국훈장을 수상하셨습니다. 코리아 헤럴드 기자를 거쳐 편집위원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나셨는데 추억에 남는 일화는?
“1960년부터 72년까지 취재기자로 혁명정부 국가재건최고위원회와 국회 등을 취재했던 일이 새삼스러워요.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뛰었지. 언론계를 떠난 뒤 율산건설 상임고문으로 10여년 근무한 일, 독립기념관에서 독립운동사의 일환으로 대화, 녹음, 사진을 덧붙여 단파 三球 수신기 제작과정을 재현해 20권으로 만든 일은 가슴 뿌듯한 일이야.”
― 후배 언론인들에게 덕담 한 말씀을?
“요즘 언론환경이 어렵고 안 좋은데도 열심이라 대견하지만 안쓰러워요. 그래도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매진해야지. 욕먹지 않는 기자, 정도를 걸어가는 언론인이 돼야 해요.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고 국민이 바라는 뉴스를 제 때 제대로 정확한 필치로 전해줘야 해요.”
― 6·25 전쟁 이산가족으로서 통일에 대한 관점은?
“아버님은 흥남철수 때 선박 편으로, 동생은 육로로 따로 따로 월남해 서울에서 만났고, 고향엔 어머니와 막내 동생이 남았어요. 어머니에게 한동안 편지와 사진을 보내 드렸어요. 살아있다는 증표로 말이야(잠시 老顔에 思母의 빛이 서린다). 이젠 이산가족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어요. 죽마고우로 서울에 있는 사람은 소학교 동창 김명윤 前 청와대 경제수석 한 사람과, 중학교 동창 김명수 전 숭실대 공대학장, 심봉섭 전 가톨릭 대학장, 이수호 전 서울대 사대교수 세 사람뿐이야, 그 외 모두 타계했지요. 남북통일은 민족의 염원이고 대한민국이 미래 선진부국으로 달려가는 길이라 꼭 이뤄져야 하는데, 남과 북 사이에 추진방법이 너무 다른 것 같아 안타까워요. 남과 북의 정치 이념과 민도(民度)의 차이가 너무 커요, 이를 좁혀야 하는데, 퍼 준다고 되는 것은 아닌데….”
조 원로회우는 망백(望百)의 고령임에도 대한언론인회 원로회우, 光復會 회원,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이사 등으로 폭넓게 활동한다. 가끔 성당에 나가 마음 비우고 사회와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주량은 제로, 왕년에는 100m를 11초 5로 달렸는데, 지금은 매주 월~금 5일간 하루 4km씩 꼬박꼬박 걷는다고 일상(日常)을 전한다. 이대 출신 수원 사람(부인 홍소희 여사)과 결혼하고 2남 1녀 낳았다. 아들딸은 가정을 이루어 분가했고, 평생의 반려자로 해로하는 아내가 고맙기 한량없단다. “평생 언론창달에 헌신한 대한언론인회 회우 여러분 건강하세요!”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