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만 선배 영전에
1938년 10월 4일 충북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그곳 삼성초등학교와 음성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로 상경, 중앙대 정외과 재직중 군복무를 했다.
1963년 대학 졸업과 동시 시사통신 정치부기자로 첫 언론계에 입문했다. 그 후 1968년 한국경제신문(전 현대경제일보)에서 정경부 기자, 정치부 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새로운 삶과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경제지에서의 정치부기자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취재에 많은 제약과 인내가 수반되어야 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심지어 동료기자도 한 종합지 기자까지도 배타적인 시절이었기에 적지 않은 심적 고통과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권 선배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친화력과 탁월한 인내로 이를 극복했고 결국 많은 동료들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또다른 시련을 맞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5공화국 시절 많은 언론인들이 해직되면서 그 일원이 되어 2년여 세월을 고통과 박해를 받아야 했던 휴직기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 고인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을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직하리만치 자기주장이 뚜렷했던 권혁만 선배!
한 번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르는 타고난 언변, 그 누구도 따라잡기 어려운 권혁만표 화법이었기에 우리는 그러한 고인이 더욱 생각납니다.
특히 기억되는 것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술자리에선 본인이 직접 젓가락 장단을 맞춰 부르는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는 원조가수 배호씨보다 더 잘 부른다는 주윗사람들의 평이 날만큼 지금도 우리 귓전을 울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한 보따리씩 약을 지니고 다녀 능히 100세 넘게 사시리라 생각했던 우리였기에 앞서 떠난 형을 더욱 슬프게 합니다.
하늘은 우리 모두가 가야 할 제2고향이기도 합니다. 부디 모든 미망의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영생하시기를 우리 모두 기원합니다.
<조규만 본회 자격심사위원>
김담구 형 영전에
김담구형
그렇게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시다가 이렇게 홀연히 떠나시다니!
슬픕니다.
김형은 경상도 김천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대구의 명문고등학교와 서울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저와 함께 동아일보에 입사했었지요.
그 후 지금까지 김형과는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냈지요.
언제나 구수한 향토 억양으로 다정하게 얘기하던 그 모습이 어제였는데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시다니 믿어지질 않습니다.
김형은 동아일보의 요직을 거의 다 거치면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글’로 신문의 성가를 올리는데 크게 이바지 하셨지요.
김형은 특히 한문에 조예가 깊어 ‘4자성어’를 현대식으로 해석하여 신문에 계속 연재 하셨고 퇴직후에는 동아일보 사우회 회보에 ‘온고지신’등의 칼럼을 통해 많은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었지요.
김형은 생활에서의 경우 양보를 미덕으로 살았지만 문장에서는 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셨지요.
가끔 제가 쓴 글을 읽다가도 문장이 좀 이상하면 곧 바로 전화를 걸어와 고쳐주곤 하셨지요.
김형!
김형의 노후는 병마와의 싸움 그 자체였습니다.
일찍이 사랑하는 부인과 사별한 뒤 암을 비롯해 노인을 괴롭히는 각종 병마와 길고 긴 싸움을 벌여 왔었지요.
암도 하나가 완치됐다 싶으면 다른 암이 생기고 디스크를 비롯해 노인들을 괴롭히는 각종 병이 ‘설상가상’형태로 김형을 괴롭혔지요.
지팡이를 짚고 조금 걷다가 쉬고 또 걸으면서 아픈 허리를 손으로 치던 김형의 모습이 정말로 안타까웠습니다.
김형의 노후는 그놈의 병마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이 조사를 읽으면서 피부로 느낍니다.
이제 편안히 쉬소서!
평생을 평상심으로 악한 짓 안하고 도움을 준 삶을 산 김형은 분명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날겁니다.
편안히 쉬소서!
오호 애재라!
<이병대 대한언론인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