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하 (전 동아일보 기자, 강원일보 사장) 회우가 1월 16일 밤 별세했다. 향년 87세. 평소 건강하고 온화한 성품에 낙천적으로 지내온 김 회우의 별세는 많은 회우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6. 25 참전 후 제대하고 고대 정치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4.19 혁명 직후 청와대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서 동양통신 기획조사부장으로 잠시 머물다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대농화학 대표이사, 동부고속 대표이사, 동부 대표이사, 동협 대표이사를 역임하고, 강원일보 사장으로 봉직하고 퇴직했다.
<신년 덕담 아직도 생생한데 -김광희(전 동아일보 이사·제작국장)>
지난 1월 5일, 새해를 맞아 가진 점심 자리에서 나눈 덕담이 아직도 생생한데 뜻밖에도 幽明을 달리하게 된 감회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입니다.
더구나 18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열린 대한언론인회의 추도식에 참여한 대부분의 문상객들이 他界 하루 아니면 2~3일 전에 식사를 같이했다는 얘기라서 모두들 인생무상을 곱씹으며 새삼 김 선배의 폭넓은 交遊를 되새기곤 했습니다.
제가 김 선배의 高名을 들은 것은 1960년 3월쯤 자유당 정부의 3·15 정부통령 선거 선거방법지령전모(부정 선거)를 동아일보에 특종보도, 4·19 혁명과 민주화를 가져오게 한 계기를 마련했을 때로 기억하며, 그때 저는 서울신문 견습기자였습니다.
제가 김 선배를 직접 뵙게 된 것은 청와대 대변인 때로 기억하며, 당시 저는 동아일보 체육부에 있었는데 누가 걸걸한 목소리로 처음 보는 친구구만 하면서 먼저 인사를 청하는 바람에 안절부절 못했던 걸 기억합니다. 특히 제가 高大출신이라고 답하자 갑자기 얼굴색이 달라질 정도로 반가워하셨습니다. 김 선배의 高大와 東亞日報에 대한 애착은 정평이 나 있지요.
2015년 12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東友會(동아일보 사우회) 총회 때는 약 4백여 명의 현역과 퇴직사우들이 모였는데, 이때 김 선배는 격려사를 통해 동아의 전통과 권위를 회고하다가 돌연 “조·중·동이 뭔가?”라고 질타하시면서 장내를 숙연하게 한 일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못을 보고는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 그것은 대인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김 선배는 또 54년 獨島기행문을 단독 보도하면서 燈 臺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 실현시킨 사례를 늘 자랑하셨습니다. 동아일보에 입사해서 9개월, 수습기자 6개월을 빼면 겨우 3개월짜리 기자가 국회조사단과 함께 독도를 방문, 일장기를 검은 페인트로 지우고 태극기로 바꾸면서 등대의 필요성을 강조, 李承晩 대통령의 재가(裁可)로 뜻을 이루었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존경하는 金準河 선배님, 짧았지만 신문기자가 지녀야 할 덕목과 노력의 흔적을 저희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가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 이순기 (전 서울신문 편집부국장) 원로회우 가 작년 8월 숨진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86세. 이 같은 사실은 우경식 원로회우가 지난 1 월 초 故 이 회우의 면목동 집을 인사차 방문했을 때 가족들이 “이 회우께서 작년 8월 13일(토) 숨져 8월 15일 가족장으로 이천 호국원에 안장했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이 회우는 작년 봄 넘어져 고관절 골절로 요양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 왔다. 이 회우는 1930년 생으로 연세대 경제학과, 서울대 신문대학원을 거쳐, 미국 콜럼비아 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54년 창간한 한국일보에 이듬해 수습 1기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60년에 조선일보 편집부 차장, 68년 중앙일보 편집부장, 69년 대한일보로 옮겨 편집부장, 뉴욕특파원 편집부 국장, 외신부장을 지냈다. 이후 서울신문 편집부국장 겸 외신부장, 기획위원을 지내고 언론계를 76년에 떠났다. 이후 해외개발공사로 전직, 개발과장, 조사 연구실장, 이란 지사장, 호주지사장을 지냈다.
<이 무슨 청천벽력 비보인가 - 박기병(6·25참전언론인회 회장)>
이순기 선생! 뒤늦게 선생의 부음을 접하니 무어라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작년 여름까지만해도 요양병원에서 투병중이셨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입니까. 선생과 저는 6·25참전언론인회 회원으로 대한언론인회에서 가끔 만나곤 했지만, 이렇게 홀연히 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선생은 6·25 참전 동지이기도 하지 만 대한언론인회와는 그 누구보다도 각별한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대한언론인회 부회장으로 ‘대한언론’ 제작에도 심혈을 경주하셨고 한때 회장이 되시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일은 대한 언론인회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신 징표였습니다.
사실 선생의 신문 편집 실력은 한국일보 견습 1기로 언론계와 인연을 맺고 서울신문과 중앙일보를 거치면서 더욱 각광을 받으셨고, 한국신문편집기자회 초대회장으로 많은 편집기자들의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이토록 신문 편집의 대가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던 선생이 작년 8월 외롭게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6개월이 지나서야 접한 우리들은 망연자실 유가족 여러분 께 무슨 말로 위로의 말씀을 올릴지 할 말을 잊습니다.
늦게나마 6·25참전언론인회를 대표해 삼가 명복을 빌며 아무쪼록 모든 번뇌도 아픔도 없는 저승에서 부디 영생극락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두 손 모아 삼가 고인에 명복을 빕니다. 영면하소서!
■ 문명호(전 문화일보 주필) 회우가 지난 1월 3일 오후 폐렴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문 회우는 1940년 1월 생으로 만 77세 생일을 25일 앞두고 유명을 달리했다.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재학 중 군 복무를 마치고, 졸업 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출발, 경제부 외신부 기자를 거쳐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했다. 외신부장과 논설위원을 지낸 후 문화일보 논설위원실장으로 주필까지 지냈다. 고려대 신방과 교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공정언론심의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 했다.
<어찌 이리 급하게 떠나셨나 -이병대(대한언론인회 회장)>
문명호 형! 어찌 이리도 급하게 떠나셨습니까. 송년회에서 만나 새해들어 곧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것이 20여일 전인데 홀연히 떠나시니 생과 사가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은 말(生死不二) 이라는 의미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문 형과 저는 지난 65년 동아일보사 수습 7기 동기생으로 언론계에 함께 출발한 뒤 지금까지 어깨동무하여 살아왔습니다. 수습기자 시절 우리가 어릴적 노래 불렀던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라는 동요의 가사를 문형이 초등학교시절 작사했다는 얘기 를 듣고 놀란 적이 있었죠.
돕고 도우면서 그러나 때로는 생각을 달리할 때도 있었지만 배려의 마음은 서로가 지우지 않았습니다.
문명호 형! 문형은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비롯하여 논설위원 등 핵심자리를 거쳐 문화일보에서도 논설주간을 맡는 등 우리나라 언론문화 창달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퇴직 후에는 대한언론인회에서 주필직을 맡아 대한언론회보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다 하셨습니다.
문명호 형. 문 형은 평소 부인과의 정이 남달랐습니다. 작년 부인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서울대학병원 이 자리에서 문형을 뵀을때 너무 얼굴이 상하여 몸을 돌봐가면서 장례를 치르라고 얘기했었는데, 그 뒤에 들으니 몸이 많이 약해져서 계속 병원에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새해 들어 이렇게 홀연히 떠나버리시다니! 인간사의 허무함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문 형! 그간 이승에서 마음 아팠던 모든 일들을 훌훌 던져버리시고 평안히 잠드소서. 두 손 모아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호 애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