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선배님! 이렇게 홀연히 떠나시니 인생의 무상함을 가슴 시리게 느낍니다. 몇 년 전 사랑하는 큰 사위를 먼저 떠나보내고 너무 슬퍼하시면서 밤잠을 설치시다가 갑자기 찾아온 ‘파킨슨’이라는 고약한 병마와 지난 2년간 동거 를 하시면서 초기 증상 때부터 외부와의 접촉을 끊다시피 하셨습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으신 깔끔한 성격 때문이셨습니다. 선배님은 출입시 반드시 넥타이를 매셨고 국장 시절에도 수습기자에게 함 부로 얘기하지 않으셨으며 오늘날 사회에서 정말로 보기 힘든 말과 행동이 일치(言行一致)하는 모범어른이셨습니다. 지난 65년 수습기자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때 사회부 차장으로 처음 뵌 후 국장 때까지 모셨고 그리고 언론계를 떠나 예술의 전당과 금호그룹에서 사장을 거치신 뒤 마지막 일민문화재단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60여년을 가 까이 지내면서 제가 정말로 닮고 싶었던 스승님이 윤 선배님이셨습니다. 수습기자 시절 허술하게 취재한 부문을 귀신같이 집어내어 넋을 잃은 적 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데스크에 앉으면 태산 같은 존재이셨습니다. 선배님 과는 동지회(동아일보 지방부 모임)를 비롯 그동안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습 니다. 선배님께서는 동아일보 첫 부장자리가 지방부이셨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20여명의 부원들이 30년 가까이 일 년에 두 번씩 만나왔습니다. 저와는 20여년 전부터 거르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가진 점심식사에는 언제 나 약속시간 10여분 전에 미리 와 계셨습니다. 몇 년 전 점심을 드시면서 ‘오늘 일민재단 이사장 사표를 내러 가야겠다’고 하시길래 ‘아직 일할 수 있는데 왜 그만 두시려 하시는가’고 말렸더니 ‘그간 몇 번 구두로 사의를 드렸으나 반려해 주저했는데 더 이상은 재단에 폐를 끼 치는 일’이라시면서 사표를 낸 뒤 출입을 삼가셨습니다. 그때쯤 당시 한미 FDA로 한국에서 외국 로펌이 영업할 수 있게 되어 미국 명문 로펌 변호사인 외아드님이 소속되어 있던 로펌이 한국지회를 개소하면 서 책임자가 되어 일 년의 반을 한국에서 근무하게 됐다고 매우 기뻐하셨습 니다. 그 말을 하시면서 아드님이 한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선배님이 동 아일보 주일지사장으로 근무할 때 도쿄에서 고등학교 그리고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뒤 계속해서 미국 로펌 변호사 생활을 해오고 있는데 신청만하면 가 질 수 있는 미국시민권을 얻지 않고 아직도 한국 여권을 갖고 있는 것을 자 랑스럽게 얘기 하셨습니다. 윤 선배님께서 가족 자랑 하시는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재작년 가을 아드님과 함께 일산 자택 옆의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뵌 후 다 시 올 수 없는 먼 길을 이렇게 홀연히 떠나시니 망연할 따름입니다.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습니다. 편히 영면하소서. 머리 숙여 다시 한 번 삼가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