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파이팅<7> 李志雄 ․ 전동양통신 편집국장 ․성곡언론문화재단이사 ․ 서울광학산업(주)대표
인터뷰/최희조(본보 편집위원․중부대 초빙교수)
이지웅(李志雄)회우.1922년생인 그는 올해 미수(米壽․88세)를 맞는다.23살에 기자가 돼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50대 초반에 그만두기까지 30여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다.그뒤 사업가로 변신,지금까지 30여년 이상을 중견 제조업체 대표로서 활발한 사업활동을 벌이고 있다.
단신 월남 길에 나서는 막내 아들을 떠나 보내면서 들려주던 어머니의 3 계(戒) 당부,기자가 된 사연,목숨을 건 6․ 25전쟁 종군 취재, 제주 4․ 3과 여순 반란사건 취재, 사업가로의 새 출발과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늚음’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원기왕성한 현역 CEO생활 등등. 그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1월16일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서울광학산업주식회사 공장으로 내려가 이 회우를 만났다.산자락 3만여평의 부지에 자리잡은 이 회사에선 40여명의 정예 사원들이 건평 2,500평 되는 공장 3개동에서 각종 첨단 정밀 광학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공장 입구에 들어서니 ‘창립35주년 2009년1월 8일’이라 쓴 현수막이 첫 눈에 들어왔다.공장 사무실로 통하는 길목 한 켠엔 노리다 도시오(車田利夫)라고 명패를 새겨넣은 일본인 이름의 흉상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사장실은 너댓평 크기로 책상이랑 집기들이 공장 들어설 때 갖춰 놓은 그대로인 듯 하고 카페트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그러나 공장 설립자로서 회장 아닌 사장 직함을 고수하고 있는 이 회우의 연세는 첫 인상에 20여년 이상 낮춰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장시간 인터뷰 도중 간부 사원의 잇단 업무보고를 받는 모습에서도 연세는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그 연세에 어떻게 사장 일을…”하고, 반신반의 했던 현장 방문 전까지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실감했다. 어쩌면 이 회우야 말로 국내외 통틀어 제일의 노익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에 서울 집에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돌아오면 내내 공장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게 전부예요.머리만 깎으면 (절간의) 승려나 다름 없어요”
첫 질문은 자연히 건강과 젊어 보이는 비결이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큰 병을 앓았거나 병원 신세를 진적이 없어요.이곳에 내려와 한 20년 지내다보니 특히 공기가 좋아 눈이 맑아졌어요.혈압이라든가 당(糖) 수치도 정상이어서 약을 먹지 않아요.담배는 좀 피다가 일찌기 30대 초반에 끊었구요. ”
-약주는 어느 정도 하시는지요.
“젊어선 둘이 마시면 양주 두 병이 모자랄 정도 였어요.요즘은 소주 한 병 정도가 좋은데 좀 모자라는 것 같아요.일주일에 두 세 번 마셔요.공장 나이만큼 35년된 사원도 있구 하니까 사원들하고 어울려 한잔 하게 돼요.소주를 병째로 꼭 중탕해서 마셔요.그렇게 마시면 다음날 뒤끝이 아주 개운해요”
-운동은 안 하시나요.
“젊어서는 승마도 하고 5년 전까지 테니스와 골프를 많이 쳤어요.테니스는 심장에 무리를 준다고 해서 안하고 골프 연습장에 가끔 나가요”
-어떻게 기자가 되셨나요.
“평북 정주(定州)에서 태어나 오산(五山)학교를 나왔어요.고향에서 소학교 선생을 1년 하다가 1945년 해방 되던 해 혼자 월남해 서울에 왔어요.아는 사람은 물론 아무런 기반도 없었죠.그런데 수중의 돈이 거의 바닥날 무렵 어느 날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고향 친구를 만났어요. 오산학교 다닐 때 평북 도청에서 발행하는 학생신문에 제가 쓴 글이 게재되곤 해서 작문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그랬던지 그 친구가 대뜸 광화문 동아일보사 2층에 있던 중앙통신 기자 입사를 권유해 그해 9월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 중앙청 앞 길거리에 화재예방 표어가 나붙어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기사를 취재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첫 기사를 취재 작성했던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단신 월남 하셨나요.
“네. 그래요.당시 부친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형 둘,누님 한 분과 조카들이 고향에 살고 있었어요.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대문까지 쫒아 나오셔서 세 가지를 당부하시는 거예요.‘어디 가든 사람 죽이는 일을 하지 마라’ ‘개고기를 먹지 마라’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예요.‘사람 죽이는 일’은 일제의 경찰을 염두에 두신 것 같고 개고기는 불교 신자셔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월남 이후 이 세 가지 어머니 말씀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살었어요“
그는 서울 와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의 3 계(戒) 말씀 중 사람 죽이는 직업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 떠올라 이틀 만에 자퇴했다.중앙통신에서 한 1년 일하다 대한일보(발행인 이종형)로,다시 평화신문(사장 홍찬), 연합신문(양우정)을 거쳐 동양통신(김성곤)으로 옮겨 편집국장,편집인으로 일하다 1976년 퇴직했다.동양통신 24년 8개월을 포함 32년간을 언론인으로 보냈다.현소환, 최시중씨가 동양통신때 함께 일한 분들이라고 한다.
6․ 25전쟁 중에는 1953년7월27일 휴전때까지 3년간 종군기자를 했고 국방부를 오래 출입했다.전선을 누비며 취재했던 일과 제주 4․3과 여순반란사건 취재할 때 현장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모두 목숨을 건 취재였다.여순 사건 땐 여수서 순천까지 밤새워 뛰어가 우체국에 가서 숙직자를 깨워 밤 12시 서울로 기사를 송고 하기도 했다.종군취재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김진섭,문제안,임학수,이혜복 회우 등이 종군기자 동료다.
-언론인에서 사업가가 되신 경위를 들려주시죠.
“기자를 하다가 사업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그것도 광학제품 같은 기술집약산업에 뛰어들 것이라곤 전혀 예상도 못했죠.그런데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일본 외무성 초청으로 동경대학 대학원 사회학B코스(신문학) 유학을 할 때 사귄 분이 있어요.일본광학의 창업자 ‘노리다’씨로,그로부터 기술이전등 모든 지원을 해줄터이니 공장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그 분야를 몰라 처음엔 사양을 했어요.그러나 안양에서 시작한게 1974년이고 음성으로 공장을 옮긴게 1987년이예요.그게 어느듯 창업 35년,충북에 와서 22년이 됐어요”
-사무실 입구의 흉상이 바로 그 분이군요.
“그래요.그분은 얼마전 작고했는데 저와 동갑이예요.원래 평북 영변 태생의 한국인으로 14살 때 일본에 건너가귀화했어요.안양공장에 일본 부장급 기술자 5명을 돈 한푼 받지 않고 상주시키며 기술지도를 해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어요.오늘날 서울광학의 절반은 그분이 이뤄 준거나 다름 없어요”그의 공장에선 웬만한 렌즈는 다 설계 가공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우표 만드는데 쓰이는 직경 4m짜리 노광장비 렌즈도 만든다. 연간 매출은 50억원 정도.수출비중이 높다.누구보다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현장에서 몸소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장학금을 주어가며 인재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후계자를 물색해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아요.저희 회사엔 현재 빚이 한푼도 없어요.누구든 와서 경영하는데 어렵지 않도록 운영자금도 충분히 마련해서 넘겨 주려고 해요”
재작년에 결혼 60주년,회혼례를 치뤘으며 부인과 슬하에 2남2녀와 8명의 손주들을 거느린 다복한 가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