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파이팅<8>
회우초대석 池甲鍾 ․연합신문정치부차장
․11,12대 국회의원
․유엔한국참전국협회회장(현)
인터뷰/ 崔熙助(본보편집위원․중부대초빙교수)
60년전 한국전쟁(1950~53)에 참전했던 이(異)민족 용사들과 전생에 어떤 연(緣)이 있었을까.
그는 반백년을 한국전쟁 참전 16개국 용사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으며 지금도 그들 속에 살아가고 있다.
사단법인 유엔한국참전국협회(UNKWAA)회장 池甲鍾회우.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매일 사무실에 나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오전 9시 출근해 오후 5시 퇴근한다.
유엔한국참전국협회의 뿌리는 연합신문 정치부차장이던 池회우가 16개국 순회취재에 나서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8년 10월24일 김포공항을 떠나 해외취재에 오르던 날 연합신문은
‘池甲鍾특파원 오늘(24일) 向發,유엔參戰16개국 歷訪’이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社告를 실었다.
“본사에서는 정부수립 제1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6․25동란 당시 공산침략군을 격퇴하여 우리나라의
위기를 구원하고저 직접 전투부대를 파병해준 유엔16개국에 특파원을 보내 한국국민이 영원히 잊지 못하는
감사의 뜻을 직접 그 나라 국민에게 전달하고 상호우호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데 이바지하기로 했습니다.(이하 생략)”
―16개국 순방취재의 목적은 사고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만,그 일을 맡게 된 연유가 따로 있습니까.
“사실 참전국 순방취재계획은 제가 세운 겁니다.참전 용사들은 귀국해서 무얼 하고 있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전 휴전 5년 뒤인 1958년 취재에 나서기로 마음먹고 그 1년 전부터 관련 서적과 자료를 구해
공부를 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신문사에선 내가 해외 취재를 하겠다니까 당시 金成坤(1913~1975)사장이
‘단스 홀’에 가려고 하지,하면서 돈 대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미국 유학도 못갔으니 16개국 순방이나 하겠다며
집에 얘기하고 물려받은 과수원 9천5백평을 팔아 1천5백만원을 마련해 취재비용으로 썼습니다.그 과수원이
지금은 光州시내의 주택가로 변했습니다”
―‘댄스 홀’ 얘기는 무엇입니까.
“아, 그때는 댄스홀 드나드는 게 유행이었어요.내가 춤을 잘 추었구요”
공교롭게도 유엔 데이에 한국을 떠났다. 1백46일만인 다음해 59년 3월18일 귀국하기까지 5개월동안 16개국을 포함,
우방 30개 나라를 현지 취재했다. 모두 1백58회분의 르포 상자기사를 보도하고 16mm 30분짜리 다큐도 만들었다.
이번 인터뷰에서 밝힌 50여년전 당시 해외 현지취재에 얽힌 얘기만 해도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을 만하다.
순회 취재때 만난 해외의 참전 용사들로부터 한국에 연락사무소를 만들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1958년 참전국협회 조직에 착수했던 그는 이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62년 서울에 유엔참전국연락본부를 설치했다.
휴전10주년 기념일인 1963년7월27엔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순직 종군기자 추도식을 갖고 77년 문산에 종군기자기념비를
제막했다.각국에서 자료를 수집,순직 종군기자 18명의 프로필을 담은 리스트를 직접 작성했다.
AP통신기자등 미국 10명,영국의 더 타임즈 기자등 4명,프랑스의 AFP기자 2명,필리핀과 한국기자 각 1명이다.
―요즘 사무실에 나가시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오는 4월 영연방(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참전 용사들이 내한하는 연례행사가 있습니다.
미국에선 5월과 6,9,10,11월에 매달 40~50명씩 80~90세 전후의 참전 노병들이 찾아옵니다.
내년은 6․25 60주년 되는 해여서 이런저런 준비로 바쁘게 살아갑니다.남아프리카공화국에 4차례등
16개국 어느 나라도 안 가본 나라가 없지만 미국엔 50여 차례 이상 다녀왔습니다.올해도 다녀오려고 합니다.
작년엔 서울용산 미8군 안에 월튼 H.워커(1889~1950) 유엔군사령관겸 미8군사령관(1950.7.8~12.23)동상 기공식을 했고
내년 9월16일 제막식을 가질 예정입니다”
참전국협회회장으로서 池회우의 지난 50여년은 무엇보다도 이들 나라의 참전 용사들과 돈독한 유대를 갖고
한국과 이들 나라 사이의 가교역할을 해 온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해외참전용사들의 재방한 행사는 1975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35년째 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주둔하다 선발대로 한국에 급파돼 북한군과 오산등지에서 격전을 치룬
스미스부대(미 24사단 21연대 1대대)가 유명하지요.그 부대장이었던 찰스 B. 스미스중령(1916~2004)을
준장 퇴역후 아리조나에서 모토롤라 이사로 있을 때인 1970년 현지로 날아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75년에 그를 초청해 부인과 딸을 데리고 방한한 그에게 朴正熙대통령이 태극무공훈장을 주었습니다”
영연방 용사들은 지난76년부터 매년 방한해 가평과 설마리전투 지역 중고등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간다.
6․25전쟁 3년간 16개국의 한국참전용사는 연인원 미군 1백80만명을 포함, 2백만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미국내 생존자는 40만~5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DC의 한국전 참전용사기념비를 비롯,수많은 국내외 기념물 건립에 앞장섰다.
6․25관련 각종 무기와 사진 문서등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기여했다.김일성승용차를 비롯,
B-29폭격기,T-34전차등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역사적 유물들을 때로는 사비를 들여가며 어렵게 수집,
현재 사천 박물관과 사무실등에 나눠 소장하고 있다.수집에 얽힌 뒷얘기 거리만 해도 너무나 많아
일일이 예거하기 어려울 정도.
지난 1999년 방한한 영국의 엘리저베스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OBE훈장을 직접 받는 등 16나라로부터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많은 훈장을 받았다.
다음은 文明浩 대한언론인회부회장의 증언.
“워싱턴특파원으로 있을 때 池회우가 그곳에 자주 왔어요. 1980년대 그에게는 한국이 미국의 GSP(일반특혜관세제도)
수혜대상에서 졸업하는 걸 지연시킨 공로가 있습니다. 평소 미 의회내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 의원들과 쌓은 친분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池회우의 회고.
“미국 땅 덩어리가 넓어 참전용사들을 찾아 다니기가 쉽지 않았어요. 미 국회의원 500명의 이력서를 일일이 뒤졌습니다.
그래서 참전용사 출신 의원들이 한때 상하원 합쳐 16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습니다.상원 1명,하원 15명이었습니다.
우주인이기도 한 존 글렌,영화배우 엘리저베스 테일러의 전 남편 존 워너등 입니다”
―1980년대 초 국군 이산가족 찾아주기 운동을 한적이 있는데 그것도 池회우의 아이디어였다지요.
“한국전 휴전 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83년 서울여의도 안보전시관에서 전개했습니다.이를 계기로
그뒤 KBS가 남북이산가족 찾아주기 운동을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벌여 국민에게 큰 반향을 불러 왔지요”
그는 軍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6․25전쟁은 공산군의 남침입니다.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정전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국군은 자유와 민주국민의 생명과 국토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제대후)수출전선에서 싸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오늘날 젊은이들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군에서 피흘려 나라를 지키고 산업현장에서
땀흘려 일해 이 나라를 전쟁의 폐허위에서 10대 경제대국을 넘보는 반열에까지 올려 놓지 않았습니까.
우리 군은 6․25 무렵 입대했던 문맹 장병들에게는 훈련소에서 혹은 전방부대 천막 안에서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문맹퇴치에 군이 앞장서는 교육열을 보여주었는데 오늘날 이런 사실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1978년 서울여의도에 종합안보전시장을 세워 1995년까지 운영,국민 안보의식을 높이는데 이바지했다.
―사무실등의 비용은 어떻게 조달합니까.
‘한국항공우주산업(경남 사천 소재)의 항공우주박물관관장으로 있어 거기서 나오는 보수로 충당합니다“
―요즘 국내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론은 사회를 선도하고 교화하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날마다 싸움하는 것만 보도하는데 그래선 안됩니다.
서로 믿고 살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언론이 앞장서야 합니다.”
대기업이 언론에 손을 대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라고 언성을 높였다.아닌 말로
돈 있는 사람이 해야 월급도 제대로 줄게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건겅 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특별히 하는 건 없습니다.술 덜 마시고 잘 먹고 잘 자는 겁니다.아침 7시30분에 일어나고 밤 12시넘어 잡니다.
재작년에 수술을 받았지만 별 탈 없이 지냅니다.담배는 8년전에 끊었습니다”
20년 가까이 그의 승용차를 모는 운전기사의 증언.
“재작년 4월 영연방 참전용사들이 내한해 행사가 열리고 있던 때였어요.때마침 큰 수술을 받아 입원 중이던
회장께서 앰뷸런스를 타고라도 행사장에 가겠다고 하셔서 주위 사람들을 애먹이신 적이 있어요”
관훈클럽의 산실이었던 서울종로구관훈동 84의 2번지는 池회우의 처가였다.클럽창립멤버 10명중 朴權相회우와
鄭仁亮,金寅昊씨 3명이 그곳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1957~2007 관훈클럽50년사’에 따르면 각자 쓰는 방이
넓은 편이어서 10여명이 둘러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여주인 李福增여사는 구한말 대한제국 정부의 탁지부대신을
지낸 高永熙의 며느리.(연합신문 기자였던)池甲鍾이 (합동통신의 林芳鉉등과 2층에) 뒤늦게 들어와서
李여사의 큰딸과 결혼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50년사는 적고 있다. 1958년7월 관훈클럽 제4대 감사를 지냈다.
1960년에 결혼,의사인 부인과의 사이에 2남1녀와 7명의 손자손녀를 두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