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파이팅<10> 金在英 ‧전서울신문부장대우
‧전경북매일편집국장
‧본보산악회명예회장
인터뷰/崔熙助(본보편집위원‧중부대교수)
金在英회우는 올해 팔순이다.땅끝 마을이 있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경향 각지에서 한 평생 신문기자를 하다가 은퇴후 최근 고향에 정착,매화농원을
경영하며 활기찬 노년을 보내고 있다.
연세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신다고 했더니 에피소드 두 가지를 일러준다.
얼마전 병원에서 종합진단을 받는데 의사가 간호사에게 진단을 받는 분이
바뀐 게 아니냐고 묻더란다.진단서에 나와 있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기 때문.
또 한번은 영암 월출산에서 우연히 만난 관광객이 김회우의 나이가 80이란 소리를
듣더니 그렇게 연세가 드신 줄 몰라 봤다면서 함께 기념사진 한 장 찍자고 해서
같이 찍은 적도 있다고 했다.
金회우가 고향으로 내려간 것은 2006년 봄. 만 3년이 됐다.지난 4월 21일 해남군
현산면 매화리 자택을 찾았다. 스스로를 ‘無所不爲의 獨居청년’이라 일컫는 그에게
무엇보다도 귀향 연유가 궁금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달마산(489m) 기슭인데 이곳 임야 중 7정보가 우리 선산입니다.
거기엔 조그만 저수지도 있어 붕어와 메기등 물고기가 많아 친구들과 낚시하기 좋아요.
달마산은 말하자면 우리 집 뒷산인 셈입니다,그리고 저 앞 산이 가공산(335m)인데
그곳에도 3정보 임야를 갖고 있습니다.돌아가신 부친께선 가공산의 駕空을 호로 쓰셨습니다.
해와 달이 우리 집 뒷산과 앞산에서 뜨고 지곤 합니다.밤에는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구요.
공기가 말할 수 없이 청정해요. 선산에는 조부모와 부모님,형님 묘가 있습니다.”
“올챙이 인생을 살아온 내가 무슨 인터뷰 대상이 되겠느냐”며 겸연쩍어 하던 그의 안내로
집 근처 선산을 둘러봤다.편백나무와 삼나무가 간벌을 못한 듯 빽빽히 들어찬 임야의
야트막한 한쪽에 4개의 봉분(조부모는 합장)과 비석이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다.
집 마당에는 2백여㎡ 남짓한 잘 가꾸어 놓은 화단이 눈길을 끌었다.철쭉 여러 그루가
앞다투어 피어있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사이사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화단은 거의 혼자 가꾸는데 여기서 소일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사계절 꽃이
핍니다.여름에 수국과 병꽃,가을 국화,겨울 동백등 꽃이 질 날이 없어요.가을에 감나무에선
감이 주렁주렁,얼마나 많이 열리는지 몰라요.저게 하와이 무궁화꽃예요. 저건 예전에
검정 비녀 만들 때 쓰던 희귀멸종식물인 묵감나무구요.저것들은 목련,작약,모란,유자,
비자나뭅니다.”
처음 정원을 가꿀 때만 하더라도 ‘해거리’인생이었는데 요즘 와선 10년 인생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다년생 야생화를 많이 심으면서 꽃이 피고 질 때마다 다음 해 또
필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그런데 가끔씩 들르는 읍내
꽃집에서 10년마다 꽃이 핀다는 행운목(수서식물의 일종)을 알고부터 그 행운목이
꽃을 피는 걸 보고 죽을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됐다는 얘기다. 나이들면 먹게 되는 혈압약등
이런저런 약을 본래부터 한 가지도 먹지 않을 만큼 건강한 편이고 시골에 내려간 이후
더 좋아진 것 같으니 행운목 꽃을 꼭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집 근처엔 또 논 10마지기가 있는데 벼농사는 남의 손을 빌리고 있다. 거기서 나오는
쌀은 소량의 양식만 남기고 거의 전량을 아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준다고 한다.
한국자유기고가협회 이사를 지낸 金회우는 선산을 돌보고 정원을 가꾸는 일 말고도
바뿐 삶을 살고 있다.노인회에 나가 등산과 건강에 관한 특강을 하기도 하고 각종 원고
청탁을 받아 글쓰기를 한다. 자서전을 쓰기 위해 준비 중이기도 하다. 그는 6권 짜리
‘한국언론인물사화’와 ‘대한언론인회 30년사’(1977~2007년)편찬위원으로 참여해
중추적 역할을 한 바 있다.
매일 아침 한 시간 남짓 달마산 기슭을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한 주일에
두어 번은 달마산과 두륜산(703m), 월출산(809m)을 오르 내린다.두륜산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찰로 西山大師(1520~1604)가 임진란때 승병을 일으킨 大興寺가 있다.
보통 7시간 걸리는 월출산 종주를 5시간 30분이면 가능하다고 한다.팔순의 나이에도 불구,
이렇게 등산을 할 수 있는 건 예전부터 등산으로 몸을 단련했기 때문.남한의 산 가운데 가
볼 만한 산은 거의 다 가보았다.
金회우의 이같은 등산취미와 경력은 대한언론인회 산악회를 활성화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밑거름이 됐다. 1989년 대한언론인회에 편집위원으로 입회한 뒤 대한언론회보에
글을 가장 많이 썼으며 산악회 회장을 맡아 등산으로 회우들의 건강과 친목을 다지는데
이바지했다는 게 회우들의 중평.지금도 언론인회 산악회 행사엔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산악회에서 계획 중인 5월 중순 충북 화양계곡 등산행사에 동참할 날만 벼르고 있다.
대한언론인회 30년사를 보면, 본회 창립 직후부터 산하 친목단체로 활동에 들어간
산악회는 1983년 한국산악회 산하단체 가입에 이어 金회우의 헌신적인 봉사로 더욱
기반을 다졌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인터뷰를 위해 처음 상면했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친화력과 사교성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그는 친구가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시골에 내려간 이후에도 수시로
전화연락을 하는 건 물론, 친구들이 내려오면 달마산의 美黃寺와 두륜산의 大興寺등
유명한 사찰을 비롯,땅끝 마을과 보길도, 완도,진도 등의 가볼만한 곳과 맛으로 이름난
호남 음식점을 안내해 친분을 나눈다.
그는 목포에서 학생주보라는 주간지에서 첫 기자생활을 했다.당시 편집국장이
자신의 이름과 동명이인인 김재영이란 분(뒤에 서울신문 지방부차장)이었는데 면접때
김국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필기시험 성적은 좋지 않지만 인물 됨됨이를 보아
합격시켜 주겠다”고.
그뒤 목포일보와 광주일보,전남매일,전남일보 사회부장을 거쳐 1963년 초 서울신문
사회부 선임기자로 발령받아 부장이 없는 지방부장대우까지 지냈다.서울로 옮길 때는
이목우 사회문화담당 부국장과 장정호 사회부장의 주선으로 스카웃 됐다.
1972년 한국경제 사업국장으로 잠시 있다가 1988년 경북매일 편집국장으로
기자생활을 마감했다.학생주보 기자에서 지방지 편집국장에 이르기까지 12번
신문사를 옮겨 다녔다.사회부 출입처는 서울시청을 비롯 내무부,보사부등 거의
빠짐없이 거쳤다.
서울신문에서 1964년 내무부 출입때 이요섭(작고)사진기자와 함께 독도취재를
다녀 왔던 얘기를 들려줬다.그 때까지 독도에는 장관이나 국회의원, 기자가 다녀간
적이 없었다. 울릉군 공보실엔 金회우가 언론사상 최초의 독도 취재기자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한일협정 비준을 앞둔 시점에서 독도취재를 했으면 좋겠다는
朴正熙대통령의 뜻을 신문사에서 받아들여 취재를 갔다.경찰경비정으로 가는데만
11시간 걸렸다. 물부족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란 현지 근무 순경들의 고충등을 기사로
전해 서울신문에서 ‘목마른 독도에 물을 보내자’는 캠페인을 벌였다.그 결과 독도에
대형 물탱크를 세워 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는 것.
“우리 때는 기자 생활을 명예로 알고 때로는 돈도 써가면서 취재 활동을 했어요.
신문 기사는 좁은 지면에 많은 정보를 담아 독자들이 읽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사가 간결하고 문장력도 있어야 하지요.사회부 기자들이 탐사보도 기사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어요.독자들을 감동시켜야 해요.그리고 어두운
기사보다는 웃음이 있는 밝은 기사,미담 기사,계도력 있는 기사를 많이 다루어
주었으면 해요.”
그는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부인을 여의였다.여학교 때 단거리 육상선수 였던
아내는 작고하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던 서울올림픽 구경도 못한채 그해 7월7일
유명을 달리했다. 미인으로 소문났던 아내에게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잘 해주기는 커녕
속만 썩여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아쉽다고 말했다.용인에 부인 묘가 있는데 금년 중
달마산 기슭 선산으로 이장할 계획이다. 부인과 사별후 재혼을 하지 않고 20년 넘게
홀로 살고 있다.
“아내가 갔을 때 1남3녀(딸,아들,딸,딸)가 모두 대학에 다니고 있었어요.애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나이 들어 누가 오겠느냐며 웃었다.
친구도 많고,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은 金회우지만 인터뷰 하는 동안 몇 차례나
‘고독’이란 말을 입에 올렸다.미국의 크라이슬러 자동차 사장을 지낸 ‘리 아이아코카’의
자서전에 나오는 ‘참기 힘든 건 고독’이라고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시골 생활이
좋은 점도 많지만 마냥 목가적이고 낭만으로만 동경할 대상은 아니며 고독하고
불편할 수도 있음을 비쳤다.
모든 부모들이 다 그런 것처럼 자녀들과 사위,며느리에대한 그의 자랑 역시
뒤지지 않았다. 손자 손녀가 6명이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