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너무 많다.
“찬란한 불꽃” 실버 파이팅 회우 초대석 덕천(德泉) 김윤덕(金潤德)
전 초등학교 교사,
전 민중일보, 연합신문, 평화신문 기자
전 수협공보관, 재건국민운동 사무국장
전 서울시 공무원교육원. 명지전문대학 강사
인터뷰 글. 사진/ 호천웅(본보 편집위원. 수필가)
1927년 생으로 올해 만 82세인 덕천 김윤덕 원로 회우는 초등학교 교사, 신문 기자, 수협 공보관, 재건국민운동 사무국장, 공무원 연수원과 대학 강사 등으로 다채로운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다. 은퇴한 후에도 서예와 무도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각종 모임에 참석하다보니 할 일이 너무 많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다.
인터뷰 약속한 6월18일 낮 시간에 산본 김회우의 자택을 찾았다.
김회우 혼자 생활하고 있는 35평의 아파트는 온통 서예 작품들로 둘러 싸여 있고 가족 사진과 기념품 등 삶의 흔적들이 한 쪽 면을 차지했으며 6월의 달력은 각종 약속을 표시하는 빨간 동그라미들로 채워져 있었다.
김회우는 흰머리였으나 건강한 모습이었고 말투는 활력이 넘치고 움직임도 가벼웠다.
커피를 내 놓으며 이 잔이 오래된 건 데 참 오래 만에 제몫을 한다며 말문을 여는 김회우에게 혼자 지내실 만해요 라고 물었더니 “서예도 하고 춤도 추고 바쁘게 지내기는 하는 데 사람 하나가 이렇게 크고 중요한 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허전하고 고독하고...” 말을 잇지 못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김회우의 모습에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사모님 권욱남(權旭男) 여사는 2004년 3월 심장병과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다가 먼저 가셨다. “아내는 반듯하고 여성스러웠으며 서로를 극진히 위했었는데 너무 위해서 일찍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김회우의 사부곡(思婦曲)이 더욱 간절해진다. “행복했던 시간들, 손잡고 여행할 때 모습 등이 떠오르면 조물주가 원망스럽기도 해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고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하지만 한 날 한 시에 같이 못간 게 원망스럽기도 해요. 하지만 나보다 당신이 먼저 간 것이 낫다는 생각도 해요. 나는 끼도 있고 놀기도 좋아하지만 평생 남편과 자식뿐이었던 당신이 홀로 됐다면 어찌 견디겠느냐 고 넉두리도 해본답니다.”
장남인 강원대학교 IT특성화학부 김정범 교수의 연구 실적이 인정을 받아 세계적인 인명사전에 등재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남편과 자식 밖에 모르며 낳고 기르고 가르친 당신의 위대한 힘이요 장한 유적”이라고 아내의 공을 기리며 “ 나는 요즘도 당신과 무언의 대화를 해요, 때로는 여보하며 거실에서 방에서 사진을 바라보며 불러보기도 자주해요, 불러 보기만 해도 어떤 땐 가슴 속이 풀리는 것 같을 때가 있답니다.” 라는 사랑의 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일남이녀에 손자 손녀까지 직계 식솔이 18명인데 속썩이는 자손은 하나도 없단다. 가족사진에 나와 있는 부인이 타계하신 후에 손주 하나가 태어나서 가족은 도로 18명이 되었다고 한다.
한 때 아들이 춘천으로 옮겨 합치자고 했지만 나는 네 어머니와 살던 이 집에서 네 어머니가 남긴 추억들을 되새기며 살겠다고 했더니 아들네가 산본으로 이사와서 옆 아파트에 살고 아들은 춘천을 오가며 생활한다고 한다.
서예전에서 입상이라도 하면 주변 분들에게 인사도 챙기시고 식사대접을 하더라도 맛있는 걸로 하시라고 두툼한 봉투를 마련해 준다며 이런 자식들의 효도도 모두 자식 교육을 잘 시킨 결과라고 말하는 김회우의 아내 자랑과 그리움은 정말로 끝이 없었다.
김회우는 일제 말기에 교원시험에 합격해 18살 때부터 소학교 훈도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출생지인 경기도 연천에서였다. 해방 후 분단으로 고향이 북한 땅이 되면서는 전곡인민학교 교사가 돼있었다. 그때는 남북왕래가 비교적 쉬운 때여서 주소만 서울 경성부로 옮겨 놓고 교원복직 원서를 제출했다.
남북한 양다리 걸치기가 가능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1946년 2월 서울 무학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숙직실에서 밥을 해먹으며 야간인 국학전문학교 국문과에 입학해 낮에는 선생, 밤에는 학생으로 바쁘게 열심히 살았다.
북한 땅에서 서울로 옮긴 것은 체제나 이념 문제가 아니었고 오직 공부를 더 해야 겠다는 일념에서 였다고 한다.l
음악과 체육에 특히 소질이 많았던 김교우는 무악국민학교에서 음악주임으로 합창단을 조직해서 전국 콩쿨대회에서 입상하고 정동에 있는 경성중앙방송국(지금의 kbs)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창신 초등학교로 옮겨서는 체육 주임으로 핸드볼 팀을 지도해서 서울시 대회에서 결승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마다 김교우의 의욕과 욕심, 적극적인 활동은 교장과의 마찰과 불화를 빚고는 했다고 한다.
김교우와의 대화가 막 무르익어 갈 때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벌써 오후 1시가 가까워 졌고 커피는 이미 식은 지 오래었다.
장소를 근처 감자탕 집으로 옮겨 감자탕에 소주를 반주로 하며 인터뷰를 계속했다.
김교우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할 때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1.4후퇴 때 징용돼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며 군제대후 국학대학 동기생인 이강순 민중일보 교정부장의 권유로 교정기자로 언론인으로의 길을 걷게 된다. 민중일보에서 시작된 기자생활은 연합신문을 거쳐 1957년 평화신문 사회부기자로 서울시 경찰국을 출입했으며 대한 통신에서도 사회부 기자였다. 그리고 산업경제로 옮겨 농림부 출입기자로 두드러진 활약을 하게 된다.
10여 년 간의 기자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가 잘 나가던 김두한이 시경에 잡혀간 사건을 특종 보도한 것이었다. 수사과장실에서 김두한 연행 사실을 낌새채고 사진기자와 함께 낙원동 김두한 집으로 찾아 갔다. 당장이라도 내쫓을 듯한 건장한 청년들의 험한 분위기에 겁이 나기도 했으나 김두한의 건재한 모습을 취재해서 소문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고 둘러대며 시간을 끌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 사찰계 형사들이 들이 닥쳤다. 김두한의 연행 과정을 생생하게 취재해서 조간인 평화신문에 특종 보도했던 일은 지금도 자랑스럽다고 한다.
농림부 양정국 사건을 취재하던 때의 기억도 새롭다고 한다. 사건 담당 취조계 형사와 무교동 보신탕집에서 술 한잔 마시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 한 가지를 확인하고 노래 한곡 부르고 의문 사항을 보충하는 식으로 특종 했던 일은 지금도 생각하면 미소를 짓게 되고 스스로 뿌듯하다고 한다. 실컷 재미나게 놀고 특종도 했으니 말이다.
산업경제신문에서 농림부를 출입한 것이 계기가 돼서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 공보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때 수협의 노래를 만든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한다.
노산 이은상 선생에게 부탁해서 가사를 받았는데 노산 선생이 작곡은 김동진 선생한테 부탁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대로 했으며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뛴다고 한다.
또 수협소식이란 신문과 어민지란 잡지를 창간했던 일도 자랑이라고 한다.
사료를 정리하던 수협 관계자가 수협소식 창간호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수소문 끝에 김회우를 찾았고 보관하고 있던 창간호를 기증하겠다고 하자 무척 기뻐했으며 지난 4월24일 거창한 창간호 기증식도 열었다. 김회우는 감사패와 행운의 열쇠도 받아 더없이 큰 기쁨과 보람을 누렸다고 한다.
수협공보관으로 있을 때 직원들이 공보관이란 얼렁 뚱당 술이나 마시고 기자들하고 적당히 어울리는 사람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을 보고는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하고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경영과 회계분야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한 실력을 바탕으로 공보에서 벗어나 조사통계과장과 관재과장의 중임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경험도 커다란 자랑거리였다.
김교우는 서울시 마을금고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금고연합회 공제부장, 중양교육원 교수, 경기도. 부산. 서울시 마을금고 사무국장으로 88년까지 봉직했다. 퇴직 후에도 명지실업전문대학 강사, 고려컴퓨터 시스템 회장 등으로 열과 성을 다했으며 그때마다 적지 않은 보람과 기록을 쌓아왔다.
다양했던 김회우의 긴 과거 얘기에 빠져 들다보니 가벼운 피로가 느껴졌다.
인터뷰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요즘 어떻게 지내는 지에 대해 물었다.
“서예와 무도 그리고 사람들 만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바빠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먼저 서예 얘기부터 들었다.
“2003년 1월부터 서예를 시작했어요. 그 때 아내가 서예 하지 말라데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나이 들어 힘이 줄고 붓이 흔들리면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는 거였어요.” 서예에서도 김회우의 사부곡은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해 9월에 군포시 노인 휘호대회에서 입선했지요. 상금 2만원을 탔는데 아내가 날 얼싸안으며 좋아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내년에는 더 큰 상 타다 준다고 말했었는데.....
지금도 서예학원을 다녀 올 때면 아파트 창가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지금 까지 입상 8번에 특선 3번이며 국전에도 입상한 경력이 있다는 김회우는 “낙재인화(樂在人和)와 수기이부책인(修己而不責人)같은 명언을 새기며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 귀하다고 한다.
김회우의 거실과 안방, 서재에도 모두 휘호들이 두툼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옛 선현들의 가르침이 온 집에 가득한 듯했다.
김회우는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인데 그중의 하나가 서예 스승을 잘 만난 것이라고 한다. 학술. 실기. 인격 어느 것 하나 부족할 데 없는 스승을 모신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에는 대한민국서도대전에 입선했고 오는 7월11일 경기서도대전 시상식에서는 특상을 받을 예정이다. 이번에도 자녀들이 두툼한 봉투를 마련할 것이라며 김회우는 큰 웃음으로 기쁨을 터뜨리고 있었다.
서예와 춤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춤에 대해 물었다.
“사실 사회부 기자 시절에 조금 배운 일이 있었죠. 그리고 아내가 아파 누어있을 때 춤을 배우겠다고 하니 그러지 말라데요. 나 죽은 뒤 마누라 감을 미리 찾으려는 거냐구요. 하지만 늙을수록 건강해야하고 의욕을 가지고 취미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도장을 찾았지요. 그러다 아내가 죽으면서 아차 했지요. 아내를 가장 아프게 했던 일이었던 같아요. 그래서 무도장에 발을 끊었지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어요. 글씨를 쓰는데 다리의 힘이 풀리는 거예요. 무릎에 이상도 생기고 그래서 다시 무도장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스스로를 잡놈이라고 말하는 김회우는 생긴대로 호탕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젊잖다는 것은 전기 뱃더리가 없다는 말이라고 풀이한다.
안고 안기고 싶은 사람들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 춤이라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배워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인생을 즐기되 원수는 맺지 말고 상대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며 무슨 일을 하던지 기본은 딱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도장에 갈 때 죽은 아내 사진보고 여보 미안해 다녀올게 하면 아내가 잘 다녀오세요. 죄는 짓지 말구려 라고 대답하는 것 같아요.”
춤을 추는 상대에 대한 기본도 서로 확실해야 하며 이해하고 부담에서 자유로운 상대를 만나는 것이 귀하다고 덧 붙였다.
김회우를 따라 무도장에도 가 봤다. 춤을 즐기는 노익장이 부럽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후배기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정이 메마른 것 같아요. 동지애. 의리 같은 것이 없어지고 삭막해지는 것 같아요. 치열하게 경쟁하고 한잔하고 풀어 버리는 도량과 기백이 아쉬운 것 같아요. 그리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도 아쉬워요.”
김회우는 욕심이 참 많은 분 같다. 요즘 새로 기타도 배워서 시민회관에서 공연한 일도 있고 하모니카도 배우기 시작했단다. 탁구도 잘치고 싶어 군포시 체육회관을 찾기도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