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파이팅(14) 趙東彪 ∙한국일보체육부장
∙일간스포츠 국차장,논설위원
∙대한체육회이사 역임
인터뷰 글∙사진 崔熙助편집위원(중부대초빙교수)
‘체육기자 60년(1949~2009년)’
지금 집필 중인 책 이름이다.연말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늦어도 내년엔 출간할 예정이다.책 이름이 말해 주듯 그의 한평생은 오로지 체육기자였다.현직에 있었을 때만이 아니라 퇴직 후에도 여전히 체육기자다.체육기자인 그에게 은퇴란 따로 없다.
본인 스스로는 서슴없이 ‘바보’라고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의 경우는 바보니까 한 길만 걸어온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부친다.그러나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은 없고 재미있는 인생이었다.다시 되돌아 가더라도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趙東彪회우.1925년생.올해 84세.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스포츠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스포츠 코리아(대한체육회 발행 월간지)에 ‘스포츠 인물 열전’을,서울스포츠(서울시체육회 발행)에 매달 ‘한국육상개척기 영웅들’이란 제목의 연재물을 싣고 있다.8월18일 대한언론인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던날 조 회우는 스포츠 코리아 9월호에 게재하기 위해 준비한 원고(200자 원고지 22장 분량)를 지니고 있었다.작년 8월까지 라디오에 고정 출연해 스포츠 평론을 했다.요즘엔 부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다.현재 맡고 있는 직책은 서울시 인라인 로러연맹 명예회장,高友체육회(회장 허광수)감사.
“서울시 인라인 로러연맹은 서울시체육회 산하 단체입니다.1987년에 부회장을,1998년부터 2002년까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고우체육회는 고대체육부 출신 스포츠 OB모임입니다.한때 장덕진 전농림부장관과 이명박대통령이 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대한체육회이사(1980년대)를비롯,대한농구협회이사(1970년대),대한육상경기연맹이사(1980~1990년대),서울시체육회감사를 10여년간 지냈다.
—체육기자가 된 어떤 동기가 있습니까.
“서울중앙방송국(KBS전신)방송과장으로 있던 민재호씨의 권유로 체육기자를 시작한게 제 인생을 운명짓는 결과가 된 셈입니다.”민재호씨는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린 분. 1948년 14회 런던올림픽 때 한국 최초의 해외 파견 아나운서였으며 해박한 스포츠 지식의 소유자였다.
조회우는 1949년 2월 공보처 서울중앙방송국 공채1기로 입사,방송과 보도계에서 근무했다.
“당시 중앙방송국장은 구한말인 1907년 고종황제의 밀사로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 준,이위종과 함께 파견됐던 이상설의 조카인 이관희씨였어요.상식시험을 거쳐 면접을 보는데 이국장이 ‘안행(雁行)이 몇이신가’ 물어요.‘안행’이란 말의 뜻을 몰라 모른다고 했더니 ‘그걸 몰라요,그걸 몰라요’,하면서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더라구요.나중에 집에가서 알았지만 ‘기러기 雁’에,‘나아갈 行’,그러니까 형제가 몇이냐고 물었던 걸 모른다고 했으니,그 뜻을 알고 난 뒤에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몰랐어요.”한영섭회우(전KBS보도실장,현 한국방송인동우회장)가 동기생이다.
당시 보도계 선배로는 김인현(인사동에 있던 민영 문화방송의 초대 보도국장,주일 특파원 역임),김우용(종군기자,서울신문사회부장 역임),편용호(연합신문,한국일보 거쳐 국회의원 역임)씨가 있었다. 선배들이 통신을 나눠주면 아나운서가 읽기 쉽게 원고지에 회화체로 옮겨 쓰는 일이 일과였다.그러던 중 민과장의 권유로 매일 밤 9시 라디오 골든 타임의 15분 종합뉴스 뒤에 10분씩 내보내는 스포츠 뉴스를 취재해서 기사를 써 넘기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됐다.
—날마다 10분씩 스포츠 뉴스를 내보내기 위해 혼자 취재 다니고 기사를 써 넘기려면 꽤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기사를 많이 준비해야 했습니다.기사 거리는 많은 편이어서 시간 메우기는 어렵지 않았어요.그러나 혼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취재를 하고 매일 밤 늦게 퇴근하는 생활은 녹녹지 않았어요.출고 기사를 보아줄 사람도 따로 없었어요.방송계로 넘기면 그 스포츠기사가 그대로 나갔어요.취재 현장은 지금은 없어진 서울동대문운동장을 비롯,운동장 근처의 고양군청 강당(탁구),옛훈련원 자리의 제2운동장(농구),을지로6가 서울대사범대 강당(체조)이라든가 종로YMCA(탁구,농구)등이었어요.서울운동장에선 한성실업야구연맹의 야구경기가 리그전으로 열렸습니다.식산은행,체신부,운수부,조선운수,전매국,금융조합연합,조흥은행,서울시청,경성전기,남선전기 등 실업야구 팀이 참가했는데 그 수준이 꽤 높았습니다.경기가 없을 때에는 유명한 만능 스포츠맨인 이영민씨라든가 농구선수인 이상훈씨등과 같은 스포츠명사 좌담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경력으로 조 회우는 우리나라의 방송체육기자 1호로 불린다.
부친의 잦은 지방 전근으로 경상북도 청도에서 출생했지만 본적지는 서울종로구 신문로.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경북중학교,대전중학교를 거쳐 서울에서 성남중학교를 나왔다.1943년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에 입학해 46년 졸업했다.
“45년 8월4일 보성전문 3학년 때 징병2기로 서울삼각지 용산부대에 끌려갔다가 보름여만인 8월20일 풀려났어요.그전에도 1년간 인천지역 일본군 부대에 징용돼 노동을 하느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복교를 하니까 인촌 김성수교장이 한글이나 제대로 깨치고 졸업하라던 기억이 나요.보통학교때 주 2시간 조선어를 배우다가 그나마 일제가 학교에서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해 한글을 온전히 알지 못 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이희승선생이 한글맞춤법통일안 교재로 한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보성전문을 나와 미군부대에서 3년간 통역 일을 하다가 길거리에서 중앙방송국 공채광고를 보고 응시,합격했던 것.
—방송체육기자는 언제까지 하셨나요.
“49년 2월에 입사해 그해 가을 그만 두었어요.50년 6∙ 25전쟁이 나고 1∙ 4후퇴 후 부산 길거리에서 국군에 징발됐습니다.제주육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제주도에서 미군 통역사병으로 근무하다 55년 병장으로 제대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하던 해 11월, 국일보 체육부기자로 특채돼 본격적인 스포츠기자의 길로 들어선다.장기영 사주가 직접 면접을 하고 채용했다.
“당시 한국일보 체육부엔 이용일 부장과 기자 1명이 있었습니다.체육부가 따로 있던 신문사는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두 곳 밖에 없었어요.체육기사를 사회부에서 다루는 게 일반적이던 시절입니다.체육 전문기자도 한국, 서울 외에 경향신문, 동아, 조선일보에 있는 정도고 별로 없었어요.모든 신문에서 체육면은 따로 없었습니다.4면 체제에 3면의 사회면 한 구석 체육난에 주요 경기의 스코어 정도가 게재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한국일보 장 사주는 1960년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하고 다음해 12월, 4면중 1면을 스포츠면으로 할애 했다. 오도광, 한인성, 조두흠이 기자로 포진하고 있었다.일본의 여러 신문과 스포츠 기사를 많이 다루는 미군 성조지(The Stars & Stripes)스포츠 면을 벤치 마킹해 가며 스포츠 논평기사를 비롯,손기정과 남승룡등 유명 선수의 스포츠 일화와 스포츠 소설까지 다루었다.
—한국 스포츠 저널리즘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군요.
“장 사주는 한국스포츠 저널의 발전에 개척자적 역할과 기여를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한국일보는 또 유독 스포츠 이벤트를 많이 펼쳤어요.재일동포초청 야구시합이라든가 부산~서울간 역전 경주대회등 스포츠행사를 많이 했습니다.”
조 회우는 한국일보체육부장,일간스포츠국차장,논설위원을 역임, 1988년
서울올림픽 취재까지 마치고 63세때 퇴직한다.신문사 정년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주간한국과 주간여성을 담당하는 한국일보 주간국장을 2년간 맡기도 했다.
국내외 출장을 다니며 굵직굵직한 스포츠취재를 많이 했음은 물론이다.도쿄올림픽(1964)을 비롯,뮌헨(1972),바로셀로나(1992,)시드니(2000)올림픽, 그리고 자카르타아시아경기대회(1962),방콕(1970),뉴델리(1982),북경(1990),히로시마(1994),방콕(1998),부산(2002)아시아경기대회,대구유니버시아드(2003)를 현장에서 직접 취재했다.
“1988년 퇴직한 후에는 그때그때 신문과 방송등 각종 미디어의 프리 랜서로 현장을 누볐습니다.중국어를 좀 할 줄 알아 특별히 작년에 베이징올림픽 취재도 가려고 잔뜩 별렀는데 못 갔어요.”
—아쉽게도 왜 못 가셨습니까.
“자식들이 가지 말라고 한사코 말려서 못 갔어요,제가 2003년에 가벼운 뇌졸중 증세를 앓은 적이 있어 큰 일 난다는 거예요.”
본래 술은 못하고 담배는 1980년에 끊었다.조회우를 보고 실제 나이보다 한 10년은 젊어 보인다고 말하는 회우들이 많다.
—체육기자를 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거나 특종했던 때 얘기를 해주시죠.
“64년 도쿄올림픽때 북한 육상 중거리선수로 출전한 신금단과 남한의 부친 신문준씨 간의 부녀 상봉이 도쿄 우에노(上野)의 조총련회관에서 이루어지던 현장을 한국일보 취재팀이 단독보도 하던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취재팀장은 이용일부장,장정호사회부기자,조용호기자 등이 취재팀이었습니다.저는 장기자의 취재기사를 서울로 송고하는 역할을 했습니다.저의 개인 특종 가운데는 신문사 퇴사후 92년 2월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사 주최 베츠다이(別大)마라톤(오히타~벳부 왕복 마라톤)에서 황영조선수가 2시간8분47초의 기록을 세운 사실을 단독 취재했던 일입니다.그 대회에서 황선수는 첫 출전으로 2등(1등은 멕시코선수)을 했지만 이 기록은 한국선수의 종전 10분대 벽을 깬 신기록일 뿐 아니라 세계 톱 클래스 기록이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기록이었습니다.현장에 한국 체육기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서울의 일간스포츠에 전화로 알렸더니 체육팀장이 대뜸 ‘농담 마이소’ 하는 정도였어요.KBS TV에서는 그날 울산 현장의 배구중계방송중 ‘황영조 한국마라톤 신기록 수립’ 자막을 내보냈어요.”
—스포츠 관련 저술이 많으시죠.
“ ‘함성을 뒤로 하고’ ‘이야기 한국체육사(3권)’ ‘극일의 횃불’ ‘순간의 힘을 모으자’ ‘레슬링 풍운록’ 등이 있습니다.”
—상도 많이 받으셨지요.
“아시아권에서 처음 IOC(국제올림픽위원회)언론상을 받았습니다.또 92년 아산체육상 (상금3백만원)을 탔어요. 이때 받은 상금으로 그때까지 한번도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하지 못해 미안해 하던 차에 부부동반으로 벳부(別府)로 갔는데 황 선수의 신기록수립을 특종보도하게 된 것입니다.그밖에 자랑스런 고대인 상과 성남인 상을 받은 정도입니다”
—요즘 자주 만나는 분들은 누구인지요.
“고대1회 졸업생 모임인 高一會 멤버들입니다.김원기 전경제부총리(1924~2001)와 이중재 전국회의원(1925~2008)이 절친한 친구로 자주 어울렸는데 먼저 갔습니다.김진웅(고대총장 역임)등이 현재 회원입니다. 스포츠언론인회(회장 박갑철)와 한국일보 체육부 OB모임 친구들도 있습니다.”
조 회우는 지난2007년부터 서울 시흥3동에서 매주 이틀 2시간씩 가정주부와 직장 여성등을 대상으로 일본어 강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도 한다.
후배 기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렸더니 “성실하게 취재하시라”는 짧막한 한 마디였다.
—세계속의 한국체육의 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올림픽 메달 획득으로는 10위권에 들만큼 장족의 발전을 했습니다.그러나 아쉬운 점의 하나는 육상경기력의 취약성입니다.걷고 달리고 뛰고 던지는 육상경기는 학원스포츠로서 어렸을 때부터 장려해야 합니다.이에대한 학교 관계자들의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조 회우는 지난 2월호 본보 12~13쪽에 게재한 ‘미니 회고록,왜 체육기자였나’에서 “KBS에 입사했던 1949년부터 60년간,6∙25때의 5년과 한국일보에서의 관리직을 맡았던 2년간을 제외하면 매일을 스포츠행사를 뒤쫓던 인생이다.길지 않은 생을 남겨놓고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회고하면 일업(一業)에 종사하여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여기는 지금이다”라고 술회했다.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딸. 아들 2남1녀와 손자 손녀 5명을 두고 있다.3남매를 훌륭하게 키워 각각 대학교수와 연구원,회사대표로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