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田植회우
吳田植회우(75)는 남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대학과정을 세 군데나 거쳤다. 육군사관학교와 고려대학교,경찰전문대학(경찰대학 전신)을 다녔다.육사는 13기로 입학해 1학년을 마치고 몸이 좋지 않아 자퇴했다.
기자생활은 서울신문에서 시작해서 대한일보, 민국일보, 중앙일보를 거쳐 경향신문 정치부장과 부국장을 역임했다.
그가 1960년대와 70년대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집권층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한국 현대사를 권부 가까이에서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 중 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吳 회우가 그렇게 된 데에는 세 군데 대학과정, 특히 육사와 경찰학교를 다녀 군과 경찰 인맥이 남다른 이력을 갖게 한 배경이란 사실도 그렇다.그가 신문기자로서 보낸 20대 중반 이후 40대 중반에 이르는 청․장년기 20여년간은 대체로 朴正熙대통령이 혁명을 해서 집권하고 서거하기까지의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 吳 회우는 60년대 후반 진관외동 기자촌 건립위원장을 맡아 기자촌 탄생 주역의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어쨌거나, 5 16군사혁명 직후 민정이양에 이르는 긴박했던 상황과 경제개발과정, 삼선개헌과 유신,긴급조치,朴대통령 서거등 60,70년대 20년 역사의 파노라마를 지켜본 신문기자 吳田植회우는 개인적으로 지난날을 어떻게 반추하고 있을지,무엇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후회하지는 않아요.재미 있었다고 할까,그러나 한 우물을 팔 걸,하는 아쉬움은 있어요.지금 생각하면 공직을 한 번도 맡지 않은 게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공직을 맡았다면 가정이지만 구속이 되거나 어떤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일반 대학 외에 군과 경찰이라는 특수대학 두 곳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된 동기부터가 운명적이다.
“경찰대학 졸업반 때 범죄심리학을 강의했던 장병림교수의 권유로 자유당 말기 서울신문에 수습기자로 들어가 기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장교수가 그러는 거예요.너는 영어도 잘 하고 예쁘장 하니 경찰보다는 기자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기자 시험을 보았습니다.그때 사장이 손도심씨,사회부장은 이혜복씨였어요.”
金珖熙 회우와는 육사와 고려대, 서울신문 수습동기라면서 우연치고는 이것 역시 흔치 않은 인연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의 진짜 운명은 서울신문에서 최고회의를 출입하면서 全斗煥대위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생도11기인 全대위는 吳 회우의 육사 2년 선배로 재학시절부터 알고 있었다.당시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의 민원비서관이었던 全대위가 朴의장한테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
“朴의장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느냐고 물어요.그래서 밭 田, 심을 植입니다고 말씀드렸더니 대뜸 그래요. 너 우리 편이야.”
全斗煥중령이 1967년 무렵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으로 청와대 외곽경비책임을 맡고 있을 때 당시 청와대 출입 吳田植기자와의 에피소드 한 가지.
“全중령이 하루는 이런 부탁을 해요. 박종규경호실장에게 얘기해 朴대통령이 30경비단 시찰을 나오도록 해달라는 거예요.그래서 朴실장에게 전했더니 감히 그런 부탁을 하느냐는 듯 웃긴다는 반응을 보여요.그러다 어느날 저녁 무렵 朴실장한테서 朴대통령이 경비단에 들른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 현장엘 갔더니 全중령이 朴대통령한테 ‘각하,애들이 고생을 하는데 샤워시설 좀 해주십시오.’하는 거예요.”샤워 시설은 朴대통령이 즉석에서 경호실장에게 지시해 얼마 안 있어 설치됐다.
1965년 5월16일 朴대통령은 세 번째 미국을 방문했다.케네디대통령때 두 차례,그리고 케네디대통령의 급서로 대통령을 승계한 존슨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DC를 방문한 것.吳田植기자가 수행취재기자로 갔음은 물론이다. 타사에선 대부분 부장과 국장급 이상 간부급 기자들이 朴대통령 방미 수행취재단에 포진해 있었다.
당시 서울신문을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검색해 보니 朴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을 비롯한 방미 관련 기사가 5월18일부터 24일까지 매일 吳田植 특파원 이름으로 1면 톱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단은 朴대통령이 워싱턴에서 공식 일정을 끝내고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를 방문했을 때 수행기자단에서 풀 기자로 뽑혀 혼자 수행 취재하면서 일어났다.웨스트 포인트에는 취재단 중 한 사람만 수행 할 수 있다고 해서 한국 육사를 다녔던 자신이 자연스레 선발돼 가게 됐다는 것.
吳 회우는 거기서 朴대통령이 존슨대통령의 요청으로 한국군 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키로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실을 캐치했다.
“웨스트 포인트에 갔을 때 朴대통령이 물어요.기자가 그렇게 좋으냐고요. 그래서 저는 기자를 하니까 이렇게 각하를 가까이에서 수행 취재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씀드린 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요.그 때 비서실장이 李厚洛씨 였어요.李 실장한테서 돈을 얻어 그 길로 택시를 타고 뉴욕으로 달려가아스토리아호텔에서 서울 본사에 기사를 긴급 타전했지요. 특종을 했지만 그 후유증은 막심했습니다.청와대대변인과 문공부장관이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고 무엇보다 함께 갔던 선배 기자들로부터 쏟아지는 원망과 질책이 마음을 옥죄왔습니다.”
웨스트 포인트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거기서 뉴욕 맨하탄 타임스퀘어 근처까지 버스로 1시간 40분 소요되는 걸로 돼 있다.그런 거리를 택시로 달려 갔으니 택시비가 어지간히 나왔을 법 하다.
1965년은 한국으로서는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 전투부대 파병이라는 중요한 시기였다.朴대통령은 존슨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한일회담에 대한 미국측 지지와 한․미․일관계의 정립,그리고 월남참전에 합의함으로써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및 경제원조 확대와 한미안보동맹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를 가져왔다.1965년 9월25일 육군맹호부대 1진의 파병을 시작으로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 66년 9월5일 육군백마부대 파병등 73년 철군 때까지 8년8개월 동안 연인원 31만여명이 월남전에 참전했으면 5천66명이 전사했다. 당시 참전용사의 한달 전투수당은 미군과 같은 수준의 1백달러 안팎.병장이 50달러 대위가 1백80달러.63년 한국의 1인당 GNP는 연간 1백달러 .월남파병 용사들의 전투수당과 독일 파견 광원과 간호사들의 달러 송금이 오늘날 경제부흥의 초석이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崔熙助편집위원(중부대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