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복(李蕙馥)(87세) 경기 양평산 중앙고,보성전문 졸업
민주일보, 자유신문, 서울신문, 동아일보기자
한국전쟁 참전기자(경향신문, 서울신문)
KBS 해설위원장, 언론중재위원장, 대한언론인회 회장
인터뷰 글. 사진/호천웅(본보 편집위원. 수필가)
목동 자택에서 만난 여든 일곱의 이혜복 회장은 건강했고 평안한 모습이었다.
이회장이 주방에서 손수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 올랐다.
전설의 사회부장, 명성을 떨친 종군기자의 노후는 의외로 조용하고 조촐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검소하고 소탈한 이회장의 성격이 반영된 결과겠지만 화려한 경력의 이 회장 쯤 되면 보다 넓은 아파트에 보다 고급스런 가구들로 장식되었으리라고 생각했던 속물근성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흔한 대로 건강부터 여쭤봤다.
“건강해요. 음식도 잘 먹고 소화도 잘 돼요. 그러나 나이가 있으니까 조심하고 살아요. 나이 들면 쉽게 넘어지고 다치고 그러죠. 계단을 다닐 때 특히 조심합니다. 몸을 낡은 기계로 생각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답니다.”
집안 분위기가 조용해서 조심스럽게 사모님께서는 요? 라고 말문을 돌렸다.
“교회에 갔어요. 권사로 영락교회를 섬겼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은퇴 권사로 봉직하면서 거의 매일 교회로 출근하다시피 한답니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집안일은 내가 주로 맡아서 하지요.”
다시 둘러보니 깨끗하고 말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된 집안이 새삼스레 돋보였다.
“저 집안 일 아주 잘한답니다. 청소는 물론이구요. 밥하는 선수가 됐구요. 설거지도 하구요. 그런데 세탁은 못해요. 뭐 좀 복잡하고 그래서요.” 그러면서 씩 웃으려다 마는 이회장의 모습이 천진스러워 보였다.
인터뷰 중간에 교회에 갔던 사모님께서 귀가했다. 나이보다 젊고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사모님 방봉세(80)여사와는 서울신문에서 사회부장으로 일할 때인 1955년 사회면 편집담당이었던 김대우씨의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바로 사모님 자랑으로 이어졌다.
7살 아래인 사모님 방봉세 여사는 친정이 신의주였다. 여고생이었던 방여사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1월의 신의주 학생반공의거에 참가했다가 처형을 피해 단신 월남했다. 서울에서 이화여고와 이화여대를 다녔는데 미국선교사와 선교 재단의 도움을 많이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결혼 당시 방여사는 덕성고녀의 교사였다.
이 회장은 자신은 술 마시고 늦게 귀가 한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사모님이 자녀교육을 잘해서 3남매가 모두 잘 자라 모두 성공해서 자랑스럽고 6명의 손자 손녀도 귀하고 예쁘게 성장해서 흐뭇하다고 말했다.
큰 아들은 소아과의사로, 차남과 막내사위는 변호사로 성공했으며 모두 2명씩의 자녀를 두어서 이회장의 손녀와 손자는 모두 6명이다.
벽에는 단란한 가족사진과 한글로 쓴 가훈이 걸려 있었다.
가훈의 내용은 -믿음의 아버지 -사랑의 어머니 -소망의 자녀들이었다.
미션 스쿨 출신인 사모님 의견이 보다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가훈을 되새겨 봤다. 믿음의 아버지와 사랑의 어머니는 이 공간에 있으나 소망의 자녀들은 모두 소망을 이루고 독립해서 다른 공간에서 다음 세대의 소망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이회장의 중요 일과 중 하나가 영어 공부다. 매주 월. 수. 금 밤 8시 10분부터 10분 동안 필리핀 여선생님으로부터 국제 전화로 영어회화와 작문을 배우는데 시간이 갈수록 재미가 더하다며 환한 표정으로 기뻐했다.
2년 전부터 시작해서 수준도 꽤 높아졌고 현재 교재 84단계를 공부하는 중이다.
아들이 등록하고 교재도 계속 복사해 주어서 편하게 공부한다고 한다.
영어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벼운 운동으로 산책도 하고 책도 보고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언론계에서 함께 일한 분들 만나는 모임이 있고 보성전문학교 때 친구들과도 매달 정해놓고 만나 대화도 나누며 소주도 몇 잔씩은 나눈다고 한다.
이 회장은 고향이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이다. 고향집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뛰어나서 여름에는 소나기구름이 아름다웠고 겨울에는 설경이 부소산 같았다.
장조카가 이민가면서 처분하지 않고 놔뒀으면 지금 쯤 고향집에서 지낼 텐데 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양평보통학교 시절 왕복 20리를 걸어서 통학한 덕에 약했던 몸이 건강해졌고 지금도 걷는 데는 자신이 있다고 한다.
서울로 유학해서 중앙고보와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는데 일제 말기에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산동성에서 훈련받았다.
남만주 태평천(太平川)역에 주둔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벌판에 판 참호에 폭탄을 지고 들어가서 소련군 탱크가 진주하면 함께 폭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다행이 소련군 탱크와 마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것인지 미래는 어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며 괴로움에서 잠시도 벗어 날 수가 없었다.
1945년 8월9일 일제의 극동군이 소련군에 항복하면서 포로 신세가 됐다.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수용소에서 탈출했고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
1945년 10월의 일이었다.
상과(商科) 출신의 청년 이혜복은 아버지 친구가 상무로 있던 저축은행에 취직하려 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1946년 5월 서울 길거리 전봇대에서 창간 민주일보가 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읽고 지원해 합격한다.
신문기자를 하겠다고 하자 한학자이며 신설동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시던 아버님께서
첫째, 돈에 집착하지 말라. 둘째, 정당 활동을 하지 말라. 셋째, 사실을 사실대로 써라. 는 3가지 약속을 지킬 것으로 조건으로 허락하셨다. 이때의 약속이 기자 이혜복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리고 건국과 한국전쟁, 5.16을 넘나드는 격동기의 현장에 부딪치고 역사를 기록하며 기자로서의 삶을 불태우게 된다.
자유신문 기자 시절 남로당의 위조지폐 사건의 27차례 공판을 계속 취재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며 1950년 5월 20일 경향신문으로 옮긴 다음 달 한국전쟁이 터지고 종군기자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전쟁이 터지던 날 이혜복 기자는 전선 취재 지시를 받는다. 평상복 차림으로 군용차가 아닌 회사 지프차를 타고 사진기자와 함께 동두천으로 향했다.
당시 북한군의 기습남침 상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국민을 물론이고 군 출입 기자들도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된 데다가 정부나 군이 정직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전선으로 가는 동안 포성이 들려오는 데도 국도 옆에서는 모내기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한가로웠다. 동두천 전선부대에 도착했을 때 지휘관이 기자에게 보여 준 것은 초전에 사로잡은 인민군 병사 몇 명과 노획한 무기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리고 전선에 이상은 없다는 설명이 고작이었다.
이회장이 서울로 돌아와 쓴 첫 종군 보도는 ‘전선에 이상 없다. 국군 용전분투 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고 이 기사는 사진과 함께 1면 톱을 차지했다.
서울 신문의 한규호 특파원이 임진강에서 발신한 내용도 ‘임진강에서 총반격. 완전격퇴 시간문제.’라는 제목이었다.
27일 현재 군 보도과에서 밝힌 종합전과도 ‘해주시내로 국군이 돌입했다.’ ‘의정부를 재탈환 했다.’는 엉터리 내용이었고 그대로 각 신문에 보도될 수밖에 없는 혼란상태였다. 군의 이런 대응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6월 26일 국방부에서 종군기자단이 결성됐지만 28일 서울이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대부분의 종군 기자들이 우왕좌왕하다가 국군과 함께 남하하지 못하고 흩어졌으며 한규호 기자는 납북됐다가 순직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 회장은 기자임을 숨기고 고향인 양평으로 피신했다.
고향에 숨어 있다가 인민위원회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아버님의 도움을 받은 분의 아들이 인민위원장이었고 그가 처벌을 요구하는 조사관의 주장에 반대 의견을 진술해 주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9.28수복 후 이 회장은 경향신문에 복귀해서 역사적인 평양 탈환 작전에 종군한다.
10월1일 3.8선을 돌파한 국군은 북진을 계속해서 19일 평양을 탈환한다.
대동강에서 본사 이혜복 특파원 19일발로 된 경향신문 10월 20일자 1면 톱기사는 “평양시 완전 탈환” “각 부대는 속속 입성” “세계 전사상 경이적 작전” 등을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 회장은 평양 탈환 1보가 실린 신문을 지프에 가득 싣고 다니며 이북 동포들에게 돌렸으며 동판을 가지고 가서 평양 현지에서 혼자 호외를 내보기도 했다.
역사적인 순간, 이 회장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벅차고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1951년 휴전 회담 취재 중 중앙고보 선배이며 스승인 김동석씨를 8년만에 판문점에서 만났다. 월북한 김동석씨는 북한 측 통역이었는데 이 회장을 만나자 큰 소리로 욕을 하다가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태도가 부드럽게 달라지면서 유진오 교수와 이인수 씨등의 안부를 묻던 기억이 생생하다.
얘기는 나누었지만 손도 잡아보지 못했던 해후가 지금 까지도 안타깝다.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지만 검열에서 통과되지 않아 신문에 실리지도 못했다.
종군 취재 중 잊지 못할 일 가운데 하나가 휴전 협정 체결 소식을 보도하는 과정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3일전에 경향신문에서 서울신문으로 옮긴지 3일 되었을 때인데 취재는 했지만 판문점에서 서울로 귀환하는 버스를 놓쳤다.
당황스런 순간 마침 출발하려던 전 소속사인 경향신문 지프차를 보고 태워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다급했다. 우선 기사 송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경향신문 지프차의 꽁무니에 있는 스페어 타이어에 매달렸다.
일산까지 그렇게 결사적으로 매달려 갔다. 숨이 차기도 했고 어느 순간에는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들기도 했다.
일산에서 미군 해병대가 검문을 해서 차가 멈췄으나 검문이 끝나자 지프차는 이회장을 그냥 무시하고 내달려 버리는 것이었다.
일산에서 급히 신문사와 어렵게 연락이 됐고 제시간에 보도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송고 작전이었다.
잊을 수 없는 일들을 많이도 경험했다. 자유당 정권시절의 얘기다. 동해안 지역에 3M가 훨씬 넘는 많은 눈이 쌓였다. 당시 송요찬 3군단장이 지프차를 보내며 현장 취재를 요청해서 설화(雪禍)현장으로 달려갔다.
눈이 쌓여 먹을 것을 못 찾는 토끼. 산양. 노루 등의 눈 속에서 설설 기어 나오는 장면들을 목격하며 막사가 눈사태로 휩쓸려 가버린 5사단 본부를 취재했다.
당시 5사단장이 박정희 장군이었고 육군본부에서는 책임을 추궁할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
사진과 함께 당시의 설화가 불가항력이었다고 보도한 서울신문 덕에 박정희 장군이 면책된 것도 기억에 남는 취재 중의 하나였다.
그 후 박정희 장군이 5.16을 일으켰다. 서울신문 사회부장이었던 이 회장은 육군사관학교(교장 강영훈)생도의 혁명저지데모 관련기사로 문제가 돼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 회장은 그때를 회고하며 신군부가 기사에 문제를 삼았으나 자신을 봐주려고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이 회장은 동아일보로 옮겨 동경지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KBS에서 해설위원장, 연수원장 등의 보직을 수행했으며 1980년 정년퇴직했다.
KBS에서 지낸 “13년”이 한 직장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기록이다.
그 후 언론중재위원장과 대한 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 회장은 지금도 대한 언론인회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대한 언론인회가 조회장 중심으로 잘하고 있어 흐뭇하다면서 앞으로 전통을 잘 계승하고 후배위해 더 힘차게 지금의 기조를 이어나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 납북돼 순직한 서울신문 종군기자 한규호씨의 이름이 한국기자로서는 유일하게 파주에 있는 한국전순직종군기자추념비에는 올라 있지만 후사도 없는 그를 생각하면 더 쓸쓸 해진다며 그의 사진이라도 서재필 박사 등과 같이 프레스 센터에서 볼수 있게 됐으면 하는 희망이 간절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사모님께 남편 이혜복에 대해 물었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경제에 관심이 덜해 젊어서는 힘들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베픈 덕에 좋은 친구들이 많고 노후에 잘 지내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술을 좋아해서 밤늦게 친구들이 쳐들어 올 때가 힘들었어요. 크리스마스 이브를 아이들과 같이 보내기로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케이크 사다놓고 기다리는 데 안 오시는 거예요. 아이들은 지쳐서 잠이 들었구요. 한시가 넘어서야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올 때는 미웠어요.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어요. 12시가 넘어 친구와 친구의 술집 여자까지 집으로 데려 왔어요. 정말 화가 많이 나더라구요. 그 친구를 내 쫓았지요.“
라디오 방송을 많이 듣는다는 이 회장은 후배기자들에게 6.25남침을 분명히 하지 않는 보도를 접할 때는 답답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고 사실보도라고 해도 너무 정치적인 여.야 대립을 많이 보도하는 것은 여.야 갈등을 조장하는 측면도 있다며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일부 편향 보도에 대해서 우리국민들이 현명해서 현혹되지 않고 바로 알게 되지만 교육은 제 길을 찾아야 하고 특히 역사 교육이 바로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젊은이 가운데는 6.25를 일본이 침략한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이는 한심한 일이고 역사는 바로 가르쳐야 하고 국가의식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