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파이팅<20> 회우 초대석 秦哲洙 •미국AP통신 서울지국장
•동아일보 워싱턴특파원
•동아일보 편집국장대우
•USA Briefing사장겸 주필(현)
인터뷰 글•사진/최희조(본보편집위원•중부대초빙교수)
그는 언제 어디서나 언론인이다.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언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진철수 회원.1929년 2월 4일 서울 가회동 태생.어느 덧 팔순을 넘겼다.그러나 외모나 걸음걸이,목소리 어느 모로 보아도 젊은 혈기가 넘쳐난다.1952년 코리아 타임스 입사이래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면서 지금까지 59년째 언론과 인연을 맺고 있으니 그의 말처럼 골수 언론인이다.워싱턴DC 근처에 살면서 USA Briefing사장 겸 주필로 미디어 웹사이트(www.usabriefing.net)를 제작 운영하고 있다.지난 2월 7일 서울에 왔다가 한달간 머물고 3월 6일 출국했다.서울 체류 중 서울 프레스 센터 대한언론인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보았다.
-아주 건강하고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이시는데 비결이라도 갖고 계십니까.
“특별히 하는 건 없습니다.젊어서부터 즐겨온 테니스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정도입니다.이번에 서울에 와서도 장행훈, 민병문 씨등과 만나 테니스를 쳤습니다.”
-유 에스 에이 브리핑은 어떤 인터넷 매체입니까.
“전재계약이 돼 있는 뉴욕 타임스 기사 등 미국의 최신 뉴스와 국제정세를 영한대역으로 서비스 하는 인터넷 매체입니다.동영상 뉴스와 원어민의 영문기사 낭독과 적절한 주석도 곁들이고 있습니다.영어 공부에 도움을 주자는 목적과 함께 미국 고급지들의 분석,논설 등을 한국에 널리 보급함으로써 미국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운영하고 있습니다.미국의 한국 동포들 가운데서도 뉴욕타임스나 뉴스 위크 등을 읽을 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영어를 우리 말로 번역하고 어려운 용어를 알기 쉽게 해설해 주니까 자습을 하면서도 얼마나 고마워 하는 줄 몰라요.”
- 서울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새로운 인터넷 매체를 만들기 위한 준비작업차 왔습니다.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콘텐츠를 전면 개편해 본격적인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려는 의욕을 갖고 있습니다.미국과 한국을 잇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인터넷 매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두 달 안에 개업 할 예정입니다.”
-서울 출장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습니까.
“네,많은 지인들을 만나 사업계획을 설명드리고 협조를 구했습니다.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큰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만, 초기 투자 자금 확보가 관건입니다.잘 되리라 봅니다.”
그의 부친은 소파 방정환선생과 함께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 멤버의 한 사람이었던 고 진장섭 선생이다.모친은 일본 유학을 하고 잡지 ‘창조’와 ‘개벽지’ 기자로 일하다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신여성이었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AP통신 서울지국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다.그러다 영문학과 동기인 박권상 회우의 권유로 동아일보로 옮겨 미국 워싱턴 특파원과 편집국 취재담당 국장대우를 역임했다.정경부장과 사회부장을 잠시 겸임하기도 했다.
다음은 ‘한국언론과 함께 한 50년 비사, 이야기 관훈클럽’(저자 정범준) 121 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진철수는 1965년 동아일보 주미특파원으로 떠났다가 1971년 초 귀국했다.곧 선거 광풍이 불었는데 진철수는 여야 양쪽으로부터 수난을 당했다.야당은 야당 유세에 모인 청중수가 그것 밖에 안 되느냐고 투정을 부렸고,여당은 여당 유세의 청중 수를 부풀리지 않는다고 박해했다.그 바람에 정보부에 끌려가 여러번 물리적 가해를 당했다.진철수는 1974년 동아일보에서 퇴사한 뒤 이듬해 도미했다.”
-왜 동아일보를 그만 두셨나요.
“1972년과 73년 유신체제에서 언론 보도와 관련,정부 기관에 부당하게 연행 구금되고 문초를 당했습니다만,회사는 자진 퇴사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동아일보 뉴욕판 편집국장,MBC-TV순회 특파원,시사저널 창간 에디터와 파리특파원,문화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했다.
그의 언론 경력에서 53년의 역사를 가진 전 현직 언론인들의 친목단체인 관훈클럽의 창립 멤버로서 초대 총무를 맡았던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이야기 관훈클럽’은 창립멤버 부분을 59쪽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9개월 남짓의 준비기간을 끝내고 젊은 기자들은 마침내 관훈클럽의 발족을 선언하고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1957년 1월11일 관훈동 하숙집에서였다.이것은 역사적 출발이었고 이 날은 훗날 클럽 창립일로 자리매김된다.참석자는 모두 열네 명으로 김보성,김용구,김인호,박권상,박중희,이경성,이규현,이시호,이정석,정인양,조세형,진철수,최병우,홍성원이었다.나흘 후인 15일에는 열세명이 또 모였다.참석자는 김보성,김용구,김인호,노희엽,민병구,박권상,박중희,이광표,이시호,임방현,정인양,진철수,홍성원이었다.이날 창립 멤버가 결정됐다.발기인 총회에 참석했다가 15일 회의에는 불참한 이경성,이규현,이정석,조세형,최병우 다섯명과 이날 모인 열세명을 합쳐 열여덟 명을 창립멤버로 정한 것이다.”
이어서 진철수 회우가 초대 총무가 된 사실과 대학시절 연극활동을 하고 노래를 잘 불렀으며 영어에 능통하다고 63쪽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초대 총무는 진철수가 맡았다.(중략) 성격도 원만하고 열성이 있었으며 영어도 잘하고 나이도 선배격이어서 안성맞춤이었다.진철수는 서울대 재학시절 연극반으로 활동했다.목소리가 좋은 데다 노래까지 잘해 아직까지 그가 부르던 가곡을 떠올리는 (관훈클럽)회원들이 많다.독일 프랑스 가곡에도 능했던 진철수는 조지 거쉬인이 작곡한 ‘서머 타임’을 즐겨 불렀다.진철수는 특히 영어를 잘 했다.회원들은 한결같이 그의 수준 높은 영어 실력을 칭찬한다.미국 연수 때는 현지 대학교수들도 거의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연극을 하셨습니까.
“대학 2학년때 ‘여인’ 소극장 멤버였어요.리더는 영문학자 오화섭씨(1916~1979)의 부인으로 와세다대학 출신의 한국 최초 여류 연출가였던 박노경씨(1912~1950)였구요.6 ․25가 일어나 그만 두었는데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연극을 계속했을 겁니다.”
요즘 한국 언론을 어떻게 보는지,여쭈어 보았다.
“팩트(fact)를 중시해서 사실보도를 해야 할 텐데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요.균형감도 떨어지구요.그렇다 보니까 그 임팩트가 심각해요.2년전 서울 촛불시위 를 둘러싼 보도결과가 그 단적인 예입니다.보도내용이 판단을 오도하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무너뜨립니다.대단히 위험합니다.언론보도는 논리적 판별을 도와줘야 합니다.한국 신문의 경우 1면 제작에 내신 비중이 아주 높은데 그같은 편집도 문제입니다.말로만 국제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싣는 것도 문제구요. 1면의 소중함을 알고 스페이스 배정을 잘 해야 합니다.아젠다 세팅(의제 설정)이 중요해요.미국 언론에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가 아젠다를 설정하면 다른 모든 매체는 거의 그대로 따라 오는 경향이 있어요.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그래서 권위지의 평가를 받는다고 봅니다.”
효암 이정석(1932~2008) 추모문집 ‘거인의 작은 이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90년대 시사주간지의 파리 주재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시간이 남아서 파트 타임으로 라디오 시사해설을 하고 싶었을 때 이정석씨에게 부탁하여 KBS‘생방송 오늘’프로에 참여,제1라디오의 와이드 프로와의 인연은 그후 여러해 동안 계속되었다.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독자들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은 기자들의 본분이다.그러나 그 본분을 지키지 못하게 방해하고 억압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한 용기있는 언론인들의 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민주화한 오늘의 언론상황을 고맙게 여기며 건전한 언론발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사람들이 이정석씨 같은 인물들의 발자취를 소중하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문화일보 객원논설위원으로 기고한 칼럼 등으로 위암 장지연상(언론부문)을 받았다.
워싱턴 근처 메릴랜드주의 실버스프링에서 부인과 살고 있다. 2남2녀의 4남매 밑으로 8명의 친손,외손이 모두 미국에 거주,다복한 일가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