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들조차 한국 근대 신문의 역사와 영어신문의 역사가 같다고 하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1896년 독립협회의 서재필이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은 순한글신문을 발행하면서 영문판을 동시에 발행하여 2국어신문으로 태어났다.
영문판 내용은 한글판에 없던 내용도 첨가되는 등 초기부터 독립성을 보였다. 독립신문의 영문판 형태였지만 영어신문의 출현을 같이 보는 것은 점차 취재, 편집 등에서 독자적 체계를 구축해 결국 창간 수개월 후에 별개 신문으로 분리발행 되었기 때문이다.
영어신문의 개척자로, 언론인으로 산 일생에 대해 누구보다 긍지를 가지고 있는 전 한국일보 이사 홍순일(洪淳一․ 79) 회우를 만났다. 그는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출발한 후 정치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을 거쳤으며, 한국일보 논설위원, 관훈클럽 총무,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이사장 등 언론계의 공식, 친목단체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떳떳한 삶을 살아라.”가 가훈이다.
―요즘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주 건강하게 보입니다.
▲ 여가가 나면 등산을 즐기는 편인데, 그게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산악회 종신회원입니다. 2005년 초 위암수술을 받았는데 아마도 조간체질로 술을 많이 먹은 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 같아요. 영어신문의 역사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갖고 자료정리도 하고, 기억나는 대로 메모도 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 ‘한국영어신문사’라는 책을 공동으로 집필하지 않았습니까.
▲ 영어신문 역사를 다룬 단행본으로는 처음으로 2003년 말에 출간되었습니다. 다행히 그 책이 2004년도에 학술원 선정 기초학문 분야 우수학술도서가 되어 재판발행지원을 받아 책이 잘 안 팔리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덜었습니다.
홍순일 회우는 약 50년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숱한 업적과 일화, 필화사건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1954년 2월 코리아타임스에 입사하여 1974년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일보에서는 사설과 ‘지평선’ ‘메아리’를 분담하며 6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친정인 코리아타임스로 돌아와 논설위원, 논설주간직을 7년간 맡았다. 모두 34년간 현직에 있었던 셈이다. 현직을 나와서도 코리아타임스에 ‘홍순일 칼럼’ ‘Seoul Perspective’ 등 칼럼을 계속 써 왔다. 나머지 16 년은 독립(independent)언론인으로 필명을 날렸다.
-언론계에는 어떻게 발을 들여놓으셨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서울대 공과대학 조선학과를 나온 것으로 아는데요.
▲실로 우연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한국전 휴전직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유엔민사원조처(CAC) 공보과에 취직하여 보도자료 작성과 번역 일을 돕게 되었어요. 그때 신문을 열독하고 언론인을 많이 접하면서 신문의 ‘마력’에 빠졌던 것 같아요. 민사원조처는 일반인에게는 환도를 전후해 한강 도강증을 발부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선배님은 일찍이 영어에 능통하여 1974년 동남아 각국 정상급 지도자 순방 인터뷰를 하는 등 이 분야를 개척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어떻게 가능하였습니까.
▲물론 서울 주재 각국대사관이나 외국 언론인의 협조를 받아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동남아 국가 중 필리핀이 제일 북쪽에 있기 때문에 마르코스 대통령을 인터뷰하면 도미노식으로 다른 나라도 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적중했습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월남 등 각국 정상들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귀로에 홍콩에서 태풍을 만나 발이 묶였기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월남에 대한 해설기사를 길게 썼습니다. 월남의 티우 대통령을 만났는데 스트레이트 기사는 이미 신문에 내보내고요. 해설기사에서 월남의 현지사정과 관료들의 부정부패, 승려들의 분신, 가톨릭의 정치참여, 사회몰락상을 보도한 것이 당시 유신정권에서 문제 삼아 필화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1974년 10월 15일에 월남사태를 보도 하였는데 1975년 4월 15일에 월남이 패망하였으니 꼭 6개 월 만에 저의 우려가 현실화된 셈이었어요.
―당시 그 기사가 자유언론투쟁의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신체제는 저의 월남기사가 한국 상황을 빗대어 쓴 것으로 간주하고, 장강재사장, 김경환편집국장, 이상우종합편집부장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해 갔습니다. 저는 당시 IOC위원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장기영 사주가 사건이 좀 가라앉은 다음에 귀국하라고 귀띔을 하는 바람에 도쿄에서 20여 일간 체류했습니다. 일본 수상직을 갓 사임한 사토 에이사쿠를 덤으로 만나는 기회로 활용했지요. 결국 약 40일 동안에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을 포함하여 아시아 정상급 지도자 9명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외치며 철야농성에 들어갔고, 마침 동아일보도 서울대 학생 데모사태 보도기사가 촉발되어 ‘자유언론실천선언’(1974년 10월 24일)을 하게 되었고, 이 두 사건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74년 가을 전국적인 언론자유수호투쟁이 전개되었다. 홍순일 회우는 이에 앞서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에 버나드 와이드먼이라는 미국인 자유기고가가 일일 에세이칼럼 ‘Thought of The Times’에 쓴 ‘기생관광’을 풍자한 글이 문제가 되어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이적행위’를 했다는 트집으로 육체적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정부당국은 그를 ‘반유신 언론인’으로 낙인찍고 언론계를 떠나도록 요구하다가 외국인들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태도를 바꾸었지만 결국 그는 1년 지난 74년 7월 코리아타임스를 그만두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월남기사로 인해 필화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 신문기자 노동조합’(American Newspaper Guild)을 소개한 연구논문 ‘미국의 신문조합: 미국 신문노동조합의 성장과 현황’이라는 글을 관훈클럽이 발행하는 계간지 ‘신문연구’(1959년 가을호)에 게재하여 이 방면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대학전공과는 달리 신문에 전념하게 한 계기는 미국무성의 기자교류 프로그램이었다. 6개월로 짜여진 연수내용은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신문학 관련 수강(3개월), 미국 신문 인턴(2개월) 그리고 미국 전역 여행(1개월) 등이었는데10여차에 걸친 이 프로그램이 한국 언론계의 현대화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그는 서베를린 신문연구소 과정(67년), 미국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 펠로(77∼78년)를 지내는 등 연수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어신문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한국영어신문사’도 혼자 쓰려고 했습니다만, 자료정리를 비롯하여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정진석, 박창석 님과 공저로 했습니다. 제 업보와 같은 것이지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독립신문이 발행된 그 이듬해 1월부터 별개의 신문으로 분리되어 발행되었습니다. 함께 발행되던 당시의 지면구성은 한글판 기사 2면, 영문판 1면, 국영문 광고 1면으로 모두 4면이었습니다. 1904년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n Daily News)도 2국어신문으로 발행되었는데 지면구성비는 한글과 영문이 역전되었습니다. 하루 6면 중에서 영문판은 기사와 광고를 합쳐 4면을 차지한 반면 한글판은 2면이었습니다. 아마도 고종이 뒤에서 밀어주면서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략상을 밝히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신문도 창간 1년 후에 국문 영문신문으로 분리되어 따로 발행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어신문 하면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와 코리아헤럴드(The Korea Herald)가 대명사이지 않습니까. 현재는 어떤 영어신문이 있는지요.
▲아시다시피 양대 신문과, 그리고 중앙일보에서 발행하고 있는 중앙데일리(JoongAng Daily)가 있습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nternational Herald Tribune)과 같이 배포되고 있지요. 일본도 인쇄매체로 발행되는 영어신문은 서넛 정도입니다.
―혹시 자녀분들 중에 언론계에 진출한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본인들이 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저로서도 하도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해서인지 권하고 싶지는 않았지요. 남매를 두었는데 큰딸(承希)은 시집을 갔고, 사위(徐昇煥)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현재 연세대 경제학부교수로 있고, 아들(鎔杓)은 옥스퍼드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뒤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손자는 어리지만 외손녀는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연수 중입니다.
―후배들에게 조언이라도 한 마디 해주십시오.
▲하버드 대학 연수 중에는 통일문제를 놓고 세미나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역시 통일문제를 슬기롭게 풀어가야 하는 것이 다음 세대에게 넘겨진 책임인 것 같습니다. 요즘도 좌우대립이 심각 합니다만 언론인이나 지도층들은 중용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해방공간이나 6․25전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에 걸맞는 정치사회 풍토와 문화를 갖추기 위한 질적 향상이 필요합니다. 결국 한 인간도 그렇지만, 나라도 주체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홍순일 회우는 홍종우(洪鍾宇)와 최진숙(崔眞淑)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재 동갑인 부인 김금순(金今順)여사와 분당 금곡동 헤리티지 아파트에서 내외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글 박정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