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5일 서울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海葦 尹潽善(1897~1990)전 대통령 20주기 추도식이 열리고 있었다. 단상 강연대에 한 노신사가 다가섰다. ‘청와대의 5 ‧ 16 아침’이란 제목의 윤 전대통령 추모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강연대 옆엔 단아한 모습의 해위 대형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그는 강연 원고를 작성하는 등 추모 행사에 대비하느라 며칠을 긴장 속에 바쁘게 보내야 했다. 강연을 앞두고 웬만한 약속은 모두 뒤로 미루었다. 49년 전 1961년 5월 16일 새벽 이후 5 ‧ 16 정변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의 뇌리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추모 강연은 당초 30분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어제 일만 같았던 5 ‧ 16 당시를 되돌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1시간 가량이나 걸려 강연을 끝냈다. 강연 내내 그의 억양엔 노년의 나이를 무색하게 자신감과 생기가 가득 넘쳐 흘렀다.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격정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金準河 전 강원일보사장.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국회 출입)를 거쳐 5 ‧ 16 당시 윤보선대통령 공보비서관으로 청와대 대변인을 맡고 있었다. 4 ‧ 19 학생혁명 이후 1960년 9월부터 1962년 3월 22일 윤 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대변인을 역임했다. 1930년생. 올해 만 80세를 맞았다.
—평소에도 각종 모임과 행사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시는 등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추모 강연을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 윤 대통령께서 작고하신지 어느 덧 20주기를 맞아 지난 일을 되돌아 볼 계제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특히 윤 대통령께서 5 ‧ 16 군사정변 당시 하신 말씀과 조치 등을 둘러싸고 아직도 많은 오해와 구구한 억측이 떠돌아 다닙니다. 최측근으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산 증인으로서 언제든 기회 있을 때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가야겠다는 게 저의 평소 다짐이어서 마침 이번에 나서게 됐습니다.
—어떤 대목이 사실과 달라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보십니까.
▲ 윤 대통령이 5월 16일 아침에 ‘올 것이 왔다’고 하신 말씀, 쿠데타 진압 반대 여부, 일선에 보낸 대통령 친서 관련, 하야 번의 전말 등입니다.
—그럼 ‘올 것이 왔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 그 말씀을 하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과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거나 ‘장면 총리와의 불화 때문에 쿠데타를 반겨서 하신 말씀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정치 사회 분위기가 극심한 혼란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공개적으로 누가 들으라고 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쿠데타 군인들이 바깥에 와 있다는 비서진의 보고를 받고 나서 혼자 푸념처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좀 목소리가 커서 가까이에 있던 저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으니까요.
—쿠데타 진압을 반대하신 건 아닙니까.
▲ 윤대통령은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측이 제안한 것처럼 쿠데타 군인들의 10배인 한국군 4만명을 동원하면 안보가 위태로우니 후방의 유엔군이 반란군을 진압토록 해 달라고 매그루더 주한미사령관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내정간섭을 우려한 마셜 그린 대리대사의 완강한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윤 대통령의 친서에 ‘피를 흘려선 안 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까.
▲ 나는 그때 대통령의 명을 받아 친서 문안을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1군 사령관과 군단장에게 친서를 직접 전달한 당사자였던 만큼 누구보다 대통령의 친서를 잘 압니다. ‘피를 흘리지 말라’는 문구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5 ․ 16 당시 일선 국군은 쿠데타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으로 양분돼 지리멸렬 상태에 있었고 대통령 친서가 먹혀 들어갈 틈새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윤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해 놓고 이를 하룻만에 번복 했습니다.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었던 가요.
▲ 그게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김용식 외무부차관이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이 하야할 경우 유엔군의 군사원조를 받을 법적 근거를 잃게 되며 54개국과 맺은 각종 조약이 무효가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외교관 출신인 비서실장과 법률 고문으로 하여금 김 차관의 설명을 검토토록 지시한바 그들의 의견도 김 차관의 지적 내용과 같았습니다. 결국 대통령은 괴롭고 고달픈 자신의 입장보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보전하기 위해 20일 오후 4시 하야 번의를 발표하게 됐습니다.
—동아일보 기자를 계속했었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청와대 대변인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953년 12월 동아일보에 기자로 들어가서 1960년 퇴사할 때까지 7년 동안 2, 3, 4대 국회 출입기자만 했어요. 그때 이기붕이라든가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윤보선, 허 정, 유진산 등 웬만한 정치인들은 모두 알게 됐습니다. 1959년 3월 15일 이른바 자유당 정권의 3 ․ 15 부정선거가 있었고 그로인해 4 ․ 19 학생혁명이 촉발됐지요. 내가 그 3 ․ 15 부정선거 지령문 원본을 입수, 취재해 대특종을 했습니다. 전국 경찰에 내려 보낸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 지령문 말예요.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전국 경찰에 나의 체포령이 내려지고 회사에서 당분간 피신해 있으라고 해서 처가가 있는 이리로 낚시꾼을 가장해 숨어 들었어요. 그러는 사이 4 ․ 19가 났습니다. 회사로 복귀해 근무하던 중 몇몇 정치인들이 나도 모르게 청와대 대변인으로 나를 추천해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5 ․ 16혁명 이후 윤 대통령이 하야를 한 뒤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한때 취직도 안 되고 여권이 안 나와 해외유학도 갈 수가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구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윤보선 전대통령 안국동 자택에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등 감시와 사찰을 받았습니다. 몇 년 동안 백수로 지내 2남 1녀 아이들 키우며 살림을 꾸려 나가느라 아내의 고생이 많았지요.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공화당이 사전조직을 하면서 나를 끌어들이려 했지만 해위를 모셨던 사람으로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거절했습니다. 그때 나를 포섭하려던 국제정치학 교수출신의 정치인은 “세계 역사상 쿠데타에 성공하고 20년 안에 정권을 내놓은 적이 없다”며 회유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20년 가까이 정권을 잡았던 걸 보면 어쨌거나 지금 생각해도 그의 통찰력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김 회우는 66년 김성곤의 도움으로 동양통신 심사부장과 조사부장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던 신문사 후배 유혁인의 도움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일본 동경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곤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상협의 주선으로 고대에서 3년 동안 PR론과 비교신문론 두 과목을 강의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언제가 가장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때와 역시 신문기자 시절이지요. 대학 교수시절엔 종강 때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좋은 강의를 해주었다며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쳐주곤 해서 아주 가슴 뿌듯했어요. 신문기자 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3 ‧ 15 부정선거 지령문을 특종보도 해 한번에 2호봉 특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입사 1년이 채 안된 올챙이 기자시절엔 독도 현지 취재를 다녀와 등대를 설치해야 한다는 르포 기사를 써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성사됐을 때 느꼈던 보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 강사 후 기업인으로 변신, 우풍화학 사장을 시작으로 동부그룹 계열사 가운데 5 군데 사장을 거친 뒤 강원일보 사장을 끝으로 CEO 자리를 마감한다. 그 뒤 2년 임기의 대한지적공사 감사를 두 차례 역임하고 98년 은퇴했다.
—연세에 비해 건강해 보이시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 매일 새벽 망원동 집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1시간 가량 걷기 운동 등을 하고 비가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엔 집에서 러닝 머신 운동을 해요. 그리고 가급적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려 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동아일보 정치부기자 출신 모임을 비롯해 국회출입 기자모임, 매월 24일의 2 ‧ 4 모임(1958년 12월 24일 자유당 정권이 국회에서 경위권을 발동,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사건. 2 ‧ 4파동 때 국회출입 기자 모임), 동경대와 배재중 동창 모임 등 정례 모임 외에도 친지들을 많이 만나러 다녀요. 배재중학 65회 졸업 동기동창 1백80명 가운데 생존자가 3분의 1이 채 안 돼요. 중학교 동창 모임엔 많이 나와야 30명을 넘지 못합니다. 일요일엔 아내와 교회에 나가고 수요일마다 성경공부를 하러 갑니다.
—용돈이 많이 들어가겠습니다.
▲ 6 ‧ 25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여서 7월부터 한달에 12만원을 받아요. 그전에 5만원부터 시작해 7만원, 9만원으로 올랐다가 12만원이 됐어요.
김 회우는 2남 1녀 슬하에 5명의 손자와 손녀를 두고 있다. 인터뷰 도중 부인에 대한 각별한 배려의 자세를 보여 노후의 부부애가 남다르다는 사실을 엿보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