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동안 언론 실무와 이론 분야를 넘나들며 언론 외길을 걸어온 원로 언론인. 신문기자, 논설위원, 신문사 사장, 방송단체장으로 언론 현장에서 35년을 보냈다. 언론연구원 임원과 대학 전임교수 10여년에다 신문사 근무를 하면서 7개 대학에 겸임교수로 출강 한 햇수(15년)를 포함하면 언론 이론 전수를 위해 강단에 선 기간도 25년을 헤아린다.
13년간 영자신문 편집을 하면서 서구의 선진 편집기법을 도입, 신문편집의 불모지 상태였던 1950~60년대 한국신문에 편집체계의 틀을 잡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언론진흥재단 전신인 한국언론연구원 발족 준비요원으로 참여한 것을 비롯, 전남일보 창간의 산파역으로 초대사장을 역임했다. 광주대학교에 언론전문 대학원 설립인가를 받아 초대 원장을 지냈다. 케이블TV방송협회 회장을 맡아 외환위기로 빈사상태에 빠졌던 유선방송업계를 기사회생시켰다.
언론이론을 쌓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연세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논문은 ‘한국신문의 구조적 성격에 관한 연구’. 독일 베를린, 미국 컬럼비아대, 일본 동경대학교의 신문연구소에서 각각 소정의 연수과정을 밟았다. 저서(8권)와 번역서를 합쳐 12권의 저술과 80건의 언론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崔鍾洙 회우. 올해 팔순이다. 9월 17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서울 시니어스 가양타워 자택을 방문, 인터뷰를 했다.
—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이시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가벼운 등산을 자주 합니다. 요즘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주로 북한산 진관사 쪽으로 갑니다. 시니어스 타워 안에 있는 헬스 장에서 운동을 하구요. 술 담배를 안 하고 판소리를 즐겨 부릅니다.”
—판소리를 언제 배우셨습니까.
“언론계 은퇴후 2004~7년에 국립극장 문화학교에서 박송희 명창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직접 장구를 치며 판소리 일부를 들려 주었다. 80세 노인 목소리치고는 힘과 패기가 넘쳐 흘렀다.
—시니어스 타워에는 언제 입주하셨나요.
“2008년 3월입니다. 36평형 아파트인데 4억8천만원에 분양을 받았습니다. 하루 세끼 식사를 관리소 측에서 유료 제공합니다. 음식을 안 만들고 설거지를 안 하니 편합니다. 수영장과 사우나가 달린 헬스장과 의료시설, 당구장, 바둑실 등 각종 취미 생활 공간과 휴게실, 아트 홀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던 날 저녁7시 아트 홀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합창단 멤버로 참가하기 위해 오후 3시에 리허설을 한다고 했다. 부인은 미술동호인회에 가입, 여가 활동을 한다.
— 여유 자금이 있어야 입주 할 수 있겠네요. 한 달 비용은 얼마나 듭니까.
“아파트 평수와 가구별 씀씀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희는 한 달에 관리비로 평균 1백50만원 가량 냅니다. 하루 두끼 정도 식사를 합니다. 입주자는 한 끼에 1인당 6천원입니다. 관리비에 포함됩니다. 저희의 경우 관리비의 약 절반은 부부의 두끼 음식값이 차지하는 셈입니다. 헬스 장 이용은 1인당 월 6만원이고 수영장을 이용하려면 1만원을 추가하면 됩니다.”
— 올해 책을 3권이나 내셨는데…
“그동안 써놓았던 책들입니다. 집안 내력에 관한 책 2권과 여행기 1권입니다. ‘학은(鶴隱․ 할아버지 호) 가문의 가승보(家乘譜)’ ‘수성(隋城) 최씨의 뿌리와 줄기’ ‘80 노부부 동유럽을 가다’가 책 제목입니다. 부부 합작 수필집을 내려고 준비 중입니다.”
전남 무안 태생. 목포 중 고등학교와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1956년 한국일보 기자 수습4기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수습 후 당시 외신부장인 洪承勉씨가 외신부로 발령내 2년간 외신 기자로 일했습니다. 崔秉宇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이 권유해 한국일보 자매지인 코리아 타임스로 옮겨 편집부장, 부국장을 지냈습니다. 최 국장은 대만 금문도에 특파돼 취재 중 순직했죠. 영암 출신으로 부친이 저의 부친 친구입니다.”
1972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돼 81년 신문사를 떠날 때까지 사설을 썼다.
— 26년이나 몸담았던 한국일보를 왜 그만두셨습니까.
“문공부에서 언론연구원을 설립하는데 누군가가 저를 설립요원으로 추천했습니다. 갈 마음이 없었지만 언론인 자질 향상을 위해 내가 그동안 공부해 온 지식을 전수해 보자는 욕구가 생겨 전직을 결심했습니다.”
— 연수, 연구 담당 이사를 차례로 지내셨는데 연구원은 왜 그만두셨습니까.
“어느 날 임원들에게 일괄사표를 내라고 해요. 문공부 지시가 있었던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사표는 모두 반려하고 저만 수리하더군요. 정부 산하기관 임원으로 정부 비판을 많이 하는 저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 같았어요.”
— 전남일보 초대 사장이 되신 얘기를 해주시죠.
“연구원을 나와 광주대학교에 정교수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훈동 조선내화 회장께서 지방 신문을 하나 만들어 보자고 제의를 하시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내고향에 좋은 신문을 하나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 다시 언론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장 퇴임 후 한국종합유선방송위원회 위원(객원)으로 있으면서 광주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언론대학원 설립 인가를 받아 초대 원장이 돼 1997년까지 대학에 몸담았다. 1998년 金大中대통령 집권 직후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추천으로 회장에 선임돼 3대 회장으로 4년 임기를 마치고 은퇴했다.
언론인 朴權相 회우는 ‘崔鍾洙 언론반세기, 전남일보 창간 비망록’제목의 책 앞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발췌)
“그가 감수성이 강한 청년기에 영자지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전쟁이 멎은 50년대 중엽에 비로소 미국식 저널리즘이 이 땅에 싹트기 시작했는데 변화와 개혁의 통로는 외국통신, 뉴욕타임스 등 선진국 언론을 열심히 읽고 배우는 것이었다. (미국식 저널리즘으로의) 변화와 개혁의 문을 여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車培根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최종수 언론 반세기’에서 “鶴山 崔鍾洙 박사의 업적은 우리나라 신문편집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1978년 펴낸 한국신문편집론은 신문편집에 관한 체계적 이론서로서 각 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교과서로 널리 사용했다”고 밝혔다.
—언론인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와 아쉬웠던 일은 무엇입니까.
“한국 신문편집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역할을 한 점을 큰 보람으로 여깁니다. 저는 본래 소설가가 되려고 했습니다. 사회실정을 알기 위해 사회부 기자를 원했는데 그게 제대로 안 돼 아쉽습니다.”
— 언론계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언론인들을 꼽는다면…
“張基榮 사주, 洪承勉, 崔秉宇, 宋建鎬, 趙世衡, 朴權相, 趙庸中 씨 등입니다. 趙世衡 씨는 관훈클럽 총무를 두 차례 지냈습니다. 1977년 23대 때 저는 편집위원을 했습니다. 신영연구기금을 조성 설립한 것도 그 때입니다.”
— 요즘 한국 언론을 어떻게 보십니까.
“종합신문 조간 한 가지를 구독하는데 날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정독하는 편입니다. 편집이나 글 솜씨는 좋아졌습니다. 읽을 거리도 많구요. 그런데 언론으로서 비판 정신이 약해 신문 다운 맛이 없어요. 흥미가 좀 떨어집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밤 11시 취침한다. 학교 동문 들과 자주 어울리고 대한언론인회와 관훈클럽 모임에 자주 나간다. 판소리 모임에도 들른다. 수성 최씨 호남종친회장과 한국 케이블TV방송협회 고문으로 있다. 부친 고 崔泰周씨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국가유공자. 최 회우는 광주학생운동 유공자 후손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부인과 1녀2남 밑으로 5명의 손자 손녀를 두고 있다. 동갑내기 부인 孫仁和 여사는 교직생활을 거쳐 40년간 출판사에서 근무한 도서 편집 전문가. 화가와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창작 동화 ‘으악 도깨비다’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80노부부 동유럽을 가다’ 여행기는 부부 합작품. 최 회우가 글 쓰고 부인이 사진 찍고 스케치 했다. 서울대와 미 브라운대학원을 졸업한 딸은 대학교수(미생물학 전공), 큰 아들은 공기업 간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작은 아들은 사업을 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