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 전설적인 게이트 키퍼’ 權度洪(78) 선배. 산수(傘壽)를 앞두고 있으나 젊은날보다 안광(眼光)이 더 형형(炯炯) 하다.
權선배는 지난 4월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 제하(題下)의 자전(自傳)을 나남출판사에서 냈다. 책의 부제도 ‘권도홍 편집기자 자전’ 이다.
이 책에 올린 이력도 눈길을 끈다. 부산일보에서 시작해 동아일보에서 끝난 기간이외의 활동은 적지 않고 있기 때문 이다.
특히 후기에 “55년 12월 8일 부산일보 입사일에서 75년 3월 27일 동아일보 해임일까지 만 20년의 신문기자 세월은 내 살아온 세월의 4분의 1에 불과하나 내 삶의 핵 이다. 그 중에서도 편집기자 10년은 핵 중의 핵이다”라고 명백히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權선배는 편집기자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편집기자는 어느 의미에서 순간의 승부사다. 순간적으로 기사 제목을 정확하게 뽑아야 하고 내용을 한마디로 전달할 수 있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어휘들을 선택해야 한다. 특히 편집기자가 뽑는 제목의 크기에 따라 기사의 경중(輕重)이 결정되고 지면의 숙성도란 것도 독자들이 기사 배열이나 제목 등 편집자의 손끝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 이다.
權선배는 한때 기자 생활을 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글을 든다.
“꼭 맞는 단어와 거의 정확한 단어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The difference between the right word and almost right word is the difference between lightning and lightning bug.)”
편집과 관련한 權선배의 일화(逸話)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유신시절을 전후하여 동아일보의 편집을 맡았던 權선배는 당시 ‘자유언론 실천과 수호’를 위해 감내하기 힘든 불이익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언론 정도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바쳤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정보부에서 그 숱한 금품 회유나 협박, 나아가 사장의 입을 빌린 지시마저 權선배는 단호하게 뿌리쳤다. 기사의 취사 선택은 오로지 언론의 정도를 지키겠다는 양심에 따라 결정 했다. 그때 우리들은 그런 현장들을 목격 했다.
연락을 드리고 가회동 집으로 찾아갔다. 서가 앞 벽에는 유신시절 그렇게도 핍박 받던 천관우 선생의 흑백사진 두 장이 걸려 있어 權선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아래에 權선배가 직접 세로 두 줄로 단정하게 쓴 다음과 같은 글이 눈길을 멈추게 한다.
‘梅花不怕寒 眞金不怕火(매화는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쇠는 불을 겁내지 않는다)’
-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나의 하루는 정해져 있어요. 책 읽고 글 쓰고 운동하며 보내요. 아침 5시에 일어나면 내가 개발한 요가로 하루를 시작하지요. 아래 위 이빨을 부딪치는 고치(叩齒)를 36번 한 뒤 양손을 50번 정도 비벼 뜨겁게 한 뒤 눈가의 뼈에 갖다 대고 마사지를 2, 3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와 눈이 아주 건강해져요. 이어 작은 해서체로 붓글씨 1백자 이상을 매일 씁니다. 그리고 간단히 아침을 떼우고 롯데 헬스장으로 가서 운동을 해요. 나는 하루 1천 2백 칼로리 이상을 먹지 않습니다. 점심을 들고 집에 와 오후 1시쯤 낮잠을 1시간 정도 잔 뒤 독서와 집필을 하지요.”
權선배의 집은 거실은 물론이고 3개의 방과 심지어 부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이 책으로 꽉 차있다. 중국책과 일본책 그리고 국내본이 제자리에 깔끔하게 정리 정돈 되어 있다. 놀라게 하는 것은 장식적 의미로 꽂혀 있는 책은 없고 거의 한 번 이상 읽은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 된다.
예를 들어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구당서(舊唐書) 등 중국에서 발간된 각종 서적들의 중요한 대목에는 읽으면서 직접 달아놓은 꼬리표들이 정연하게 붙어 있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현관 옆방 벽면들을 꽉 메운 중국 서화(書畵)와 건강 관련 책들이다.
- 중국의 서화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중국의 서화는 ‘진짜와 가짜’의 역사지요. 예를 들어 왕희지 글씨를 후세의 누군가 그보다 잘 쓸 수도 있겠지만 그 밑에 왕희지 이름을 쓰면 가짜 아니겠습니까. 중국 서화는 이처럼 진짜와 가짜가 서로 발전해 온 것이 서화사죠. 청나라때 조선 사람으로서 당시 전매품이었던 소금 영업을 해 큰돈을 벌었던 안기(安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 서화에 관심이 많아 그때까지 내려오던 중국의 대표적인 서화들을 모아 ‘조선국인’ ‘안기’라는 도장 두 개를 만들어 진품인 경우 찍었습니다. ‘안기’라는 도장이 있으면 진품이라는 보증을 받았어요. 나는 앞으로 몇 권의 책을 쓸 계획인데 제일 먼저 쓰고 싶은 것이 중국 서화사입니다.”
- 옛날로 되돌아가 보지요. 어떻게 해서 편집기자가 됐습니까?
“처음 신문사에 들어갔더니 경찰기자를 하라고 해요. 그러나 나는 편집기자를 한다고 했어요. 모두들 이상한 눈으로 봐요. 용돈 생기고 환경도 좋은 취재기자를 안한다고 하니 모두가 이상한 눈으로 볼 수 밖에요. 나는 그때 편집기자가 되면 단번에 일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어요. 물론 남의 정보를 빼내는 취재가 자신 없었고요. 그 후 나는 편집기자가 나의 자리라는 걸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편집에 대한 나의 열정은 웬만한 기자는 따라올 수 없다는 자부심이랄까 자긍심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으니까요.”
- 편집기자하면서 기억에 남는 얘기가 있으면 좀 해 주시죠.
“내가 동아일보 입사시 최두선 사장 때였는데 한 번도 기사를 빼고 넣으라 지시한 적이 없었고 인품을 갖춘 참 훌륭한 사장이었어요. 동아일보때 한 가지 얘기를 하면 3선 개헌안이 통과되던 1969년 9월 13일 나는 편집기자 몇하고 밤 8시경 그 현장을 목격했어요. 돌아와 호외를 발행하면서 ‘개헌안 공화 변칙처리’라는 제목을 뽑았지요. 중앙정보부에서 ‘변칙’이라는 단어를 빼달라고 하여 ‘안된다’고 잘라 말했어요. 그런데 호외재록 첫 판 작업때 사장이 국장을 통해 ‘변칙 처리’를 ‘변칙 통과’로 고치라는 지시를 했으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0월 14일 동아일보 6면에 정보부에서 동아일보 기사처럼 만든 전면기사 광고를 실었습니다. 게재되기 나흘 전 광고부장이 찾아와 문제의 정보부 기사 편집을 부탁하길래 거절했는데 광고 게재일 하루 전 K신문 이모부장이 동아일보 문선부에서 조판하는 걸 제가 본 겁니다. 광고를 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같이 편집된 광고를 독자들에게 광고라는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급하게 그날 1면에 2단 박스를 만들어 6면이 전면광고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렸습니다. 얼마가 지나 당시 부사장이던 김상만 사주가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와 불러요. 갔더니 1면에 안내 박스를 만들어 넣음으로써 유럽에 나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역시 동아일보’라는 말을 들었다는 칭찬을 하면서 금일봉을 주었지요.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70년대 초 정보부 서울분실장이 만나자고 해요. 갔더니 극장표라고 하면서 봉투를 줘요. 열어보니 수표가 들어있어 던져주고 나왔어요. 이런 것을 거부한 것은 나를 방어하고자 하는 수단이라면 수단이었어요.”
- 사장 지시까지 거부했던 용기는 어떤 믿음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렇게 기를 쓰고 하극상까지 마다하지 않은 것은 동아일보가 그 이름에 대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나를 당당하게 만들었어요.
요즘은 조 중 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누가 뭐래도 동아일보 였습니다. 이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화두는 나에게 강박관념으로 작용 했습니다. 아무리 폭압적인 정권이라 하더라도 해서는 안될 일을 할 때는 적어도 동아일보만은 명운을 걸고 비판을 해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믿음이지요. 이름은 허명(虛名)이어서는 안되고 이름값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죽어야 산다는 논리죠.
나는 사장 지시를 여러번 어겼어요. 사장 지시는 대부분 정보요원이 전화로 압력을 가할 때 안된다고 거절하면 곧바로 지시라는 형태로 다시 하달되곤 했지요. 내가 한 행동이 모두 옳았을까 하는 반문도 했지만 적어도 나는 이름값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믿음에서 단호하게 거절한 겁니다.
옛말에 삼군의 장수는 사로잡을 수 있어도 한낱 사내의 뜻은 뺏을 수 없다는 말을 곱씹었습니다.”
- 유능한 편집기자는 경험에 비춰볼 때 어떤 요건들을 갖춰야 합니까?
“신문기자는 보통 3C를 얘기 하지요. 정확(Correct), 간결(Concise), 명백(Clear).
편집기자는 여기에 3C가 플러스 되어야 해요. 즉 중요한 대목의 선택(Choice), 매력적인 제목(Charm), 스피디한 도전(Challenge).
이를 위해 꾸준한 독서가 있어야 하고 시심(詩心)에 입각한 언어감각이 뛰어나야 하고 미적 설계 능력을 키워야 하며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신문 편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에 앞서 뉴스 밸류를 정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뉴스 밸류는 여러 각도에서 측정하는 겹눈(複眼) 평가가 필수적인데 넓고 깊은 독서력이 뒷받침 되어야 해요. 독서력이 바로 식견(識見) 입니다.”
- 얘기를 바꿔서 편집에서 손을 떼신 뒤 강산이 몇 번 바뀐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요즘 신문 편집에서 어떤 것을 느끼십니까?
“앞에서 편집에 대한 여러 얘기를 했지만 요즘 신문 편집은 맥이 빠져 있어요. 혼이 없어요. 보세요, 어떤 제목은 40자나 되잖아요. 나는 제목의 글자수가 어떤 경우라도 15자를 넘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기사인지 제목인지 알 수 없는 제목들이에요. 제목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은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얘깁니다. 마치 기사를 쓴 기자가 제목을 달아놓은 것 같아요. 편집기사는 신문제작과정에서 구심적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구심점은 고사하고 원심적인 역할 밖에 못하는 것 같아요.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일반기자들도 전문성과 소신이 있어야 해요. 특정 이슈가 터졌을 때 신문 2페이지는 자기 분야의 글을 쓸 수 있는 전문성을 갖고 있어야 해요. 요즘 신문은 옛날에 비해 부피는 커졌지만 내용의 밀도는 약해졌다고 봐요. 그것은 전문성이 약하고 정확성이 떨어져 생긴 결과입니다.
덧붙여 한 마디 하면 기자가 다른 분야로 점프하기 위해 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정계에 뛰어들기 위해, 출세를 위해 기자를 한다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언론계에도 큰 폐해를 주게 되겠지요.”
- 글씨 솜씨가 보통 아니신 것 같은데 언제부터 시작 했습니까?
“중학교 여름방학때 위의 두 형이 글씨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했어요. 75년 3월 27일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 농성에 가담하여 해임된 뒤 주부생활 부사장으로 가면서 퇴근 후 글씨 연습을 다시 시작 했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요즘 매일 아침 해서체로 최소한 1백자는 연습합니다. 중국의 시부(詩賦) 등 좋은 글들을 골라 쓰면서 외우고 또 음미하면 즐겁습니다. 붓을 잡으면 모든 것을 잊습니다. 이런 것을 삼매경(三昧境)이라 하던가요.”
權度洪 선배의 편집기자 생애는 언론의 정도와 함께한 아름다운 자기 희생의 역사다. 그것은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마음이 초래한 고귀한 희생 이다.
나는 최근 ‘가치 있게 나이 드는 법’이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야망이나 출세를 하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 사명감이다. 사람이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는 사명감이다. 사명감은 각자의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면서 최종 목표에 도달하게 한다.”
독서하고 집필하며 운동으로 건강을 챙기는 權선배야말로 멋지게 노후생활을 엮어나가시는 분이라는 부러움 마저 느끼게 한다. 權선배가 매일 애송한다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 몇 구절을 옮겨본다.
‘청춘이란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세월은 주름살을 더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은 시들게 하지 못한다/ 영감이 끊어지고 냉소와 비탄에 빠진 사람은 이십 세라도 늙은이 이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팔십 세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