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은 인간 삶의 근원이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집을 짓고 흙으로 그릇을 빚어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흙과 불로 아름다움을 빚는 자기(瓷器)도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다. 흙에서 태어나 뜨거운 불가마에서 예술작품으로 거듭났다가 언젠가는 부서져 흙으로 되돌아간다.
반 백년 언론 외길을 걸으며 열정을 불태웠던 박기병(朴基秉․78) 회우는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하얀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백자(白瓷)같은 순백의 삶으로 돌아왔다. 박 회우가 소장해 왔던 방산자기를 그가 태어난 고향 강원도 양구에 기증하여 ‘양구방산자기박물관’ 설립의 계기를 만들었다. 지난 11월 17일 오후 춘천에서 상경한 박 회우를 언론인회사무실에서 만났다. 백자처럼 담백하고 소탈하게 스스로의 삶을 풀어냈다.
-귀중한 도자기를 기증하게 된 동기는?
“2003년 당시 임경순 양구군수가 저희 집을 방문해 방산자기를 군에 기증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야 문화재청 등으로부터 예산지원을 받아 박물관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귀중한 유물을 보관할 박물관 건립 명분을 얻고자 한 것이지요.
-몇 점이나 기증했는지요?
“57점입니다. ‘양구방(楊口方)’ 글자가 새겨진 청화백자항아리와 그림이 없는 수백자(壽白瓷), 아가리는 넓고 밑은 좁은 푼주, 제기(祭器), 백자병 등이지요. 일선기자 시절과 언론사 경영인으로 일하면서 고향에서 생산된 유물을 접할 때마다 구입했던 것들입니다. 중국 옌볜에서 수집한 것도 있고요.”
방산도자기 57점 기증
-양구방산자기박물관은 언제 개관했나요?
“ 2006년 6월27일 개관했어요. 총 48억원을 들여 550여 평의 부지에 연건평 183평 규모의 지상2층 건물로 세웠습니다.”
방산백자도요지였던 양구군 방산(方山)면 장평리에 건립한 방산자기박물관은 장작가마, 가스가마 등을 갖춘 도자기체험장과 시청각 교육자료를 상영하는 영상실, 도자기 기념품을 판매하는 뮤지엄 숍 등을 갖췄다.
-양구 방산을 백자의 고향이라 주장하는 근거는?
“양구 방산지역에는 600여년 간 도자기를 구워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요지가 있다는 게 확실한 증거지요. 방산면 장평리 일원에서 도자기 가마터 40곳을 발굴했습니다. 전문가들은 30여 곳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흔히 백자의 고향은 조선조 사옹원의 분사인 분사옹원(分司甕院)을 줄여 이르는 경기도 광주의 분원이라 알려져 있지만, 양구에서 나는 방산 백토를 연간 510석(1석=144kg․ 20말)이나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실어 날라 백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자는 양구 방산(方山)일대에서 고려 말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양구는 백토의 매장량이 많고, 불가마에 지필 땔나무와 물이 풍부하여 도자기 제작의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고 강조한다.
양구 방산자기 가마터는 고려시대부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까지 질 높은 백토로 각종 도자기를 대량 생산, 전국 각지로 보급했던 곳으로 알려져 왔다. 지난 1932년 강원도가 금강산소방도로 개설 당시 월출봉에서 발견한 태조 이성계발원사리구(李成桂發願舍利具)와 백자대발(白磁大鉢) 등 4점의 유물에 제작자가 방산면 금악리 사기장(砂器匠)으로 기록돼 있어 도요지의 역사적 사실이 입증됐다. 박기병 회우는 지난 2007년 양구방산자기박물관 명예관장에 위촉 됐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fms다고 한다.
-소장한 도서를 춘천교대에 기증했다는 데….
“그동안 모아두었던 도서 3,000여 권을 모교인 춘천교대에 기증했습니다. 국회속기록과 언론연구보고서 신문연구자료 등 언론관련자료와 단행본 등이지요” 그가 기증한 도서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들이어서 그 의미를 더한다. 요즘은 춘천교대발전기금후원회장으로 동문들을 찾아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 배움에 대한 욕구를 풀지 못한 그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건국대학교 행정학과 3년을 수료한 뒤 명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에는 ‘지방화시대 지역방송의 역할’논문으로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기자협회장 두 번 역임
박기병 회우는 1957년 UPI 통신과 계약을 맺고 있던 대한통신 정치부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 뒤 국제신문, 부산일보 정치부장 등 기자생활과 강릉․춘천 문화방송 사장, 한국케이블TV구로방송사장, GTB 강원민방 사장을 마지막으로 2008년 현직에서 물러났다. MBC 홍보조사실장 시절에는 MBC로고를 만들고 TV가이드를 출간했다.
-신문기자와 방송CEO를 두루 거치는 등 반세기 가까이 언론에 몸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반세기에서 2년이 모자라는 48년을 언론 외길에 몸담아 온데 큰 보람을 느끼고, 언론계 각 분야를 고루 경험한 행복한 기간이었습니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GTB강원민방의 산파역을 맡았고, 2년 넘게 애쓴 끝에 첫 전파를 쏘아 올린 2001년 12월15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강원도민들이 주주로 참여해 주는 지원과 성원에 힘입어 방송사가 반석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부기자로 3대 국회 말부터 10대 국회까지 15년 동안 국회를 출입했다. 국회의원들조차 ‘7선 의원’이라고 부를 정도다. 아직까지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그 기간에 10대와 17대 한국기자협회장으로 피선되어 기자들의 권익을 대변했다.
-기자협회 언론인공제회 추진위원장도 맡았는 데 성과는?
“기자들은 남의 문제는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정작 자신의 권익과 복지는 등한시합니다. 공제회는 회원들이 언론계를 떠난 뒤 혜택과 안정을 보장해줄 수 있는 데도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는 1964년 기자협회 창립 때부터 공제회 설립을 주창해왔으며 1974년 기자협회회장 재임 때는 ‘기자복지에 관한 입법 청원’을 국회에 내 통과됐으나 정부로 넘어간 뒤 무산됐다는 일화도 소개한다.
잊을 수 없는 참전전우
-올해는 6․25전쟁 60주년이다. 6․25참전국가유공자로 남다른 감회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춘천사범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습니다. 교생실습 준비를 위해 학교에 나갔더니 배속 장교가 포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부대의 포탄을 나르라고 했어요. 학생들과 함께 남춘천 역에 있는 탄약고에서 포탄을 포진지까지 날랐습니다. 6월 27일 인민군 포탄이 국군 포진지에 떨어지며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피난길에 올랐어요” 휴전시대에 군 복무를 한 병사들의 군대이야기도 장편소설인 데 참전용사의 이야기는 길어 질 수밖에 없다.
국군이 북진하던 그 해 10월 14일, 그는 춘천에서 군번 없는 유격대에 입대했다. 퇴각하는 인민군을 격퇴하는 임무를 띠고 대전차포 1문을 갖고 중대 병력으로 양구지구 전투에 투입됐다. 퇴각하던 인민군이 양구를 포위하자 춘천으로 후퇴했다. 춘천에서 부대 재편성을 위해 머물고 있을 때 포병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12월 17일 동기생 10여 명과 함께 재편 중인 포병 16대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때 받은 군번 0551137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다. 그 뒤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을 누비다가 휴전협정 이듬해인 1954년 10월 10일 4년 7개월에 걸친 군 생활을 마감했다.
-참전용사로 전선을 누비던 가슴아팠던 기억은?
“1951년 인제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였지요. 관대리 앞산 560고지에 전방관측소가 있었습니다. 통신병 근무교대로 내가 관측소에 올라가야 하는데 식중독으로 나 대신 최병림 전우가 올라갔어요. 적의 포로가 돼 영영 돌아오지 못해 아직도 가슴 속 큰 상흔으로 남아 있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정론 위해 정도 걸어야
-일선 부대에서 안보강연을 많이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점호의 자유화 등으로 군기가 많이 약화됐고, 군인정신이 해이해 졌어요. 야간행군에 낙오자가 생길 정도로 체력도 저하됐지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자멸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투철한 안보관과 정신무장을 해 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선 장병들과 군 관계자들의 안보의식 제고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국방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언론계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기자는 정론을 위해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사명감을 가지되 편향된 시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도전정신으로 사물을 다양한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또한 “작은 인연이라도 인간적인 관계를 소중히 할 때 그 인연으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만큼 대인관계를 소중히 가져라”는 말도 덧붙인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그동안 일에 쫓긴다는 핑계로 가장 소중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생활패턴을 만들고 평소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도 많이 하려고 합니다. 하루에 1번 좋은 일하고, 10명과 만나고, 100자를 쓰고, 1,000자를 읽고, 10,000보를 걷는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건강관리는?
“아침 6시께 일어나 뚝방 길을 2㎞ 정도 산책하는 게 고작입니다.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아침식사를 하고 신문이나 독서로 보내지요. 오후에는 그동안 소원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동문들을 만나서 모교후원을 독려합니다. 운동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 필드에 나가는 정도지요”
-주량은?
“지금도 ‘소폭 열 잔’은 거뜬히 마시지요. 젊은이들을 꺾을 수 있는 것이 주량입니다”
솔직담백한 성격에 외유내강형이라고 밝히는 박기병 회우는 긍정적인 사고로 도자기 굽는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았다. 도자기와 도서 등 귀중한 소장품들을 기증 한 뒤 여백의 삶을 누리는 여유가 얼굴에 묻어난다.
부인 李玉姬(71) 여사와의 사이에 1남 2녀. 장남 容奭(47)씨는 병원연구원으로 근무. 장녀 胤淑(49)씨는 LG에 근무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는 주부. 막내 딸 賢淑(42)씨는 일본에 거주. 춘천에서 부인과 단란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