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정을 잡으려고 池龍雨(79) 본회 논설주간 겸 편집고문에게 전화 드렸더니 돌아온 첫 마디다. 등산으로 호연지기를 다지고, 녹슬지 않는 펜으로 정론을 펴는 긍지가 돋보인다. 지난달 20일 저녁, 마포의 한 중국집에서 반주를 곁들이며 치열하게 살아 온 삶의 긴 여정을 들었다. 올해 우리 나이로 팔순이 믿어지지 않는 童顔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 늘 푸른 청춘의 기개를 느낀다.
왕성한 집필 늘 푸른 청춘
-아직도 왕성하게 집필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요?
“언필칭 신문기자를 ‘무관의 제왕’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거창한 칭호보다는 평소 ‘사회의 소금’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소금은 조미료의 차원을 넘어 정권과 사회의 부패를 막아주는 방부제의 역할을 상징하지요.”현역 은퇴 후에도 ‘쟁이 근성’은 여전하다.
요즘도 인터넷 신문인 뉴스 앤 피플 논설주간으로 시론을 집필하고 본지에도 핫 이슈 때면 어김없이 목소리를 낸다. 일그러진 한국정치풍토를 질타하고, 북의 연평도 전쟁도박에 종지부를 찍으라고 분노하며, 국가관과 정체성이 의심되는 진보와 종북 좌파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젊은 후배들과 대작을 해도 2, 3차를 마다 않는 주량을 과시한다.
-신문기자 출발은 다소 늦었지요?
“대학(경희대 영문과) 졸업 후 2세 교육에 헌신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았어요. 그 뒤 학원 영어강사로 자리를 옮겼고 약수동에 문을 연 KEI 영어학원의 대표강사로 한때는 ‘스타강사’ 소리도 들었지만 ‘훈장생활’에 단조로움을 느껴 뒤늦게 경향신문 공채기자시험을 치고 입사(수습5기)했지요. 그 나이 이미 서른 살로 연령제한 턱걸이로 합격한 셈이죠. 동기생 5명 가운데 崔相岏(73) 본회 회우와 두 사람만 생존해있습니다.” 신문기자로 인생의 닻을 내린 그는 “신문기자의 자유분방함과 비리고발의 통쾌함, 권력의 秕政과 맞서 싸우는 용기”에 매료되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회상한다. 입사 후 주로 정치부와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으며 제2사회부장을 거쳐 논설위원과 논설실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언론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1991년)과 경희언론문화인상(2002년)을 수상했다.
-경향신문 역사상 최장기 논설위원의 기록을 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6년 동안 북치고(사설 쓰고), 장구치고(餘滴 쓰고), 춤도 추는(매일 쓰는 신문고) 1인3역을 꾀 안 부리고 묵묵히 해냈습니다.” 그는 논설실장시절 3면에 池龍雨 時評을 3년 동안 매주 거르지 않고 연재한 것도 “생애 최대의 보람이었다”고 강조한다.
-경향신문 간판 칼럼 ‘餘滴’을 가장 많이 쓰셨지요?
“그렇습니다. 단문칼럼인 여적의 묘미는 寸鐵殺人의 시니시즘에 있다고 하겠지요. 그 짧은 글 속에다 역설과 반어, 은유법과 직유, 의인법과 도치법 등 오감을 자극하는 다양한 맛을 내야하고 문장의 감칠맛을 내기 위해 머리를 써야하니 사설 쓰기보다도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걸립니다.” 사설을 잘 쓰는 논설위원도 ‘여적’을 쓰라면 쩔쩔 매기도하고, 객원논설위원으로 위촉된 대학교수들은 논리전개에 있어서 아카데미즘적인 접근으로 저널리즘의 맛을 떨어Em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상한다. 단평 칼럼 ‘餘滴’은 자유당 정권의 비위를 건드려 1959년 경향신문 폐간을 부른 문제의 명 칼럼난이다. 요즘은 기명이지만 당시에는 무기명으로 집필했다.
-정년퇴임 후 정계에도 잠시 몸담았었지요?
“허허. 별걸 다 기억하시는군요. 퇴직 후 촉탁논설위원으로 일하던 1991년 5월이었어요. 30~40대 젊은이 세 사람이 우리 집을 방문해 “왕 회장(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말과 함께 메모쪽지를 전해주고 갔어요.” ‘긴히 상의 할 일이 있으니 계동 현대 본사로 나와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재벌그룹 총수가 왜 나를 만나자고 할까? 궁금증을 갖고 회장 사무실을 찾았다. 첫 대면에 왕 회장은 “지용우 위원님, 우리 함께 일 좀 해봅시다”한다. 그러면서“특별히 할 일은 없어요. 매일 나오셔서 각종 자료나 검토하시고 신문 읽고 글이나 쓰면 됩니다.”
그로부터 세금 없는 월급을 수백만 원씩 받고 정주영 회장과 몇몇 임원들 틈에 끼어 점심을 함께하며 소일하다 마침내 ‘쓰임새(용도)’를 알게되었다. 1992년 1월 ‘통일국민당’이 창당되었고, 엉겁결에 원치도 않은 창당조직에 끼어 들게 됐다. 당내직위는 홍보분과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이었다. 선거전략회의에 참여하고 자극적인 선거구호도 만들어 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중했던 일은 주~월간으로 발간된 ‘국민당보’의 黨說을 쓰는 일이었다. 결국 국민당은 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31명의 당선자(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를 냈다. 이를 바탕으로 정주영 국민당 대통령후보는 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선전했지만 3위에 그쳐 ‘경제대통령의 꿈’을 접어야했다. 당시 지용우 부위원장의 전국구 후보 순위는 24번이었는데, 정주영씨의 낙선으로 7번(탤런트 강부자)까지만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지용우 선배의 아호는 ‘靑石’이다. 푸른 빛깔을 띤 응회암처럼 강직함이 엿보인다. 성격은?
외유내강의 원리원칙주의자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불같던 성격도 세월과 함께 많이 마모되지 않았나 싶다(웃음). 고희를 맞아 출간한 지용우 칼럼집 ‘시대의 증언’에서 具宗書 박사(정치학)는 “지 선배는 공사가 분명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면서도 친화력도 빼어나다”고 평가하면서 도전정신과 모험심을 소개했다. 1970년대 초 국방부 기자단이 미 태평양사령부 초청으로 일본 자위대 군사시설을 둘러 볼 때다. 높이 200m 낙하산 훈련용 철탑 앞에서 일본군 장교가 브리핑을 하면서 농담 삼아 “철탑 꼭대기까지 누가 올라가 보실 분 없나요”하니 “지 선배가 선뜻 자원하여 고공체험을 즐기듯 올라가는 걸보고 놀랐다”고 한다.
최종학력 코오롱등산학교
池 주간의 도전정신과 승부근성은 정년퇴직 후 등산 마니아가 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공대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세대)’가 되어 ‘화백(화려한 백수)’들은 지하철 타고 온천장에 가고, ‘불백(불쌍한 백수)’들은 종묘공원에 가는 65세 때 코오롱 등산학교를 노크했다. 규정상 50세 이상은 정규 산악반에 등록이 안 된다고 하여 ‘예비반’에 가입했다.
독도법 등 기초이론을 배운 뒤 20~30대 젊은이들과 함께 20㎏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산악훈련을 하고 바위벽을 기어오르는 암벽등반을 했다. 4주간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북한산 노적봉에서 ‘졸업등반’을 하던 날, 다른 팀의 남녀 한 쌍이 강풍에 자일이 엉켜 대롱대롱 매달린 채 동사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돈키호테 같은 모험이 아닌가” 후회하기도 했다는 것. 꽤 부리지 않고 젊은이들과 똑 같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 본 등산학교장은 제26기 정규반 코스 수료증을 주었고, 개교 후 최고령 학생의 기록을 깼다.
-뒤늦게 등산 마니아가 된 이유는?
“첫째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이지요. 두 번 째는 마감시간에 쫓기듯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시간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고요. 세 번째는 산이 좋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등산을 통해 사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비지땀을 흘린 뒤 정상에 오르는 짜릿한 쾌감과, 산행 후 마음이 통하는 ‘산꾼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뒤풀이를 하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것. 그는 경향OB산악회장을 지냈으며 요즘도 매월 정기산행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또한 경향신문사우회장을 연임하며 결속력과 친화력을 과시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산행은?
“국내산은 백두대간 종주서부터 제주도 한라산까지 두루 다녔어요. 동남아시아 최고봉인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북단의 키나발루 산(4,101m)은 물론 일본의 ‘북 알프스’라고 하는 다테야마 오난지야마(3,015m),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도 올랐습니다. 중국의 오악 중 선경이라 불리는 황산 트레킹과 지난해 밴쿠버에서 가장 높은 그라우스산(1,231m)을 사위 손자 등과 트레킹 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6․25참전 휴대폰 끝 번호 0625
-지난해 6․25 60주년을 맞아 본회 ‘6․25참전언론인동우회’ 산파역을 맡았었지요?
“지난해 6월25일 발기인 모임을 가졌고, 7․27정전협정 57주년이 되던 날인 7월27일 ‘6․25참전언론인동우회(회장 이혜복)를 발족시켰습니다. 모임의 간사를 맡아 심부름을 했지요.” 참전용사동우회원은 6․25참전용사와 종군기자 등 본회 회원 42명이다. 창립총회에서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규탄하고, 국가 안보관 확립과 국민의식개혁에 앞장서자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6․25참전을 잊을 수 없다”며 휴대전화 끝 번호도 ’0625‘로 선택했다.
-6․25참전 땐 학도병이었나요?
“6․25참전은 극적인 동기로 이뤄졌어요. 38선에서 무력충돌이 빚어진 그 날 오전 대동청년단에서 저희 형(지용순)을 찾아왔어요. 여덟 살 위인 형님은 외출중이었고, 다음 날 다시 찾아왔을 때도 형님이 없다고 하자 그럼 동생이라도 대신 왔다가 가라고 해 별 의심 없이 따라 나섰어요.” 그것이 가족과의 이별이었고, 6․25전쟁 최대격전지인 낙동강전투에 투입되어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투를 벌이게 됐다.
계급장도 없는 급조된 군인이 되어 서울역에서 석탄 무개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수원. 6월 27일 특공대를 조직한다기에 손을 들었다. 북한 탱크가 밀어닥치면 폭탄을 들고 뛰어들어 파괴하는 ‘육탄용사’다. 모의폭탄을 들고 탱크에 부딪치는 훈련을 되풀이했다. 포성은 수원까지 들렸고, 무개차에 실려 다시 남하했다. 7월에 접어들면서 대전 신병교육대에서 목총 대신 M1소총을 지급 받아 본격적인 전투훈련을 받았다. 당시 “탈영한 신병 2명이 잡혀와 감나무 아래서 즉결처분 당하던 끔찍한 장면은 지울 수 없는 악몽이었다”며 몸서리치듯 눈을 감는다. 義城전투를 거쳐 낙동강전선으로 이동하면서 군번 없는 무명용사에서 9200831라는 군번을 받고 수도사단 1연대 1대대 1중대 소속 정규 군인이 됐다고 한다.
-多富洞 전투, 浦項전투와 함께 6․25 3대 격전지로 알려진 安康전투에 참전할 당시는…?
“화력이 총 동원된 전투였고, 적과 아군이 뒤섞여 총검으로 백병전을 치르던 원시적 전투였지요. 심지어 미 공군기가 융단폭탄을 퍼붓는 死地였어요.” 낙동강전투에서 3일만 버티면 고참이 될 정도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보름동안 밀리고 당기는 전투에서 전사자와 중상자만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8월 12일 낮. 빗발치는 彈雨 속에서 옆구리에 총탄을 맞았다. “하반신에 유혈이 낭자하여 이렇게 죽는 구나” 생각했다. 경주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3일만에 깨어났다. 3만여 학도의용군이 참여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피로 지켰으나 북진하는 대열에 는 끼지 못했다. 1951년 1월 12일 부산 389부대에서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장군의 직인이 선명한 대한민국 제1차 명예제대증서를 받고 전역했다. 그의 참전기는 생생한 한편의 전쟁드라마다. “빗발치는 탄우 속에서 살아났으니 그 때 죽었다고 치면 잉여인생을 살아온 셈”이라며 웃는다. 참전 이후 “매사에 담대해졌고, 공부도 전투적으로 했다”고 털어놓는다.
-살아 온 삶의 여정에 후회는 없는가?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다.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쓰고, 달고, 시고, 떫고, 짠 인생의 맛을 겪었다는 池 주간은 ‘인생의 노을도 아름답다’는 자작시 한편을 건네준다. ‘넉넉한 마음으로 인생의 노을을 황홀하게 물들이자’는 리얼리티가 묻어나는 시다.
“늘 곁에서 내조 해줘 고맙다”는 부인 孫惠禎(65)여사 사이에 외동딸 裕卿(36). 사위 崔元昌(43)씨는 사업가로 국내와 캐나다 밴쿠버에서 사업을 하다 4년 전에 귀국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유치원에 다니는 외손자 손녀의 재롱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