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에서 원로 대접은 80세 이상이라야만 받게 되어 있으니 황 회우의 나이를 더 이상 캐물을 필요는 없다.
지난 1월 11일 오후 세종로 프레스센터 14층 대한언론인회 사무실에서 그와 대좌 했다. 벤자민의 커다란 화분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무교동 거리, 드문드문 남아있는 한옥 지붕 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신묘 토끼해에 원로 회우가 되었는데...
하고 화두를 꺼냈더니
“인생의 막차를 탄 셈이지... 그러나 밤에 떠난 막차는 서는 곳마다 종착역이지만 날이 새면 첫차가 되고 종착역은 다시 시발역이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해...”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고 기세가 당당했다.
누가 질문을 해야 하는지? 질문자가 갑자기 뒤바뀐 것 같은 분위기다.
실내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은 늘 이런 사이였다.
본회 부회장을 지낸 황 대연 회우는 신문사에서 꼬박 35년, 언론 관계기관의 근무연한 10년을 보태면 거의 반세기를 언론에 종사한 외길 언론인이다.
또한 그는 문단에도 일찍이 등단하여 틈틈이 소설도 쓰고 때로는 방송작가나 사진작가로도 얼굴을 내 밀었으며 번역서만도 10여권이 넘는다.
이와 같이 왕성했던 창작 활동을 모두 미완의 장으로 남기고 그는 문인에의 꿈을 접고 말았다. 우리들 해방세대가 다 그러했듯이 암울했던 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그도 ‘생존’이란 냉엄한 사회 환경의 두꺼운 벽에 부딪혀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 회우는 “외길 반세기는 후회도 없고 떳떳했으며 다만 작가로서의 꿈은 신문기자의 길을 가기 위해 희생양이 되었을 뿐” 이라고 웃어넘겼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 때문일까... 훤칠한 키에 동안의 그는 항상 해맑고 명랑하다. 80이 다 되도록 그동안 짊어진 무거운 세상의 짐을 내려놓을 생각은 않고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다며 세월의 무게에는 무감각(?)한 이사람! 황 부회장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 시골인 고향에서 유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부터 신문기자의 꿈을 키워 왔다는데....
“나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내가 자란 수북리 마을은 금강이 감도는 곳의 50여 호 작은 마을이었어... 지금은 대청댐으로 수몰이 되어 고향의 흔적이 없지... 나는 이곳에서 유 소년 시절과 사춘기를 보내면서 꽤 많은 책을 읽었었어. 고전은 물론 세계 문학 전집, 시집 위인전 등을 닥치는대로 탐독하면서 문향에 취했었어. 특히 당시 일본의 대작가 기쿠치 강(菊池 寬)의 작품에 심취했었지.
신문기자의 꿈이 싹튼 것도 이때야.
당시 국내의 이름난 작가들이 신문사에 많이 진출하는 것을 보고 ‘작가가 되려면 신문기자가 돼야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거든.....
내가 신문기자가 된 것은 대구에 살고 있을 때인 1959년 대구매일신문의 공채 기자가 된 것이 최초야. 입사 후 나는 이곳에서 정치부에만 10년간 근무한 기록을 세운 끝에 정치부장 대우까지 지냈어..”
황 회우는 이어 대구경제신문 편집부국장, 기획실장, 서울지사장등을 거쳐 75년에는 조선일보로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주간조선에 근무하면서 7년간 주로 특집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이어 황 회우는 82년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新聞) 서울 주재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서 외신기자로 10여년간 근무 한 것을 끝으로 근 40년에 걸친 기자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황 회우는 신문사 외에는 종종 문단에도 얼굴을 내 밀었는데----
“나는 기자 생활 이전에 꿈꾸었던 문인에의 유혹을 전혀 떨쳐 버릴 수가 없었어-- 그래서 종종 그쪽도 엿보았는데 언론인 생활과 양립시키기는 힘들었었지--- 내가 문단에 나선 것은 59년 대구매일 신문사에 있을 당시 대중문예지 ‘소설계’에 콩트 ‘입사보증금’이 추천된 후부터였어. 그후 62년에는 창작 ‘무차원의 존재’ 로 문화공보부와 예총(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이 주관하는 신인예술상 소설부 수석상을 받았으며 64년에는 연속방송극 ‘살아있는 낙엽’ 이 동양방송 개국기념 문예대상을 받는 등 하여 문단에 데뷔한 셈이지--
이중 방송극 ‘살아있는 낙엽’은 1회 30분 물로 30회(한달간) 방송 되었으니 인기는 청취자들의 몫이지만 작가로서는 꽤 즐거웠었지.”
황 회우는 이외에도 수필동인지 ‘에세이 80년대’ (전 6권) 에 많은 에세이를 남겼으며 ‘천안문’ ‘북경의 어느 겨울’ ‘부용진’(芙蓉鎭) 등 10여권의 번역서도 남겼는데 본인은 한사코 이런 활동을 미완의 장으로 끝냈다고 겸손해 하지만 그 바쁜 언론생활의 와중에서 문단에도 상당한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 황 회우가 40년이란 장수현역시절 일선의 취재 현장이나 편집실 등에서 기억하고 꼭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75년 5월부터 82년 5월까지 만 7년간 조선일보 주간부에 근무했었어.
한 부서에서 7년간이나 근속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야.
아무튼 글줄이나 쓴다고해서 유능(?)했거나 무능(?)했던 탓이라고 넘어가자....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40년간에 걸친 기자생활 중에 가장 보람있는 일을 해냈지. 그것은 일제하에서 신학문(新學問)에 몰두하여 평생을 바친 60세 이상 되신 한국 최고의 석학들 50여명의 연구 자전(自傳)을 쓴 것이야. 내가 직접 기획하고 인터뷰 취재해서 집필, 주간조선에 주 1회씩 1년간이나 연재한 기획물 ‘외길 한평생’이야.
이 연재물에 얼른 떠오르는 분은 국어학에 이희승, 국사학에 이병도, 교육학에 오천석, 이론화학에 이태규, 어류학에 정문기 박사등인데 이제는 모두가 돌아가시고 내가 쓴 자전만 남아있을 뿐이야. 이 자전은 1회 원고지 40장 분량으로 학문을 하게 된 동기, 학문에 얽힌 희노애락, 학문과 생애, 그 밖의 여러 가지 후학들에 참고가 될 만한 얘기를 정리하고, 석학들의 학설과 이론을 지면에 펼쳐 나갔어.
이 기획 연재물은 학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고 있어.”
황 회우는 이곳에서 특유의 달변으로 열을 올리더니 목이 마른 듯 커피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 “또 다른 이야기는 없느냐”고 부추겼으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친구야 별도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면 물도 빛이 되는 거라구! 그때 나는 단지 그 물빛이 되었을 뿐이야...!!”
-황 회우와 대한언론인회는 떼어놓을 수 없는 깊은 관계이며 상임이사 시절 많은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대한언론인회 상임이사라는 중책을 맡고 집행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 20일 제 14차 정기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된 후 부터였어. 나는 제12대 회장이 된 전 서울신문 사장 신 우식 회장으로부터 상임이사 제의를 받고 그 중압감에 내심 당황하면서도 회의 운영에 몇 가지의 개선책을 강구했지.
그 첫째는 사무실내의 모든 낡은 집기를 새로 바꾸고 컴퓨터 등 사무용품을 신형화해서 업무의 능률화와 회원들의 분위기 쇄신을 도모했어.
둘째는 회원들의 ‘체력단련’행사와 ‘문화역사 탐방’의 개혁이었다. 해마다 춘추로 시행해 온 이 행사는 그때까지 본회 친목단체인 산악회가 주관해왔었는데 나는 이 불합리성을 시정하여 모든 행사의 주관을 상임이사 중심의 집행부에서 하도록 해서 회 운영의 합리화를 꾀했지.
나는 그 후 본회 부회장과 감사를 역임했어.
상임이사 시절 잊혀지지 않은 것은 남북의 뱃길이 처음으로 트인 금강산 호 화 유람선 탐방이야. 금강산 구경에 반대하는 회원들도 있었으나 신 우식 회장의 공약이어서 두 번에 걸쳐 실행을 했지.
회원들의 탐방 순위는 생년월일까지 따져서 고령 우선 순위로 2000년 첫 해 20명, 다음 해 20명을 선발,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탐방했어.
탐방중 ‘선상포럼’은 언론인 다운 깜짝 이벤트, 반응도 좋았고.....
그 밖에도 그동안 예산 관계로 중단되었던 본회의 영속(永續)사업인 ‘한국언론인물사화’의 5~6권과 ‘녹취 한국언론사’를 발행한 것도 기억에 남아....”
- 황 회우는 딸부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는 파안대소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1남 4녀니까 그런 말을 들을만도 하지. 그러나 그게 다 우리 내외와 태어난아이들의 숙명이지 뭐야.... 장녀는 그림을 그린답시고 개인전시회도 몇 번인가 했고, 아들 놈은 SK의 IT서비스회사인 SK C&C에서 팀장으로 있어. 나머지 아이들도 개인사업들을 하고 있는데 모두가 제 앞가림을 할만큼 하고 살고 있으니까 고맙고 대견스러울 뿐이야.”
우리네 부모들이 다 그렇듯이 그도 자식 자랑을 은근히 내비쳤다.
황 회우는 6․25때 군에서 중대장까지 지내 그 기민성과 활동력이 몸에 배어서인지 무엇인가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
-황 회우는 그동안 여러 단체에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글세... 인생칠십 만사휴(人生七十 萬事休)라....나는 팔십이 됐으니 벌써 쉬기 시작할 나이에서 10년이나 넘었는데 뭘... 헌병동우회 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잡지 형태의 소식지 편집의 책임을 지고 한 7년간 지내다가 지난 연말 사임하고, 지금은 헌우회에 자문위원이랍시고 이름만 걸어놓고 있어. 시시한데 한 두군데 이름 걸린데가 있는데 이제 다 그만두기로 했어.”
현역생활 40년 유관기간 10년 등 반세기의 언론생활을 마치고도 모자라 아직도 봉사할 곳이 있는 팔순의 노기자! 그는 지금도 똑바로 걷고, 똑바로 보고, 똑바로 듣고, 똑바로 먹고 산다는 특이체질, 거기에다 해박한 학구파다.
그리고 독서, 등산, 바둑, 사진 촬영등 취미도 다양하여 일상을 즐기고 있다.
따라서 세상에 재미없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늘 고개를 돌린다.
황 회우는 나와도 많은 산행을 했다.
북한산은 물론 멀리는 땅끝 달마산, 월출산, 주왕산, 태백산, 덕유산, 설악산 등 국내의 유명산은 거의 올랐다.
그런데 그는 산행을 시작하면서 내뱉는 한마디가 있다. “아이고 죽겠네...”
그러면서도 끝까지 따라붙는 근성이 있다.
바둑에서도 마치 한가지다. 황 회우와 나는 7급으로 두는데 그는 포석을 시작하자마자 이번에는 “아이고 다 죽었네”다. 결과는 그의 꼼수도 가세해서 거의 나의 불계패로 끝난다. 하기야 꼼수도 수는 수다.
황 회우는 사진의 경우도 거의 프로의 경지다. 무거운 사진기를 몇 개씩 짊어지고 전국을 누비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필름 속에 담는다. 몇해 전 부인과 함께 해남 땅 끝에 1주일간 머물면서 땅끝 맴섬의 유명한 해오름 사진을 찍는데 성공한 적도 있다.
또한 금강산 뱃길이 트였을 무렵 서울신문사가 주최한 금강산 사진 응모전에 출품, 입선함으로써 아마추어의 경지에서 벗어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