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첫 모임, 벌써 30년째 계속 ,강산이 변해도 세 번이나 변했을 긴 年輪 , 만나면 토론의 각축장 ‘보수우파들의 모임
각목회는 70년대에 국방부를 출입하던 기자들이 정년퇴임 후에 모여서 만든 침목회의 이름이다. 그런데 왜 하필 ‘각목회’냐고? 국방부가 삼각지에 있다고 해서 각(角)자와 목요일(말목)에 만난다고 목(木)를 합성해서 지은 이름이니 알고 보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각목회의 역사는 꽤 오래다. 1980녖 12월29일에 첫 모임을 가졌으니 벌 써 30년도 넘게 지속되는 끈끈한 모임이다. 각목회를 만들게 된 동기는 당시 동아일보에서 출입하던 이연교(李縯敎)기자가 불의의 교통사고에 의한 달팽이관파괴로 청력을 잃어 기자생활을 그만 두게 되자 “우리도 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하자”는 최연장자 박승탁(朴升鐸.84세)선배의 제안으로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첫 모임은 80년 12월 29일 국방부에서 가까운 남영동의 부대고기집에서 있었다. 당시 회비는 5천원. 30년전이라 5천원으로도 그런대로 푸짐하게 먹을 수가 있었다. 노름꾼이 모이면 블랙젝이나 고 스톱 얘기를 하듯이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모이면 모 모 장군 얘기로 꽃을 피우고 장관의 인물론으로 안주로 삼았다.
군 출입기자들 답게 국가안보의식이나 정체성 만큼은 누구보다도 투철했다.
우리 각목회 멤버들은 4~5년간 국방부를 커버하는 동안 정래혁(丁來赫), 유재흥(劉載興), 서종철(徐鐘喆) 등 3명의 국방장관을 겪었다. 그 중에 정래혁 장관은 시종 기자단과 사이가 벌어져서 기자들이 장관과의 만남을 기피하는 기간이 길었다. 아쉬운 쪽인 정장관이 먼저 휴전(?)을 요청해서 휴전은 성립됐으나 ‘만남의 장소’문제로 다시 자존심싸움을 벌이다 결국 중간점인 장군식당에서 만났던 해프닝은 지금 생각해도 어린이 장난같은 일화였다.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줄줄이 옷벗어
국방부 기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군사기밀’과 ‘출입 통재선’이라는 한계성 때문에 취재원에의 접근이 어려워 행동반경이 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잠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는 생활의연속이다. 4~5년 동안에도 실미도 난동사건을 비롯해서 고량포 제1땅굴 발견(74.11.15.), 철원 제2땅굴 발견(75.3.19.) 등 국가안보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사건들이 연거푸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1971년 8월23일에 발생한 실미도(군 특수부대원)난동사건은 꿈에도 예상하지못한 황당한 자중지난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우리는 사건이 터지기까지는 인천 앞바다의 외딴 섬 실미도에 그런 북파공작 특수부대원들이 양성되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몰랐다. 이들의 주임무는 평양상공에 고공참투하여 김일성의 목을 잘라오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훈련과정이 혹독할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실미도를 집단탈출해 경인가도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 모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6.25 때 전투기 100회 출격의 자랑스런 기록을 가진 기두만 공군 참모총장과과 김재명 대간첩본부장(육군소장) 등이 줄줄이 옷을 벗고 예편되었다.
동시대의 국방부출입기자들의 명단을 보면 쟁쟁한 면면임을 가늠할 수 있다. 박승탁(朴升鐸 전 한국일보 사회부장대리, 주한 미대사관 공보고문) 이도형(李度珩, 전 조선일보 주일특파원, 한국논단발행인 겸 주필) 구종서(具宗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학박사, 한국문명사연구소 소장) 최규장(崔圭莊, 작고, 전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 이철(李哲, 전 서울신문기자. 재미논설위) 지용우(池龍雨,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실장) 전종만(田鍾萬, 전 연합통신 심의실장) 홍인근(洪仁根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위원) 김정서(金瑞正 전 동아일보 외신부장, 논설위원) 박창신(朴昌信, 전 MBC 부장, 삼척 MBC사장) 이두석(李斗石, 전 주앙일보 사회부장, 세계일보, 문화일보 편집국장, 내일신문 고문)
지난 30년간을 중단 없이 얼굴을 맞대 온 각목회원들은 이제는 눈빛만 보아도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끈끈한 동지감을 느끼게끔 되었다. 요즘에는 주로 태평로에 있는 한국 프레스센터(19층)에서 매달 만나 시국을 논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대화가 고루 배분되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개성이 너무 강한 어떤 특정인에 의해 발언권이 독점당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바로 ‘원조 우익’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논단의 발행인인 이도형이 그 사람이다. 이 사장은 누가 뭐래도 대단한 집념과 신념의 사나이이다. 좌파와 진보셩향의 인사들로부터는 ‘불온서적’이라는 소리까지 듣고있는 극우잡지 ‘한국논단을 1989년 창간이래 소신과 집념과 배짱으로 줄기차게 밀어붙이고 있으니 감탄할 정도다. 한국논단의 1997년 10월8일 대통령 선거직전에 이도형발해인 주도로 대통령후보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른바 대통령후보들의 사상검증 대토론회를 벌여 조목조목 인물들을 해부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명얘훼손 송사로 재산을 날릴만큼 악연을 맺은 장본이이다. 인간 이도형으은 자신을 ‘극우 보수’라 지칭하면 펄쩍 뛴다. 극우라면 미국의 KKK단이나 작가 미지마 유키오류라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나는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는세력에 대한 감시꾼”이라는 주장이다. 八旬이 내일 모래 나이(79세)라 붓끝이 무딜만도 한 데 이도형의 글은 아직도 뾰죽하고 서슬이 프르러 촌철살인감을 느낄 정도다.
각목회의 구종서(具宗書)박사도 유능한 언론인이자 학자 겸 역사소설가로 정평이 나 있다. 대한일보와 중앙일보기자로 활약하다 논설위원으로 명사설을 써오던 그는 경기도 강화가 고향인 만큼 우리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몽고사 연구에도 남다른 집념을 가져 몽골제국의 시조인 ‘칭기스칸’과 몽고의 침략과 항몽정신을 그린 대하역사소설 ‘삼별초’(三別抄) 등 총 11권의 역사소설을 발표하는 정력을 과시했다.
청, 장년시절에 만든 각목회모임이 회원들 모두가 7~8순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오랜 세월을 탈 없이 지탱해 온 것은 이 모임을 사랑하는 회우들 모두의 변함없는 애정과 우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돈 천원까지도 공평하게 쪼개는 알뜰살림으로 투명하게 총무일을 맡아 애를 쓴 김정서 회우의 노고가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었다는데 회원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이밖에도 각목회 맴버들 중에는 각계에서 아직도 ‘노인’이기를 거부하는 현실참여를 하고 있지만 지면관계로 이만 줄인다. <지용우 본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