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 관한 12개의 章(가제)’ 단행본을 탈고하여 출판사에 넘겼어요. 최근에는 자유기업원에서 내는 월간 ‘국회 정보마당’에 국회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2대 국회 10회 연재에 이어 3대 국회를 쓰고 있지요.”
-출간 될 단행본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요?
“노인과 돈, 노인의 성(性), 추억과 고독, 멋, 병과 죽음 종교 등 우리시대 노인들의 담론을 담았습니다.” 개의 꼬리와 사람의 수명이 길다고 능사가 아니듯 노인들도 삶의 질을 높여 ‘황혼의 빛’으로 방점을 찍자는 의도를 담았다고 소개한다.
지난 2월 15일 프레스센터 1층 커피숍에서 본회 이형 논설위원을 만났다. 근황을 묻자 “요즘도 글을 쓰며 바쁘게 지낸다”는 것. “어떤 일이든 몰두하다 보면 나이도 비껴갈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형 회우는 올해 여든이란 연세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다. 격랑의 세월을 헤쳐온 老 記者 스타일이라기보다 ‘범생이’로 통하는 모범학생이나 꼿꼿한 선비풍의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대한언론인회가 1988년 제정한 제1회 ‘대한언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 신문, 통신, 방송사에서 추천한 후보자 가운데 막판까지 4명이 경합을 벌였으나 심사위원들의 무기명투표로 선정됐다. 그 해 이 회우는 한국일보에 53편의 기명 평론과 ‘地平線’을 쓰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동안 많은 저서를 남겼다. ‘조병옥과 이기붕-제1공화국정치사의 재조명’, ‘장면 정권과 민주당’, ‘3대 국회’는 정치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와 함께 政街의 비화를 담고 있어 현대사 연구서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신은 중산층인가-한국경제의 신화와 실상’, ‘한국경제의 이해와 선택’, 시사평론 ‘자유를 위한 저항과 갈망’, 부부 수필집 ‘좋을 때나 궂을 때나’ 등을 출간했다. 그 가운데 ‘한국경제의 신화와 실상’(1980년 삼성출판사)은 경제서적으로는 드물게 1만 4,000여권이 팔렸을 정도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집필은 주로 언제 하시는지요?
“야행성이라 주로 밤에 씁니다. 한 때는 밤을 꼬박 새우며 집필하느라 한쪽 시력을 잃기도 했어요. 그 버릇 탓으로 요즘도 대개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들고, 늦잠을 자는 편입니다. 어깨를 다치기 전에는 30년 넘게 매주 일요일에 산행을 했는데 요즘에는 잠시 쉬고 있어요. 낮엔 헬스클럽에서 가벼운 운동을 한 뒤 저녁에는 집에서 TV를 시청하거나 클래식을 들으며 여백의 시간을 갖지요. 이제 추위가 풀리면 다시 산행을 계속할까 합니다.” 이 회우는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를 지금까지 쓰다말다 하면서 이어오고 있다. 예전에는 시나 수상 등 길게 쓰기도 했지만 요즘은 일상 등을 기록형식으로 남긴다는 것. 클래식을 좋아해서 LP판 수집에도 취미를 가졌다고 한다.
-원고는 컴퓨터로 쓰시는지요?
“200자 원고지에 육필로 쓴 뒤 컴퓨터로 옮기면서 추고를 합니다. 몇 십년 동안 길들여진 버릇이라서 컴퓨터가 편리한 줄은 알지만 여전히 직접 원고지에 손으로 글을 쓰고 있어요. 한때 멋을 부리느라 千寬宇선생을 흉내 내서 붓으로 원고를 쓰기도 했어요.” 20대 후반 李馨 기자는 ‘주간 희망’지에 정치인 프로필과 사회 만평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를 기고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지금의 부인 김명주여사를 만나 결혼을 했다고 한다.
‘2․4 파동’ 때 국회출입기자 매달 만나
이형 회우의 언론생활은 격랑의 현대사만큼 반전을 거듭했다.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53년 3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니던 어수선한 시절이다. 연합신문․동양통신 수습기자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 1400여명 응시자 가운데 수석으로 합격했다 6․25전쟁 후 첫 공채다. 대학교 졸업 이상이 응시자격이었으나 그것을 따지지 않고 채용되었다. 서울대 문리대 3학년 때였다.
환도 전 선발대로 서울 본사로 온 뒤 동대문과 청계천변 시장 픙경을 스케치한 르포기사 ‘여기가 서울이다’를 연재했다. 부산 팀 모두 서울로 돌아 온 뒤 국회출입을 배정 받는다. 2대 국회 때다. 수습기자 딱지를 뗀 뒤 첫 오보를 냈다고 한다.
-오보 내용은?
“자유당의 ‘族靑派(민족청년단)’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족청파의 실력자 梁又正 의원(연합신문 사장이기도 했다) 구속 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었는데 가결을 부결로 송고한 것이지요.” 국회 단독 출입으로 본회의장을 벗어나 다른 기사를 보내고 온 사이 부결 된 것은 ‘구속동의안의 표결을 보류하자’는 동의안이었는데 그것을 구속동의안의 부결로 잘못알고 ‘양의원 구속 동의안 부결’이라는 기사를 송고했다는것. 얼마후 구속안이 가결되어 부결을 가결로 정정하는 기사를 보냈지만 이미 석간 인쇄를 시작했던 신문사는 발칵 뒤집어지고 인쇄된 신문은 폐기처분됐다. 그는 사표를 제출했으나 반려됐다.
-조선일보로 옮긴 것은 오보 여파인가요?
“아닙니다. 그 해 11월 조선일보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정치부로 옮겼어요. 당시 張基榮씨가 사장이었고, 새로운 신문 창간을 준비하면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았어요. 조선일보사에서는 그냥 남아 있으라고 당부하여 곤혹스러웠다”고 말한다. 입장이 난처해진 그는 서울신문으로 잠시 옮겼다. 1년 남짓 사이 연합신문에서 조선일보, 서울신문을 거쳐 1954년 6월 초에 창간된 한국일보에 닻을 내렸다. 사회부 기자로 법조, 서울시청 등을 1년 여 출입하다 정치부로 옮겨 7년 동안 정치부 기자로 격랑의 현장을 취재했다. 4․19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 민주당 정부 출범, 5․16군사혁명과 신군부 출현 등 정치사의 소용돌이에 그가 있었다.
-그 시절 잊히지 않는 사건은?
“1956년 9월 28일 張勉부통령이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피격된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해 12월 31일자로 ‘(장 부통령 피격)배후에 경찰수뇌’ 보도로 최종기, 이원홍 기자와 데스크를 본 나, 편집담당 조기호 기자가 지명 수배를 당했어요.” 장기영 사장은 수배되었던 기자들에게 ‘誤報賞’이라며 하룻밤 통음하기게 충분한 1만원씩을 주었다니 질책 대신 보너스를 준 ‘낭만의 시절’이다.
-요즘도 매달 24일에 만난다는 ‘2․4모임’은 무엇입니까?
“1958년 여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려하자 민주당과 무소속 의원 80여 명이 국회 본회의장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어요. 12월 24일 국회에서 警衛權을 발동하여 야당 의원들을 의사당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는 광경을 보면서 의회정치의 종말을 보는 듯한 비통한 심정이었지요. ‘2․4 파동’을 겪었던 국회출입기자 몇 명이 요즘도 매달 24일에 만납니다.” 모임의 경비는 더치 페이. 정계원로들이 식사비를 내려고 하면 참석은 하되 경비는 사절이라는 것이 불문율. “지난해 까지 만났던 金明九 회우가 지난 1월 타계하는 등 회원들이 해마다 줄어 무상을 느낀다”며 씁씁해 한다. 타계한 회원은 최근의 김명구씨를 포함해서 송원형 조세형 김인호 정인량 정용현 이윤수씨 등 7명이며 현재 박권상 이웅희 권오기 씨 등이 와병중으로 출석을 못하고 있어 이제 조용중 김준하 이형 3명이 남았다.
복직-해직-재 복직…부침 거듭
-주일 특파원 6개월을 거쳐 10년 동안 뉴욕에 장기 체류한 이유는?
“1961년 군사혁명 후 ‘舊惡과 가깝다’는 이유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출입을 규제 당했습니다. 구 정치인들의 연락담당자라며 어거지로 낙인찍은 거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6개월 가량 일본에 체류하다 1962년부터 10년 동안 미국에 머물렀지요.”
-주미 특파원이었나요?
“아닙니다. 뉴욕주재 통신원이란 직함을 유지하며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 뒤 이 회우는 장기영 사장에게 귀국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고, “걱정말고 귀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귀국한 뒤 편집국 근무를 희망했으나 논설위원실 발령을 받았다. 1978년 편집국장 대리로 승진한 뒤 ‘대리 꼬리’가 잘리기를 기대했으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국장이나 주필 등 책임 있는 자리는 주지 말라는 ‘요 주의’ 인물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1980년 8월 해직기자가 된 이유는?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조 및 자유실천문인협회 101인 선언문에 서명했다는 것이죠. 나는 문인도 아니고 서명도 안 했지만 ‘미운 털’이 박힌 반체제기자 A급으로 분류되었어요.” 해직을 당하기 열흘 전쯤 신 군부에서 “全사장(전두환)의 정치고문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거부한 것도 눈엣가시였다”고 회고한다.
-해직 후 생활은?
“동양기전 대표이사를 맡았어요. 해직기자가 된지 5년만인 1985년 4월 논설위원으로 복직된 것은 행운이었고, 주변에선 ‘2전3기’라고 격려해주었어요.”
이형 회우는 피난시절 기자로 출발하여 1993년까지 기복 많았던 기자생활을 마감했다. 기복이 심했던 만큼 경험이 풍부해졌고 그것이 팔순에도 왕성하게 집필하는 밑거름이 되어 오늘도 원고지 앞에 앉는다. 퇴임 후에는 고향 통영에서 발행하던 한산신문 회장과 (주)한려개발 회장을 맡기도 했다.
주량은 반주를 곁들일 정도로 좋아하고 모임 때는 소주 1병이 적당하다는 것. 담배는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웠으나 끊은 지 20년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