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光植 본회 회우는 언론계를 잠시 거쳤을 뿐 평생을 학자로 지냈기에 “선뜻 나서기가 주저된다”고 말문을 연다.
지난 3월 18일 홍대입구 한 일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인 점심을 먹으며 긴 시간 인터뷰를 했다. 30년 전 중앙대 신방대학원에서 安 교수의 ‘보도연구’ 강의를 수강한 인연이 있어 더 살갑고 반갑다. 이마에 잔주름이 늘었을 뿐 화색이 감돌고 건강미가 넘친다. 인터뷰라기보다 언론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총각교수시절 ‘주니어 저널리스트’(1968년 9월 30일자)에 게재 된 대학생기자가 쓴 인터뷰에서 “멋지게 파도치는 머리에 항상 웃음기 가시지 않는 입 언저리의 까만 사마귀가 애교 있다”고 표현한 사마귀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고 잔잔한 미소도 여전하다. 학생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교수법과 유머와 재치 넘치는 명 강의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특히 이론에 치우친 신문학을 현장 위주의 실습과 접목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 “학생들에게 기사자료를 주고 기사작성을 시킨 뒤 수정하여 면담까지 하면서 ‘보도기사론’에 열성을 쏟았다”고 회고한다.
대학 재학 중 언론계에 첫발
지난해 연말 초판 발행 후 최근 재판을 찍은 ‘팔순 양띠 교수들 이화사랑 반세기’의 독자 반응을 묻자 “재미있게 읽었다고 합니다”며 담백하게 대답한다. 김활란 박사를 추모하는 ‘백
인회‘의 모임에 초청 받아 강연도 했다는 것. ‘이화사랑 반세기’는 이화에서 30년을 봉직한 安光植(언론학) 명예교수를 비롯하여 김영일(영문학), 김영호(독문학), 김재은(심리학), 서광선(기독교학) 등 여든 살의 동갑내기 5명의 공저. 후학들을 가르치며 겪었던 보람과 기쁨, 격동기의 고뇌와 숨은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 낸 감미로운 추억담이다.
우리나라 知性史와 大學史, 社會史의 소중한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양띠 교수들의 공통점은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던 때에 태어나 이화여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1996년 정년퇴임 했다는 것. ‘희생하라, 봉사하라’는 기독교정신을 양처럼 묵묵히 충실하게 따랐다는 점이다.
언론학 교육 초기의 토대를 다진 安光植 교수는 정년퇴임 후에도 연구와 집필로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2~04년 본회가 주관한 ‘한국의 언론자유 평가’ 프로젝트 편찬회의 공동의장으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저서에서 술회했다.
安光植 회우는 대학 재학 중(서울대 영문학과) 6․25 전쟁이 터지자 공군 하사관으로 자원 입대했다. 생리에 맞지 않아 다시 해병대 통역장교를 지원, 대위로 제대한 국가유공자다. 해병대 장교시절 원산 앞 여도에 복무하면서 포탄이 날아오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영을 즐겼던 낭만파다. 1955년 제대 후 복학을 했고, 이듬해 영자신문 ‘코리언 리퍼블릭’(대한공론사. 코리아헤럴드 전신)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고, 외신부장을 지냈다. 뉴욕 UPI통신 본사 국제부에서 근무했고, W. R. Simmons. Inc. 연구원으로 활동했다.1963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MS 석사 학위를 받고, 서강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언론계로 복귀하지 않고 학계로 진출한 동기는?
“1960년대는 한국의 언론자유가 제한적이었고, 기자를 평생 직업으로 삼기에는 회의적이었지요. 각 대학에서 신문학과가 신설되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즘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연구와 교육이 개척단계에 있어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어요.” 당시 외국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어느 대학을 택하느냐가 관심사였다고 한다.
이대 강단 ‘우연 아닌 필연’
-미혼으로 이화여대를 선택한 이유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3대째 기독교인으로 감리교와 인연을 맺어 온 가정에서 자랐어요. 저의 선친(안신영 전 기독교방송 국장․배재고 교장)은 감리교 대표로 이화학당 이사를 지냈고, 1930년대 초 이화의 교가를 작곡한 안기영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가 백부로 이화와의 인연이 깊습니다. 모친(김영복) 또한 이화여전 출신으로 졸업 후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공주영명학교 교사를 지냈고, 이모 또한 이화여전을 나와 어렸을 때부터 이화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고 말한다. 당시 감리교 감독을 지낸 이환신 목사의 추천으로 김옥길 총장을 처음 만났고, 이화여대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고 한다.
-安 교수는 저서에서 “이화에서 남자교수로 일한다는 건 여러모로 부담스럽지만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라고 했다. 부인 林淑子(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교수․전 이화여대 가정과학대학장) 교수와의 몰래 데이트는 어떻게 했는지?
“데이트는 학생들의 눈을 피해 교외 일영과 송추에서 주로 했어요. 1971년 학생들 모르게 극비리에 결혼했습니다. 이화대학 교수끼리 결혼한 것도 화제였고, 데이트는 주로 어디서 했고, 어떻게 성사되었느냐는 학생들의 질문을 많이 받았지요.”
-대학강단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부임 후 처음 들어간 3학년 학생 60명 전원에게 ‘매스 미디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조사연구’를 시켰어요. 당시 서울의 TV시청자 6만 가구를 모집단으로 600가구를 선정하여 면접조사를 했지요. 그 결과는 ‘신문평론’(1968년 가을호) 특집부록에 게재되었고, 각 신문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학과의 위상을 높인 게 기억에 남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농촌봉사활동을 편 것도 보람이었다고 한다. “60년대 농촌의 열악한 환경과 이농현상, 가난과 교육문제, 체념의식 등 봉사 활동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안타까웠다”고 덧붙인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이화여대에 정착한지 4년 째 되던 해, 세 군데 대학에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김옥길 총장과의 첫 면담 때 “남자교수들이 여자대학에서 때로는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경우도 있으니 언제라도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좋다”고 하여 떠나는 문제를 상의 드렸지요. “생각해보자”고 하시더니 학보사 주간으로 발령을 내는 바람에 발목이 잡혔죠”
학보사 주간 7년은 유신통치와 ‘반 유신 운동’이 맞물려 파란만장한 악몽과 같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사설 필화사건, 당국에 의한 학보 폐기처분, 배부중지, 재 조판 등을 거듭하며 시련을 겪었다는 것, 또한 영문과에서 만들었던 영자 신문 월간 ‘Ewha Voice'와 계간 ‘책 소식’까지 떠맡아 학문 연구는 물론 강의조차 부차적인 임무였고, 학기 중에는 토요일도 없이 지낸 슬픈 교수시절이었다고 한다. 학보와 정보당국과의 갈등, 학생들과의 마찰 속에서도 조정역할을 하고 균형을 잡아가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것.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대학보’가 다른 대학신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70년대 대학사회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자신들이 ‘학교의 주인’이란 인식으로 목청을 높였어요. 그 결과 학내 문제를 유난히 많이 다뤄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교내․외의 지적도 받았어요. 또한 1974년 ‘이대학보’ 창간 20주년을 계기로 세로쓰기 체제를 가로쓰기체계로 바꾼 것은 혁신이었습니다.” 그 뒤 우리나라 일간신문들은 1985년부터 부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1995년부터 전면 가로쓰기 체제로 전환되어 학보가 선도적 역할을 한 셈이다.
언론정책 시정, 방송개혁 역설
-학보사 주간을 그만 둔 뒤의 반전은?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말은 맞습니다. 1978년부터 1년 동안 젊은 시절 꿈과 희망을 품고 공부했던 컬럼비아대학교 교환교수로 나가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의 큰 보람이자 영광이었지요.” 安 교수는 뉴욕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길 정도로 뉴욕 마니아다. ‘뉴욕타임스’를 손쉽게 읽을 수 있는 것도 행복이었고, 링컨센터 등을 누비며 세계 정상급들의 음악을 듣고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고 여긴다.
-80년대 접어들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것 같습니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언론중재위원회 위원과 부위원장을 지내면서 오보 피해규제를 위해 정정 보도를 하도록 중재 역할을 했고, 언론의 윤리적 위상 제고에 남다른 노력을 쏟았습니다.” 5공 시절 언론통폐합을 단행하며 ‘공영방송’을 표방 할 때 ‘미국의 공공 텔레비전에 관한 연구’(한국문화연구원 논총 제40집. 1982),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유형별 분석 고찰’(한국문화연구원 논총 제49집. 1986) 등 많은 논문을 통해 정부의 언론정책 시정과 방송의 개혁을 역설했다.
이밖에도 安 교수는 언론학회 회장을 비롯하여 방송위원회, 언론연구원, 관훈클럽, 신문편집인협회 등 언론단체 주관으로 열린 각종 세미나에서 한국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6년 정년퇴임 후에도 ‘이화여대 명예교수’라는 직함으로 언론중재위원, 국회방송자문위원, 방송위원회 심의위원장 등을 맡아 한국언론 발전에 기여했다.
‘신문은 활자매체의 古典’
-정보기술의 발달과 TV종합편성채널 편성 등 언론환경이 많이 변했다. 활자매체의 생존 전략은?
“인터넷 등에 밀려 활자 매체가 사라질 위기라는 우려가 많지만, 신문은 존속되리라 전망합니다. 수세기가 흘러도 클래식이 살아남듯이 신문은 활자매체의 고전입니다.” 영상매체와 차별화 된 콘텐츠 개발과 경영합리화,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安 교수는 ‘신문과 정부와의 갈등’(1970), ‘세계의 신문’ 공저(1986), ‘커뮤니케이션과 사회변동’(1984), ‘한국언론과 사회’(1996), ‘한국언론과 투표행태 연구’(2008) 등 저서와 수많은 논문을 남겼다.
그는 지금도 이화여대 캠퍼스가 바라다 보이는 신촌동에서 35년 째 살고 있는 ‘영원한 이화인’이다. 구내에 있는 은행, 매점, 우체국, 안경점, 서점, 구둣방 등을 들러기 위해 거의 매일 드나들어 학교가 집의 일부 같고 생활터전이 된 것 같아 퇴직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부인 林淑子 교수 사이에 1남 1녀. 장남 世炫(39)은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석사, 영국 런던정경대학원(LSE)에서 ‘에너지 안보’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시립대 교수. 장녀 美炫(38)은 러시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 한 뒤 13년 넘게 유럽에서 연주활동을 펼쳤다. 미국 예일대 음대 초빙 아티스트를 지냈고, 현재 성신여대 교수로 재직, 온 가족이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