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건이(전 세계일보 국장 겸 수석논설위원) “1960년 4월 18일 밤 11시. 서울 중부경찰서 출입 기자였던 나는 ‘4․19’하루 전날 밤 ‘4․18 고려대 데모 사건’의 전모를 취재하고 회사로 돌아가던 도중 충무로 파출소에 들렀다. 명동에 소재한 회사와 가까운데다 평소 파출소장과는 친하게 지나는 사이여서 정보도 얻고, 이야기도 나눌 겸 잠시 들어갔다. ‘박 기자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하고 파출소장이 묻기에 ‘자유당 정권은 이제 끝났으니 소장도 보따리를 쌀 각오를 하라’며 농담조로 한마디 던졌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복차림의 경감이 느닷없이 권총을 뽑아들고 내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4․19 혁명’ 당시를 회고하는 노 기자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권총 사나이가 “당신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 따위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거야! 누구한테 보따리를 싸라고 하는 거야!”
사뭇 흥분된 경감은 난데없이 수갑을 채우고는 백차를 불러 중부경찰서로 강제 연행하고는 사찰과장에게 인계했다. 기자를 연행한 경감은 이기붕 사저 호위 경찰관이었다. 그는 사찰과장에게 귀엣말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기자가 출입하는 경찰서에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녘에야 사찰과장이 웃는 얼굴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풀어주면서 전날 밤의 그 자가 오기 전에 아침식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경찰서를 빠져 나온 기자는 경찰서에 다시 출두하지 않았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일선 취재기자를 유치장에 가둔 마지막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다.
사회부장 시절이었다. 1976년 6월 초 시청 출입기자 김찬호 차장(보건신문 대표이사 회장 역임)이 특종을 물고 왔다. 부정식품 일제 단속에서 적발된 유명회사 부정식품 리스트를 입수한 것이다. 부정식품 단속 회사 명단과 그 회사 식품을 하나도 빼지 않고 톱기사로 오전에 내보냈다. 당시 석간신문이었던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이 대서특필했다. 다음 날 조간 한국일보 조선일보에도 크게 보도됐다.
모처럼 특종을 건진 사회부장으로서는 매우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찬호 차장을 비롯한 사회부 기자들과 기분 좋게 저녁 회식도 했다. 신문에 보도가 나간 다음 날 편집국이 발칵 뒤집힐 만큼 소동이 벌어졌다. 오후 7시께 검은 지프가 통신사 건물 앞에 들이닥쳐 박문송 사회부장과 김찬호 차장을 남산으로 연행해 간 것이다.
사회부장은 남산에서 이틀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혹독한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취재지시와 기사작성, 보도 모두 사회부장 책임 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취재기자를 풀어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김찬호 차장은 부정식품 단속 리스트인 공문서를 절도했다는 혐의로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1주일가량 당국과 실랑이 끝에 박문송 사회부장이 경찰서에 시말서를 써주고 취재기자는 가까스로 풀려났다.
문제의 발단은 롯데그룹 회장 신격호 때문이었다. 그가 청와대를 방문해 “롯데 껌이 부정식품이라면 대한민국에 부정식품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일본에서 번 돈으로 조국 부흥을 위해 국내에 롯데제과를 창업했는데 부정식품 회사로 몰리다니 너무 어이가 없다. 조국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여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후문이다.
남곡(南谷) 박문송(84)의 언론 비화 중 한 토막이다.
그는 1957년 12월 1일 캐나다 Nana 통신, 일본 시사통신과 제휴했던 시사통신에 입사한 이후 24년 동안 언론에 몸담으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1980년대 언론통폐합으로 군소 통신과 신문이 문을 닫기까지 그의 기자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돌이켜 보면 광복 이후 한국 언론사가 그러했듯이 언론인 박문송의 언론 역정도 누구 못지않은 고난의 길이었다. 6․25전쟁과 함께 고향인 함북 길주를 떠나면서 이산의 아픔과 분단의 고통, 망향의 설움을 수없이 겪었다. 언론에 몸담아 정론 직필의 외길을 걸어오면서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이어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을 온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일선 경찰서 출입을 비롯해 검찰, 내무부, 보건사회부, 농림부 등의 출입 기자를 거쳐 데스크로 일하는 동안 정신적 고통도 많았지만 기사로 승부한 언론인으로서의 긍지와 보람도 적지 않았다. 농림부 출입 기자 시절이었던 1970년 5월 어느 날 조시형(趙始衡)장관과 기자회견이 있었다.
“대장균이 허용치 이상 함유된 우유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데, 그것은 식품회사의 위생관리 허술과 농림부의 단속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 며 대책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다. 성질이 급했던 조 장관은 몹시 화난 표정으로 “대장균은 인체에 해롭지 않다. 박 기자 뱃속에도 수만 마리의 대장균이 있다. 낙농 진흥을 위해서는 우유에 허용치 이상의 대장균이 함유되어 있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고 강변을 한 것이다. “대장균이 인체에 해롭지 않다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대장균이 인체에 정상적으로 기생할 때는 병원성 운동성이 없으나 대장 밖으로 나오면 병원성을 가지게 되어 복막염, 신장염, 방광염, 담낭염 등을 일으켜 인체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데, 대장균이 우글거리는 우유가 인체에 해롭지 않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장관님!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하고 보사부 출입 시절 익혔던 해박한 식품위생 지식으로 반격을 가했다.
노발대발한 조 장관이 기자들에게 방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기자회견이 중단되고 말았다. 기자실로 돌아온 기자들이 조 장관의 사과를 요구했으며, 사과하지 않을 경우 일체 취재를 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조 장관! 대장균 먹어도 된다”라는 말까지도 신문에 크게 인용 보도되면서 농림부 직원들도 전전긍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며칠 후 조 장관이 기자실에 나타나 사과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시사통신을 떠난 그는 보건신문 회장, 연예영화신문 고문을 거쳐 9년 동안 후지칼라 서울 현상소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언론계에 몸담고 있을 때는 늘 쪼들리는 생활을 면치 못해 부인 김수남 여사(81)가 미용실을 운영해 살림에 보탰다. 경제생활은 후지칼라로 옮기면서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
언론인으로서의 인생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올챙이 기자로 출발해서 사회부장을 거쳐 편집국장까지 올라갔으니 기자로서는 대망을 이룬 셈이다. 기자 시절 그는 대단히 부지런한 기자였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주한유엔연합사령부와 해병대 사령부 등에 문관으로 근무하다 보니 언론사 출발은 늦어 만 30세부터였다. 그렇지만 천성이 부지런한 탓에 여느 기자들이 기자실에서 포커놀이를 하거나 바둑을 두는 동안,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출입처 곳곳을 누비며 다녔다. 취재 수첩을 꼭 갖고 다니면서 메모하는 습관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특종도 적지 않게 했다. 통신사 기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취재한 기사가 종합지 신문에 보도되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 그런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동년배 언론인 김천수씨는 그를 항상 높게 평가했다.
신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유승택씨도 “그는 발로 쓰는 기자였다. 다른 기자들보다 한 발 앞서 아침 일찍 기자실에 나타나기가 무섭게 장관실 동정을 시작으로 각 부서를 돌아다니면서 취재에 여념이 없었다. 간혹 전날 밤 술에 흠뻑 취해 작취미성의 상태로 소파에 누워 있다가 기사 마감시간이 되면 박문송 기자를 찾느라 소란을 피우는 다른 언론사 기자도 있었다. 홀연히 기자실에 나타난 박 기자는 1단짜리에서부터 굵직굵직한 뉴스거리를 풀어주는 정보통이었다. 물론 특종감은 제외하고…”라고 회고한다.
동료기자들은 그에게서 늘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곤 했다. 동료 기자뿐 아니라 출입처 공무원들의 애경사에까지 으레 그의 얼굴이 보였다. 슬픈 일이거나 기쁜 일이이거나 항상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그런 분이다. 그것은 그의 천성이었다. 물론 그는 소속된 회사 직원들의 애경사에도 가장 열성적으로 참가하는 분으로 정평이 났다.
그렇지만 전형적인 함경도 사나이답게 무뚝뚝하고 직선적이며, 타협하지 않는 성미다. ‘곧이곧대로’ 와 ‘부지런 함’ ‘정의의 사나이’가 그의 닉네임이다. 편집국장 시절, 기자와 담당 데스크에게는 강한 질책을 하기도 했지만, 야단을 치는 가운데도 따뜻한 인간미가 배어 있어서 야단맞는 후배들이 큰 상처를 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항상 약자 편에 섰다. 약자가 괴로움 당하는 모습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잘 융합하는 장기를 갖고 있다. 술․담배를 일체 하지 않으면서도 술좌석에 흔쾌히 어울리는가 하면 남에게 술도 자주 살줄 아는 친화력을 가진 사람으로 소문났다. 항상 깔끔한 차림이어서 멋쟁이로 기억하는 후배들도 많다.
초등학교 때부터 함경북도 길주농림학교 졸업 때까지 1년 선배로서, 그리고 언론인으로 활동한 마욱 전 전우신문(현 국방일보) 편집장은 ‘인간 박문송’이 걸어온 길에 경외감을 감추지 못한다. 6․25동란의 와중에도 서울 수복과 함께 두 사람은 극적으로 다시 만나 지금까지 우의를 돈독히 하고 있다.
1927년 9월 11일(음) 함경북도 길주군 영북면 유천리 826번지에서 중농 부부의 3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문송은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 맏형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천자문을 통달했다. 광복 직후인 길주농림학교 4학년 때 천도교 청우당에 입당해 길주군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에 저항하며 반공운동에 앞장섰다. 공산 잔재를 없애지 않고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릴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터졌다. 1951년 함경도까지 북진한 국군의 1․4후퇴 작전으로 국군 3사단 18연대의 LST를 겨우 얻어 타고 동해 성진항을 출발해 경북 영일만 구룡포에 도착했다.
친구 셋이 함께 무작정 걸어서 부산으로 갔다. 끼니를 잇기 위해 부두노동을 하다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한 군수품 운송 작전에 참여했다. 이어 동래에 본부를 둔 주한유엔연합 고문단 사령부가 관장하는 거제도 앞바다 작은 섬에서 30명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는 경비대장을 맡았다. 규모는 작지만 북한으로 밀파하는 특수공작 유격대와 함께 파견되는 통신병(무전사) 양성부대였다. 언젠가는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할 때 함께 합류할 기회를 잡기 위해 경비대 근무를 자원한 것이다.
그 후 해병대사령부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중 1957년 8월 진보당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해병대를 그만 두게 됐다. 조봉암의 참모로서 진보당 조직책을 맡았던 전세용과 친구라는 이유로 ‘진보당 비밀당원으로 해병대에 진보당 조직을 만들려 했다’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 15일 동안 해군헌병대에 구속되어 모진 조사를 받았으나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에 앞서 1945년 6월에는 만주에서 독립투사로 활동했던 5촌 숙부가 조카 집에 잠시 들렀다. 만주로 돌아가다가 함북 종성군 상삼봉 세관에서 ‘독립투사 규합에 관한 지령 문건’이 적발돼 모진 고문 끝에 지령문건이 조카 박문송에게서 나왔다고 자백했다. 그 문건의 내용조차 몰랐던 소년 박문송은 필적 감정과 지인의 도움으로 1주일 동안 헌병대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한 달 동안 유치장 신세를 졌다면 본의는 아니지만 독립유공자로 등재됐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독립투사들이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을 받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애국하는 정신과 저항정신이 자신의 혈관 속에도 깃들어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됐다.
그는 1996년 9월 파란만장한 삶의 흔적과 신문․잡지 등에 투고했던 글을 모아 고희 기념문집 ‘가슴에 묻어둔 내 고향 산하’를 책으로 펴냈다. 그동안 길주군 군민회장, 함북중앙도민회 감사와 부회장, 평화통일 자문위원, 성동구 선거관리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나라 발전과 사회에 이바지한 공로로 보사부, 농림부, 국방부, 내무부 장관상, 중앙선관위원장상,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함께 언론에 몸담았던 원로 언론인들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서로의 건강을 확인하고 세상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친목을 다진다. 매월 9일에 만나는 九日會 모임이다. 계성일, 공대식, 곽찬호, 김귀제, 김윤덕, 박문송, 박영식, 박진서, 유승택, 한영섭 등 모두 대한언론인회 회우들이다. 지난 5년 동안 서승벽, 이귀암, 정문식 등 세 멤버가 세상을 떠났다.
산악애호가로 주말마다 전국의 산을 누빈 탓으로 동년배들에 비해 매우 건강한 편이다. 요즘도 하루 한 시간가량 산책을 하며 고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한 인연으로 매주 토요일 아침 7시 아차산을 오르는 고려대 광진구산악회 모임에도 빠지지 않는다. 슬하에 2남 2녀와 손자 손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