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봄을 밀어내고 초여름 비가 부슬 부슬 내리던 지난 5월 20일 낮, 정재호(鄭在虎․81)) 본회 논설위원을 여의도의 한 해물탕집에서 만났다. 그 자리엔 이억순(李億淳․76) 본회 회우, 안영모(安英模․70) 월간 ‘憲政’ 주간, 유재철(劉在喆․67) 본회 회우가 합석했고, 10여 분 뒤 이원홍(李元洪․82) 전 문공부장관이 참석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언론인들이자 우리시대 논객들의 오찬자리가 됐다.
‘고바우 영감’의 우람한 코만큼 돋보이는 ‘정 코’ 정 선배는 막걸리 잔을 권하며 특유의 달변과 유머로 분위기를 주도한다. ‘정 코’의 달변에 이억순 선배가 까칠하게 태클을 걸어 ‘정코’가 좌지우지하는 대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간간이 메모를 하자 ‘실버파이팅’ 인터뷰 자리인줄 알아챈다. 담 넘어 툭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인지 아는 ‘눈치의 달인’들이 아닌가.
“정 코는 화합의 달인이다”
내친 김에 “‘정 코’ 정재호는 누구인가? 한마디씩 멘트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세계일보 주필을 지낸 이억순 숭실공생복지재단 고문은 “정 코는 ×같은 물건이다”라고 강하게 한방 날린다. ‘세상 참 ×같다’고 토해내는 울분의 의미는 물론 아닐 터. 전립선비대증에 양기마저 시들해져 소변보는 기능밖에 못하는 게 대부분 노인들의 거시기인 데 ‘정 코’는 혈기 넘치는 남성의 심벌처럼 정치평론가로 왕성한 집필을 하고, 녹슬지 않은 시대감각을 지녔다는 함의가 담겼다. “‘정 코’야말로 우리시대의 ×노릇을 제대로 한다”고 강조한다.
문득 어느 작가의 소설 한 대목이 떠오른다.
<통유리 너머 마당에서 수놈 시추 한 마리가 발정난 거시기를 덜렁거리며 암놈 시추 꽁무니를 뒤쫓고 있다 간절하고 숨찬 열정이다. 뒤집어 생각하니 ×이란 게 죽었나 싶으면 어느새 무쇠 가래나 성실한 모습으로 불쑥 되살아나 씨감자 파종하기 좋게 텃밭 일궈놓는 짱짱한 연장이지 않던가. 세상살이가 ×같기만 하다면야 더 바랄 게 무에 있겠는가 그 존재만으로도 벌써 엄청난 위안이며 희망이지 않은가. 연인의 자궁 속을 힘껏 헤엄쳐 다니다 진이 빠져 땅바닥에 퍼져버린 수놈의 축 늘어진 잔 등을 암놈이 유순히 핥아주고 있다 하, 엄숙하고도 황홀한 광경이다.>
침묵을 지키던 이원홍 전 장관은 “정 코는 화합의 달인이다”고 정의한다. 이 전 장관과 정코 선배는 각각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특파원으로 도쿄에서 만나 취재경쟁을 하며 우정을 쌓은 사이. 이 전 장관이 한 살 연배다. “정 코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언론계 선후배와 후배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했고, 정치현장에서는 중재와 화합의 달인으로 얽힌 정국의 실마리를 풀었으며, 요즘도 친구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소통한다”고 부연한다.
이 전 장관이 들려주는 ‘정 코’ 일화 한 토막. 1971년 공직자 재산공개 때 정재호는 선대가 물려준 고향 과수원을 판 돈 5000만원이 든 저금통장을 전 재산이라고 공개했다. 당시 5000만원이면 큰돈이다. ‘정 코’는 그 통장과 도장을 후배 언론인에게 맡기며 필요한 곳에 쓰라고 했다. “‘정 코’는 돈에 관해 깨끗한 인물이다”고 강조한다. ‘정 코’가 쓰라고 준 통장을 그 후배는 끝내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
‘박통’이 붙여준 ‘정 코’별칭
참석자 가운데 막내 격인 유재철 한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교수(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세계일보 편집국장)는 “정 선배는 글밭을 일구는 농부”라고 정의한다. “정 선배의 호는 문전(文田), 동남(東南), 두암(斗岩) 세 가지지만 텃밭을 일군다는 ‘글 밭’이 가장 어울린다”고 덧붙인다. “여든이 넘었으면 쉴 만도 한 데 밭을 일구는 농부처럼 부지런하게 집필활동을 하는 모습은 후배들의 귀감이 된다”고 말한다.
전 서울신문 워싱턴특파원과 세계일보 주필을 지낸 안영모 ‘헌정’ 주간에게는 멘트 대신 ‘나의 정재호 론’(정재호 저 ‘대통령의 초상’ 추천 글)을 인용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인물’이 없다고들 말한다. 큰그릇에 인간미 넘치는 그런 ‘인물’ 말이다. 하기야 요즘처럼 사(私)를 앞세우고 인성이 메마른 때, 타(他)를 보듬고, 옳고 그름을 가리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그러면서도 멋까지 아는 낭만파 인물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중략) 지나간 시대에도 ‘인물’이요, 이제 퇴역의 한 자락 속에서도 여전한 ‘인물’이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그를 ‘정 코’라고 부른다. 코가 우뚝, 우람한 ‘코’의 모양새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지만 ‘코’ 이상의 풋풋함과 인간미를 과시하는 만년 청춘의 사나이다. 그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어 종횡무진의 어휘로 웃음과 해학과 때로는 걸쭉한 농담을 흩뿌리고 있음은, 이 메마른 세파에 찌든 우리에게 분명 하나의 낙이요 행운이다>
“화려한 언변과 반경 큰 거동의 뒤안길에는 흘러간 옛 노래를 뽑아 제칠 때 눈동자에 고이는 이슬처럼 다정다감한 감정의 분출이 ‘정 코’의 진면목”이라고 평가한다.
-‘정 코’ 별칭은 누가 붙여주었나요?
“국가재건최고회의(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출범될 때까지 존속) 출입기자시절인 1963년 박정희 의장을 수행하여 유성에 들렀어요. 그 날 저녁 취재진들과 조촐한 만찬이 있었지요. ‘박 통’의 주안상이 늘 그렇듯 안주 몇 가지와 막걸리였지요. ‘박 통’이 내게 술잔을 권하며 ”정 기자는 코가 듬직하다“고 말했어요. 그 뒤 ‘정 코’는 애칭이 돼버렸죠"
-‘정 코’별칭에 거부감은 없는지요?
“내 이름 보다 더 많이 불려 거부감 보다 친밀감을 느낍니다”
직접 운전하며 헌정회 출근
점심 식사 자리에서 ‘절반의 인터뷰’는 이루어진 셈이다. 정 선배와 함께 국회의사당 안에 있는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 사무실을 향하면서 오늘 참석자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지 궁금해 물었다. “특별히 약속하지 않고 짬나면 전화해 만나는 막역한 사이”라고 한다. 2층에 위치한 헌정회 부회장 사무실은 신록이 어우러진 정원과 한강이 굽어보이는 별장 같은 공간이다.
-사무실에는 1주일에 몇 번 나오시는지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닷새 거의 나오죠.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집필을 하며 보냅니다” 책상에는 마감 시간을 앞 둔 ‘헌정’ 육필원고가 어지럽게 널렸다. 일산에서 여의도까지 손수 운전으로 출퇴근한다는 것.
-기고는 주로 어디에 하시는지?
“매월 월간 ‘헌정’에 ‘편집인 포커스’라는 정치평론 칼럼을 연재하고, 월간 ‘경제풍월’에 ‘원로 정치논객 칼럼’난을 마련해줘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신문잡지 등 청탁이오면 집필하지요”
-언론인에서 정계에 입문, 세 차례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후회는 없는지요?
“저는 제8대 백두진 국회의장 비서실장 겸 대변인, 유정회 대변인, 홍보위원회 위원장 등 홍보업무를 하면서 언론인과 소통하여 늘 현역기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언론인의 긍지로 정치논평을 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3자와 관계가 깊어요. 헌정회 대변인 3차 중임, 월간 ‘헌정’ 편집위 의장 3년, 사무총장 3년 역임, 헌정회 부회장도 세 차례 연임이지요.”
다양한 경륜을 펼치는 가운데서도 그는 시사주간지 ‘SEOUL POST’ 회장, ‘INSIDE WORLD’ 회장, 중앙홍보문제연구소장 등 활자와의 인연을 이어왔다.
청소년 시절 시집 두 권 자비출판
-시집 ‘향수(鄕愁)’를 출간한 것은 몇 살 때였나요?
“열 일곱 살 때었지요. 해방 된지 서너 해라 나랏말도 제대로 깨치지 못한 어린것이 시집을 내겠다고 하니 집안에 난리가 났죠. 식음을 전폐한 외동아들이 끈질기게 조르자 어머님이 출판비를 내 주셨죠. 당시 집 한 채 값인 큰돈이었어요.
-자비 출판비를 내 줄 정도면 집안이 부유했던가 보죠?
“아버님이 공직에 계셔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시집이 나온 뒤 월간 대한공론(大韓公論)에서 ‘시집 몇 편을 골라 싣고자하니 양지하시기 바라며 일차 내사 바란다‘는 쪽지를 받았어요. 이튿날 검은 학생복차림으로 사무실을 찾아가니 “정재호 선생 심부름 왔는가” 묻기에 “제가 정재호…”라고 말끝을 흐리자 소스라치게 의자에서 일어선 분이 박목월 선생이었어요. 검정두루마기를 걸친 야윈 얼굴의 박 시인의 자상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박 시인의 추천으로 게재된 시는 ‘꿈’이었다는 것. ‘꿈은 샘찾는 사슴의 혀바닥 /밤마다 나를 핥아 준다 / 밤이면 사슴이 반가워 / 오늘도 달 지기를…’ 6․25 때 불타버렸지만 그런 가락으로 시작 된 것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이듬해 그는 ‘폭포수(瀑布水)’라는 제2시집을 출간했고, 낡은 시집 한 권이 꿈 많던 청소년기의 꿈으로 남았다고 한다.
-신문기자가 된 계기는?
“우연이랄까, 아니 필연일수도 있지요. 6․25 때 대구임시수도 시절 대한통신 간부들과 구상, 마해송, 이해랑 씨 등 문인들이 적산가옥인 저희 집 2층에 기거했어요. 통신수단이 미비한 시절이라 연락해주는 일을 하고 원고정리를 해주면서 졸지에 ‘종군기자’가 돼버렸죠. 그 인연으로 세계통신, 민국일보, 서울신문 정치부 기자, 경향신문 정치부장을 거쳐 정계에 발을 딛게 됐습니다.”
“등산으로 건강 다지고 즐겁게 산다”
-건강을 유지하는 특별한 비결이라도
“학생시절 농구선수로 활동하는 등 운동에 취미가 많았죠. 젊었을 적 등산을 할 때면 주변에서 ‘정비호(鄭飛虎)’라고 할 정도였죠. 요즘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산행을 합니다.”
-담배와 술은?
“예전에 사설을 쓸 때면 줄담배를 피울 정도로 골초였죠. 60년 대 중반 건강 체크를 하니 암 치수가 높다고 하여 담배를 끊었더니 말짱해졌어요. 술도 많이 마셨지만 요즘은 지인들과 환담하며 막걸리 몇 잔 마시는 걸로 족합니다”
“우리나이로 몇 살인지 모를 정도로 나이를 잊고 산다는 ‘정 코’ 정재호 선배는 “일에 미친다는 것은 행복이다”고 강조한다. 한번 일에 몰두하면 깊이 빠져든다는 열정이 넘친다. ‘정 코’의 유머감각은 유연하고 개방적이고 소탈하다. 걸쭉한 유머와 해학은 팍팍한 세상살이의 윤활유다. 나이를 잊고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