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파이팅 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해 權赫昇(79) 선배에게 전화 드렸더니 완곡하게 사양한다. 어렵사리 협의 끝에 지난달 14일 낮, 교보문고 후문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이번엔 장소가 어긋났다. 훤칠한 키에 선비풍인 권 선배는 교보빌딩 후문 로비에서 기다렸고, 인터뷰어는 후문 도서매장에서 찾아 헤맸다.
도서매장 고전 코너에 들러 사진촬영을 한 뒤 프라자호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여곡절만큼 인터뷰 시간도 길었다. 대학(서울대 상대) 졸업을 앞두고 1956년 한국일보 공채기자로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세 차례 역임하고, 서울경제신문 사장, 한국일보 상임고문을 거치며 다른 언론사로 옮긴 적도 없다. 정․관계의 유혹에도 초연하게 45년 동안 언론외길을 걸었다. 흔히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삶도 책 몇 권은 된다고들 말하는 데, 팔순을 앞둔 언론인의 삶을 풀어내기란 만만찮다. 고향 사랑과 孝 정신 함양, 喜壽書展을 연 墨硯, 언론 외길 45년을 ‘인생 3막’으로 요약하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생 3막 : 고향, 꿈엔들 잊힐리야!
누구나 首邱初心이라지만, 悳田 권혁승 선배의 고향 사랑은 남다르다. 인터뷰를 마치고 곧장 고향 강릉으로가 주말께 귀경한다는 것. 7월 15일 강릉에서 열리는 ‘思親文學 강연․세미나’와 ‘백교문학상’ 준비로 바쁘다고 한다.
-思親文學 강연 및 세미나의 취지와 배경은?
“세계적인 석학 아놀드 토인비가 방한하여 한국이 인류문화에 기여한 것은 孝 사상이라고 언급했어요. 孝 사상을 세계적인 사상으로 전승 발전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먼저 신사임당과 율곡의 이름다운 孝의 정신이 살아 있는 강릉을 ‘思親文學의 搖籃’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세미나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강릉을 효의 고장으로 발전시켜 효 사상의 세계화로 효의 한류바람을 일으키고, 사친문학으로 노벨문학상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강릉을 사친문학의 요람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은 오래 전부터 해왔다. 2009년 고향 마을 사유지에 사비를 들여 전통 정자 ‘思母亭’을 짓고, 詩碑와 조각이 어우러진 정자공원을 조성하여 강릉시에 기증했다. 사모정이 들어선 ‘핸다리 마을’의 행정 주소는 강릉시 경포동 죽헌리. 오죽헌의 윗마을이다. 핸다리의 지명은 음짓마을과 양짓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에 나무다리가 있었고, 달밤이면 희게 보여 ‘흰 다리’로 불렀으나 음이 변해 핸다리가 됐다는 것. 생가는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사모정’ 명칭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 데…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 소 몰고 나무 지게를 지며 십리 길의 학교를 다니면서 꿈을 키우던 고향의 옛 모습은 사라졌으나 핸다리와 성황당 앞길을 오가던 어머니의 웃는 모습은 아직도 나를 반겨 주는 것 같다”며 지긋이 눈을 감는다. “사모정이 미래의 주인공인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사랑하고 마을의 전통을 지키며, 효 사상을 함양시키는 정신적 문화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인다.
-‘백교문학상’제정도 효 사상과 고향사랑 연장선상에 있는 건가요?
“지난해 문인들로 구성 된 백교문학회를 창립한 뒤 제1회 백교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식을 가졌습니다. 주제를 孝 사상을 고취하는 작품으로 한정 했는 데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시와 수필 500여 편이 응모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제2회 백교문학상은 오는 8월 30일에 발표하여 문화의 달인 10월 1일에 시상하려고 합니다” 백교문학상을 통해 효친사상이 높아지고 애향심이 불붙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사모정 건립 축시를 쓴 이충희 시인(강원여성문학인 회장)은 “悳田 선생의 고향 사랑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밝혔다. 悳田 선생은 1992년 재경 강릉시민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아 애향심을 모으는 역할에 앞장섰다. 회원들의 글을 모아 ‘고향 사람들’, ‘어머니 아! 그리운 어머니’, ‘대관령 옛길을 걸으며’ 등 3권의 고향 수상집을 펴내 고향의 자긍심을 높였다고 한다.
悳田은 한 때 강릉상고(현 강릉 제일고) 총 동창회장을 7년 동안 맡으면서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1200여명의 후학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는 등 모교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에 앞서 평생 동안 소장해온 장서 4400여권과 서화 60점, 도자기 20점을 강릉시립도서관에 기증하여 화제가 됐다. 대관령 옛길 들머리에 세워진 ‘사임당 사친시비’도 그가 발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오가는 길손들이 잠시나마 어머니를 기리는 명소가 됐다. 그는 고향은 한마디로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인생 2막 : ‘下心’에 墨硯 새기다
-2년 전 서울 백악미술관에서 ‘희수서전(喜壽書展)’을 열었는 데 서예는 언제부터 하셨는지요?
“70대에 접어들면서 서예를 시작했으니 출발은 늦었죠. 원래 바둑이 취미였으나 승패에 너무 집착하게 되고, 책과 멀어져 묵연(墨硯)을 가까이하게 됐어요.” 그는 희수서전 도록 인사말에서 ‘오는 세월 막을 수 없고 가는 세월 잡을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번잡한 세상사에 대해 이제 마음을 내려(下心)놓으려고 한다’고 밝히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스스로의 삶을 담금질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의 일환으로 서예전을 열었다고 한다.
죽마고우인 최무규 수필가는 “고희를 넘긴 나이에 붓글씨를 배워 개인전을 여는 집념, 남들은 10년이 초보라는데 5년 만에 전, 예, 해, 행, 초 5개 서체를 두루 섭렵한 기력, 그야말로 無爲自然 사상에 심취한 단계를 넘어 몸소 실천하는 단계에 접어든 삶의 역정이 담긴 전시회라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졌다”며 “흔히 외우(畏友)라 하지만 정말 이 친구에게는 외경(畏敬)의 마음이 절로 인다”고 말했다.
그의 墨硯심취는 사군자로 이어져 수묵담채에 선비정신을 담는다. “아직은 초보 단계지만 난초의 곡선과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의 고고함, 바람결에 흔들리는 댓잎, 향기 짙은 국화를 보면 무아의 경지에 빠져든다”고 설명한다. 오랜 활자생활에서 자연에 귀의하듯 흑백의 濃淡에 스스로를 담는다. 그는 “붓글씨를 쓰고 사군자를 치며 묵향에 빠질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인생 1막 : 45년 언론외길 걷다
화제가 언론계로 넘어가자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권혁승 선배는 언론계를 떠난 뒤 ‘한국경제전략연구원’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한국경제를 진단하고 있지만, 그는 “언론인이란 호칭을 가장 선호한다”고 말한다. 10여 년 전에는 후배기자들이 그의 ‘기자 40년’을 기려 기념회를 헌정한 언론사에서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한국의 격동기를 언론인으로 살아오면서 ‘역사란 무엇이고 그 안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그가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기간동안 유신 긴급조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남북적십자회담, 12․12와 언론통폐합, 문민정부 출범 등 말 그대로 격랑의 세월이었다.
-한국일보에서만 근무했는 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시다 시피 유신시절 언론의 간섭은 탄압과 마찬가지잖아요. 신문기자들도 민주화를 요구하다 수많은 언론인들이 해직 당하는 고통을 겪었고요. 당시 한국일보는 당국으로부터 해직 대상 리스트를 받았으나 해직시키지 않고 포용했습니다. 그 결과 금융제재를 받기도 했지만 한국일보만 ‘해직언론인 투위’라는 간판이 걸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1980년 언론통폐합에 따라 서울경제신문이 폐간됐으나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복간작업에 참여했고, 서울경제사장을 역임했다.
-당시 한국일보가 정상의 신문으로 자리잡은 힘은 무엇입니까?
“가족적인 분위기가 성장의 기폭제였다고 판단합니다. 백상 장기영 社主는 정초 때면 전 사원을 집으로 초대하여 인화단결을 강조했어요. 기자들은 언제라도 간부 집을 허물없이 드나들며 소통의 시너지 효과가 신문의 경쟁력을 키우고 수많은 특종을 하게 됐습니다.” 또한 “사주가 금융인으로 경제에 해박했고,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어지는 근대화과정에서 경제부 기자로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때는 신문, 통신, 방송 공동취재단장을 맡으셨지요.
“그 때만 해도 남북적십자회담은 분단 이후 초유의 역사적인 사건이었지요. 외신들은 휴전선을 넘어 평양에 가는 것은 달나라에 가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카메라를 메고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린 평양회담장과 평양주변을 취재할 때 북측 인사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감시를 했어요.”
김일성대학을 가기로 합의했으나 갑자기 일정을 바꾸어 만경대를 참관하기 위해 버스를 탔는 데, 북한라디오 방송은 남측인사들이 만경대 참배를 끝내고 감격했다고 보도하여 고소를 금치 못했다고 그 시절을 회고한다.
요즘 신문과 기자들에 대한 소회를 묻자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신문의 비판기능이 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하며 “기자들은 패기가 부족하다”고 질책한다. 옛날에는 아침도 먹지 않고 장관이나 정치인의 집을 찾아가 뉴스원과 식사를 하며 취재를 했는 데 요즘은 그런 열정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는 것. 또한 “모든 기사는 왜곡되지 않아야 하고, 국가와 국민의 나침반 역할을 신문이 담당해야한다”고 말한다. “역사가 풍랑을 만나지 않고 순항 할 수 있도록 언론이 선도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덧붙인다.
가벼운 트레킹과 등산으로 건강을 다지며 “바쁘게 살다보니 아플 틈도 없다”며 웃는다. 술과 담배는 항공기사고를 당한 뒤 끊었다고 한다. 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목련장, 은탑산업훈장, 동곡언론상을 받았다. 저서로 ‘재벌들’ ‘대통령의 경제학’ 등을 펴냈다. 부인 韓英淑(75) 여사 사이에 1남 1녀. 장녀 志炫씨는 주부. 장남 純一씨는 대학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