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金哲회원의 언론인장이 지난달 15일 하오 5시 삼성의료원 영안실에서 대한언론인회 洪元基회장과 趙昌化 명예회장, 鄭雲宗 사무총장 및 고인의 유자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헌화와 묵념으로 시작된 장례엔 鄭총장이 고인의 약력을 보고한데 이어 한국방송기자클럽 吳健煥회장이 추도사를 낭독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吳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이제는 당신의 명쾌한 정국분석과 날카로운 인물평을 들을수도, 좌중을 휘어잡던 그 유쾌한 유머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하며 “마지막으로 당신이 아끼던 동료 ․ 선후배 언론인들을 대신해서 큰술 한잔을 올리오니 더이상 건강 걱정마시고 한숨에 들이켜 달라”고 말해 장내를 숙연케 했다.
吳회장은 1970년 대한일보 견습 9기로 입사한 동기로 고인이 생전에 뜻을 함께한 몇 안되는 ‘百年知己’중의 한 사람이다.
이날 장례에 참석한 언론인회 멤버들은 국내외적으로 점차 더 어려워지는 시기에 진정한 보수진용의 뚜렷한 논리와 진로를 제시한 ‘큰 논객’을 잃었다는 점에서 그의 갑작스런 타계를 아쉬워 했다. 특히 조객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엄청난 술을 마시면서도 놀랄만큼 많은 독서를 한 사실을 회고하기도 했다.
언론인장에는 申東澈, 李炯均, 文明浩 등 16대 부회장들과 趙載麟, 金永凡, 閔正基 회원 등이 참가했다. CBS 사장을 역임한 李廷湜회원은 개인사정으로 장례식 직전 빈소를 떠났고 언론계출신 국회의원을 지낸 金鎭河, 辛卿植두분 회원은 교통체증에 막혀 언론인장이 끝난뒤 빈소에 도착, 헌화했다.
한편 1945년 9월 서울에서 해방동이로 태어난 고인은 景福고교와 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ROTC 5기로 임관, 탁월한 외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연락장교로 미8군에 파견근무하기도 했다.
대한일보에 입사, 주로 정치부기자로 뛰었고 1973년 신문이 폐간된 후 동아일보로 옮겨 정치부차장, 다시 조선일보로 스카우트되어 국제부장 등으로 활약했다.
김영삼대통령 시절 대통령정무비서관으로 근무했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 집권당의 대변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정계은퇴 후엔 뉴서울CC대표이사와 양평 TPC대표등을 역임했다.
그는 조선일보 국제부차장 시절인 1988년 10월 ‘擴大指向의 한국-민족국가의 재구성론’이라는 298쪽짜리 저서를 펴내 그 자신 특유의 비전을 제시해 그 당시 언론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골프장대표시절인 2006년엔 자신의 실전 경험을 곁들인 ‘18홀속의 人生-김철의 골프 칼럼집’을 내놔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가족은 소망교회 집사로 봉사하는 강금옥여사와 미혼인 석원 수경 등 1남 1녀가 있다. ROTC 42기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아들은 현재 연세대학원정외과에 적을 두고 박사과정을 이수중이며 딸은 중견화장품 메이커의 홍보팀에 근무중이다.
4일장을 지내는 동안 고인의 빈소엔 전․현직 국회의원과 부의장 등을 비롯, 각계인사 500여명이 다녀갔으며 화장된 유해는 곤지암 근처에 위치한 소망동산에서 수목장으로 뿌려졌다. 이로써 해방되던해 자유의 몸으로 태어나 66년의 격동기를 살다간 ‘인간 김철’의 이름 두글자는 ‘역사속 인물군(人物群)’에 편입됐다.
<추도사>
홀연 이승을 떠나신 김 철 형을 추모하면서 //
오건환(본회 회우 한국방송기자클럽 회장)
김 형!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식입니까? 김 형 주위의 그 많은 친구들과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와 술잔을 주고받고 누구와 웃음을 나누라고 홀연 떠나셨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셨소? 김 형이 아프다는 소식만 이런저런 인편을 통해서 전해들은 것이 불과 서너 달 전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한 비보를 받게 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구려.
김 형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에 “응, 술병이겠지”하면서 가볍게 흘려듣고 김 형이 강철 같이 단단한 몸을 지닌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술만 멀리하면 곧 낫겠지” 하고는 무심히 지냈는데 간간이 들려오는 말로는 점점 병이 깊어가는 것 같다는 전언이 있었는데 끝내 이런 날벼락이 날아왔군요.
김 형! 이제 더 이상 김 형의 그 명쾌한 정국 분석과 날카로운 인물평을 들을 수도, 좌중을 휘어잡던 그 유쾌한 유머도 들을 수가 없겠군요.
김 형이 건네던 술잔도 이제는 옛 기억으로만 남겠군요. 대한일보 폐간으로 4년 만에 헤어졌던 우리는 서로 다른 신문사와 방송사에 있으면서 간혹 취재 현장에서만 만나다가 일선을 떠난 뒤 70을 앞두고 대한언론인회 회보 편집을 위해 회동하면서 지난 2년 간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지요. 편집회의에서 나는 늘 김 형의 혜안에 놀랐고 날카로운 정국 분석과 뚜렷한 지향점 제시에 언제나 탄복했습니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되는 확고한 이념을 바탕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유려한 글로써 펼치는 김 형의 칼럼은 언제나 회보를 빛내주었고 김 형에게 원고를 부탁하면 마음이 놓이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김 형과의 인연은 40여 년 전 김 형을 비롯한 13명이 지금은 없어진 대한일보 문을 두드리면서 부터였지요.
수습기자 시절부터 김 형은 우리 입사 동기들을 주위에 불러 모으는 중심인물이었지요. 특유의 유머 감각과 정보력, 뛰어난 상황 분석을 통해 회사 내부 소식을 알려주었는가 하면 때로는 데스크의 인성까지도 분석해줘 사회 초년병인 우리로 하여금 회사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기자였지요.
그러기에 대한일보 폐간 후 그 시절 명실상부 최고의 신문이라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드나들며 쟁쟁한 해당 회사의 수습기자 출신들과 당당히 경쟁했고 필명을 드높인 끝에 정계에 입문해 명 대변인으로 활약하기도 했지요.
김 형, 잠시 정치에 몸담기도 했지만 당신은 분명히 유능한 기자였고 명 기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내 짐작입니다만 지난 40여 년 동안 김 형 하면 동격으로 떠오르던 술이 끝내 김 형을 쓰러뜨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게 즐기고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술에 김 형이 쓰러지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형을 아끼던 동료, 선후배 언론인들을 대신해 큰 술 한 잔 올리니 더 이상 건강 걱정 마시고 마음 놓고 단숨에 들이켜십시오. 이승에 남겨놓은 모든 인연도 훌훌 털고 편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