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 畿 기자가 퇴근 후 서울 사직동 명월네(속칭:대머리집)에 들렀다. 먼저 와 있던 경향신문 昔泉 吳宗植 편집국장에게 인사를 하자, 대작을 하던 金凡父 선생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閔 기자는, 교정기자라 하지 않고 ‘字學’으로 언급한 昔泉 선생의 교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간미에 경탄했다고 술회한다. 자유당 정권 말기시절이다.
閔 畿는 초지일관 교열기자로 언론계를 마감했고, 교열에 자긍심이 강했다. 말과 글에 대한 열정 또한 뜨거웠다. 언론 현장에선 ‘閔博’과 ‘道士’로 통했다. 깐깐한 성격에 불의를 보고 못 참는 강직한 외골수로 ‘폭동주모자’ ‘정신병자’ ‘깡패’라는 악칭까지 들은 기인으로 통했다. 신문사 퇴직 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사전편찬 작업 봉직시절엔 집필, 편집, 교열 3개 위원직을 도맡아 ‘성스러운 선비’소리를 들었던 ‘字學 선비’다.
본회 閔 畿 원로회우를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 날,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주공아파트 자택에서 만났다. 지하철로 찾아오는 코스를 자상하게 설명하고 동․호수를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산역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올해 여든 여섯. 우리나라 셈으로는 여든 일곱이지만 꼿꼿한 단신에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다.
“친구와 후배 등 내 집 초청은 처음”이라고 밝힌 노부부만 사는 아파트다. 방 두 곳은 국내외 서적으로 빼곡하다. 서재에는 문단의 선배 金東里 선생이 1973년에 써 주었다는 ‘雲歸山 水歸海’ 휘호가 색이 바랜 채 걸려 있다. 거실의 소박한 소파와 앉은뱅이 탁자가 주인의 성품처럼 군더더기 없다.
외국서적코너 ‘단골 立讀翁’
-건강은 어떻게 챙기세요?
“어려서부터 잔병치례를 하면서 병력이 많았으나 오기로 버티면서 극복했기에 면역이 생긴 것 같다”면서 “큰 불편은 없다”고 한다. 기자 초년 시절엔 수면을 빼앗긴 바쁜 나날 속에 영양실조로 저혈압에 시달렸다. 심한 노이로제에 정신분열증세도 있었다. 술은 반주로 소주 한 잔 할 정도로 끊다시피 했지만 담배는 아내의 지청구를 들으면서 여전히 피운다는 것. 베란다 귀퉁이가 흡연실이다.
“10여 년 전만해도 아내와 함께 안양천변을 산책하며 가벼운 운동을 했지만 요즘은 짬나면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 들러 책을 읽는 게 소일거리이자 운동”이라고 말한다. 한 때 북클럽 모범회원이었던 그는 대형서점 외국서적코너 ‘단골 立讀翁’을 자처하며 “도서관처럼 이용 한다”는 것.
-요즘도 집필 활동은 하시는지요?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소설을 거의 쓰지 않고 있어요. 여과되지 않은 정보의 홍수 속에 정신은 오히려 황폐화 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문학은 인간의 가치를 지키고 내면의 세계를 성찰하는 건데 문학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힘든 사회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은 “말과 글에 관한 원고와 잡문을 가끔씩 집필하는 게 고작”이라면서 지난 봄 고락을 함께 했던 시인 李敬南 선생의 조사를 쓴 게 기억에 남는다는 것.
-여행은 새로운 세상과의 소통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곳,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곳, 좋아하는 소설의 좋아하는 주인공이 살았던 장소 등을 주로 둘러보았지요.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공원, 톨스토이박물관을 비롯하여 실크로드의 中心路 사마르칸드, 몽골 대초원 등을 누볐지만, 천연의 자연 분지 안에 자리 잡은 성스러운 도시 중국의 敦煌과 낙타를 타고 둘러 본 오아시스 月牙泉이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서울신문 수습기자 1기로 출발하여 교열부에만 근무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울대 문리과대 어문학부에 다니던 시절 6․25가 터져 부산으로 피난가지 못하고 학업은 중단 됐어요. 수복 후 경기도 양평 용문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중 서울신문 견습기자 모집 벽보 社告를 보고 원서를 내 합격했어요” 1차 필기시험에 7명이 합격했고, 최종 면접에서 2명이 뽑혔다. 그는 교정부를 자원했고, 예과 동기생인 嚴基成은 사회부로 갔다. 당시 사회부장 吳蘇白은 점심을 사며 사회부 근무를 권했고, 정치부와 문화부에서도 오라고 했다. “싫어질 때 까지 교정부에 있겠으니 그대로 놓아두십시오”라고 거절했다. “나의 꿈인 문학을 위해 교열은 단지 밥벌이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宋基鳳 교열부장 밑에서 교정․교열을 꼼꼼히 배우면서 교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한 신문사 두 번 입사 3곳
-교열기자로 명성을 떨치며 여러 신문사를 옮겨 다니셨지요?
“철새처럼 떠돌아 다녔어요. 당시 서울시내 5대 일간지 가운데 한 신문사에 두 번씩 입사와 퇴사를 한 신문사는 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3곳이었지요. 이밖에도 신아일보 교열부 차장, 중앙일보 교열부장 대우, 현대경제일보․일요신문 편집부국장대우 교열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스카우트 제의도 많았지만 강직한 성품 탓에 수틀리면 사표를 냈고, 늘 주머니에 날짜를 비워 둔 사직서를 넣고 다녔다. 신문사 근무 40여 년 동안 18번 사표를 쓰고 9번은 수리가 안됐다고 한다.
-강직한 성품 탓에 에피소드도 많았지요?
“경향신문에 근무하던 두 번 다 韓昌愚 선생이 사장이었어요. 正論을 편 대쪽 같은 분이십니다. 가판경쟁이 치열하던 시절의 어느 날 최종 강판이 늦어지자 韓 사장은 교정부에 대고 “교정부 놈들은 눈깔 두 개 필요 없어! 한 갠 빼버리고 해! 발가락으로 교정을 봐도 벌써 다 했겠다. 그래도 이렇게 늦진 않겠다”고 화를 벌컥 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냥 넘어 갈 대쪽같은 성미의 閔 畿가 아니던가.
“사장 눈깔도 두 개가 필요 없다! 한 개는 빼서 포케트에 담아가지고, 한 개로만 감독해도 충분하다”고 되받았다. 물론 사표 쓸 각오를 하고 서다. 해임발령을 밥 먹듯이 해 오신 분인데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대쪽같은 사장의 기세와 대쪽같은 말단 교정기자가 정면으로 부딪쳤을 땐 아무런 불꽃이 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때 체험했다”고 술회한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올챙이 기자시절에도 드러났다. 서울신문 견습딱지가 떨어지면서 편집국장과 宋基鳳 교열부장이 2~3개월마다 은밀하게 閔 기자 월급만 올려줬다. 그는 부장에게 “나만 월급을 올려주면 ‘월급벌레’ ‘돈벌레’로 욕이 될 터이니 다른 기자와 함께 올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 뒤 ‘나홀로 월급’ 인상은 뚝 끊어졌다. 혼자 특혜를 누리는 것을 사양한 것은 해외여행 거절에서도 드러났다. 해외여행이 특전이던 1955년 서울신문 趙東勳 편집국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이라며 8개월간 미국 언론계 시찰 케이스로 閔 기자를 추천했다. “나는 미국 언론계에서 배울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으니 대신 엄기성 기자(입사동기)를 보내 달라고”고 추천하니 趙 국장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하얘졌다고 한다.
‘自由文學’ 통해 登壇…온실문학 타파
閔 畿 원로회우는 마감시간에 쫓기는 언론현장을 지키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自由文學’을 통해 登壇했다. 1959년 작품 ‘贓物’로 金 松 선생의 1회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 작품 ‘風語’로 2회 추천 때는 김 송, 白 鐵, 安壽吉 선생의 공동 추천을 받았다. 당시 문학지로는 ‘現代文學’과 ‘자유문학’ 두 개 밖에 없던 시절이다.
-대표작을 꼽는다면?
“단편은 ‘인간괴뢰’와 ‘장물’, 중편소설은 ‘전쟁이 드나드는 방’, 장편소설로는 ‘渤海記’(1981), ‘몽고 五國志’(1990)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중앙일보 재직 시절인 1965년 12월 첫 단편집 ‘도로아미타불’(양우사)을 출간했다. 백 철 문학평론가는 “저널리즘에서 자란 눈으로 사회를 고발하는 작가가 閔 畿 씨다. 거의 독혈증세에까지 빠진 듯한 사상문학을 하느라 篤筆을 휘두르고 있는 작가로는 이 작가를 빼고는 없을 것이다”고 평가했다. 소설가 黃順元은 “追隨主義的 온실문학을 타파하려는 패기가 경탄할만하다”며 사회비판의 안목을 높이 평가했다. 이듬해 2월에 열린 출판기념회 때는, 張基榮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고 서독 방문에서 돌아온 이튿날 참석하여 축사를 해주는 등 성대하게 열렸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밖에도 단편집 ‘이목구비傳’(1990), 번역 ‘투루게네프의 父子’(1960), 역 편저 ‘아가페의 말과 글’(1984), 에세이집 ‘살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산 것’(1․2․3권, 2004) 등을 펴냈다.
-유난히 필명과 호가 많은 이유는?
“문필 활동에 뜻을 두었기에 젊었을 적부터 지금까지 自號, 匿名, 筆名 합하여 10여개가 되지요. 처음 생각은 러시아 작가 체호프가 젊은 시절 ‘차혼데’라는 필명으로 글을 발표했듯이 나도 건방기가 넘치던 광복시기에 그를 본뜨고자 했다”며 웃는다. 문단에 등단 할 때는 몇 기(幾)자를 써 필명을 ‘閔 幾’라고 했으나 간행된 문예지상에 오자가 나서 ‘閔 機’로 표기 된 적이 있었다. 그 뒤 교열 경시풍조에 한탄하며 ‘주간한국’ 소식통란에 ‘閔 畿’를 새 필명으로 쓴다는 광고를 낸 뒤 필명으로 쓰고 있다.
호는 평생 알몸으로 되산다는 뜻의 소범(甦凡․蘇凡) 두 가지만 쓴다고 한다. 소범은 현실(平凡)과 이상(非凡)을 조합하여 원만한 인간형으로 새로 나도록 힘쓴다는 좌우명을 상징한다는 것. 본명 龍基는 공문서에서나 쓴다.
-언론환경이 급변하면서 교열부의 위상이 약화된 것 같습니다.
“신문제작이 CTS화되면서 어떤 신문사는 교열부를 아예 없애거나 편집부로 흡수통합하고,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삼거나 비정규직화 하는 등 교열기자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안타깝다.”고 개탄한다.
閔 원로회우는 재직 시 교열기자 위상확립에 앞장서 왔다. 중앙일보 창간멤버 시절 경영 종합진단을 하면서 ‘교정은 비전문직으로 고졸 정도면 된다’며 교정부 기자 9명에서 7명을 감원하겠다고 했다. 그는 “경영진단팀장은 출판사에 가서 ‘경영학개론’을 직접 교정해 본 뒤 보고서를 다시 쓰라”고 일갈 하는 ‘반박문’을 작성해 제출했고, 감원이 전면 보류되는 결과를 얻어냈다.
교열기자의 위상을 높이려는 그는 1975년 10월 17에 창립된 ‘교열기자회’(현 한국어문기자협회)의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어문기자회 계간誌 ‘말과 글’ 창간 뒷바라지를 했고, 종신고문으로 장기간 어문진단 에세이와 ‘靑筆紅筆’欄을 고정 집필해 왔다.
“교열기자는 박학다식 해야지요”
-후배 교열기자에게 조언 한 말씀
“교열은 치밀한 인간 두뇌의 영역이고, 교열기자는 문자문화와 언어문화의 마지막 지킴이들입니다. 따라서 교열기자는 박학다식해야 하고,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의 氣槪같은 냉엄한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강조.
언론관련 저서로는 ‘신문교열 연구 凹凸의 激戰地’(1979), 번역서 딘 모건의 ‘大穀物商戰’上․下(1981) 등이 있다.
-교열기자와 작가인생의 후회는 없으신지요?
“교열을 하면서 글 쓴 애환의 신문사 생활, 후회 없습니다. 한 우물로 교열기자를 한 덕택에 작가가 될 수 있었고, 퇴사 후에도 기업체 社史편찬작업에 몸담을 수 있었지요. 이런 저런 관록을 인정받아 문학과 어문관련의 글을 꾸준히 집필할 수 있었으니 모두 고마운 일이지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강직하게 살아온 날들을 긍정적으로 되돌아 볼 수 있는 것도 참 아름다운 실버인생이다.
1967년 3남 1녀를 남기고 아내(金貞玉)가 타계 한 뒤 이듬해 金千代子(80․일본서 출생 한국인)여사와 재혼, 여생을 의지하며 오붓하게 지낸다. 둘째아들 庚俊 씨는 조선일보 교열부 기자로 아버지의 대를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