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진보세력은 활력이 넘치고 보수 세력은 늙었다. 진보세력이 희망 비행기로 제주 강정마을로 집결하고, 희망버스로 부산 한진중공업사태에 개입 한 뒤 서울에서 촛불집회를 여는 기동성을 발휘할 때, 보수진영은 항의집회로 맞불을 놓을 뿐 왜소하고 미약하다. 진보세력이 트위터로 대중들에게 파고 들 때 보수 세력은 대중과의 소통은 완행열차다. 진보 세력들이 목청을 높이며 편 가르기를 하고 나라의 근본을 흔들어도 보수진영은 우국충정의 비판과 규탄의 목소리만 낼 뿐 무기력하다. 우리사회가 한 쪽으로 기울지 않은 것은 그나마 행동하는 보수가 있기 때문이다.
#개혁하는 보수 앞장
“부당한 조직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영원한 자유인’ 李度珩 회우는 보수의 가치를 실현하는 행동하는 보수다. ‘개혁하는 보수’의 기치를 내 걸고 22년 째 월간 ‘한국논단’을 발행하는 그를 지난 20일 프레스센터 1층 커피숍에서 만났다. 반백의 머릿결, 회색정장에 노란 실크넥타이, 보랏빛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노신사다. 올해 우리나이로 79세. 당뇨로 음식을 조절하고 하루 만보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말문을 연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게 극우라는 말입니다. 해방 후 신탁통치시절 공산주의 사람들이 반대세력인 우익을 폄하하기 위해 만든 용어가 극우 아닙니까?.” 그는 오히려 “종북․좌파세력의 시위문화가 극좌적이 아니냐”며 반문한다.
-‘한국논단’을 창간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나는 병영 생활 14년의 인생 1모작과, 신문기자 28년의 인생 2모작을 바탕으로 정통보수의 가치를 지키며 종북․좌파를 질타하며 인생 3모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1987년 6․29민주화선언이후 내가 보고 느낀 나라와 사회는 벌겋게 물들어 가고 있다고 판단했어요. 기존의 가치는 모두 顚倒되고, 볼세비키 혁명이나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연상케 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도덕의 파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어 가슴이 무겁고 착잡했습니다.”라고 회고하면서 “파괴적, 혁명적 작용에 반동할 보수정당에 기대를 걸 수 없었고, 언론은 새 권력에 영합하기에 바쁘고, 지식인들은 左顧右眄 눈치만 살피는 현상이 안타까워 보수의 힘을 모을 보수우파신문이나 시사월간지의 창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보수우파신문창간은 시도해 보셨나요?
“몇몇 지식인과 재벌급 기업인들을 설득해보았지만 난색을 표명하면서 월간잡지를 만들어보라며 약간의 창간기금을 내놓았어요. 참여기업은 주식회사 ‘한국논단’의 주주가 되기로 했지만 본인 명의는 드물고 부하 명의를 내 걸 정도로 눈치를 살폈지요”
-‘한국논단’ 발행은 순조로웠는지요?
“창업 맴버는 7명으로 기업에서 각 2500만원씩 출자했고, 나도 1000만원을 내놓아 1억 8500만원을 모았어요. 그 뒤 일부 대기업과 소기업, 개인 등 주주가 50명으로 늘면서 11억 800만원으로 출범 했습니다”
#‘한국논단’ 22년 째 발행
-창간은 1989년이었지요?
“맞습니다. 그 해 8월 20일 고고의 성을 울리며 1만부를 찍었지요”
-창간호의 독자 반응은?
“시판결과는 비참했죠. 전국 서점에서 겨우 250부가 팔렸어요. 대표이사 사장 겸 발행인 양호민 선생이 전경련을 찾아가 창간 취지를 설명한 결과 매월 2000부씩 사주기로 약속 받았습니다.”
-‘한국논단’ 설립 주역으로 1992년부터 발행인 겸 대표이사를 맡았고, 22년 동안 유지해 온 걸 보면 저력이 대단합니다.
“관심을 갖고 꾸준히 지원해주시는 분들이 있고, 제작비를 최대한 절감하고 있습니다. 도곡동 오피스텔 한 칸을 빌려 숙식을 해결하면서 만들고, 직원 없이 필요 할 때 아르바이트를 씁니다. 독자관리와 발송 등은 아내가 도와주고 있습니다.”
-‘한국논단’을 발행하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지요?
“진실을 밝히고 정도를 걷는다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1997년 2월호에 ‘노동운동인가, ’노동당‘운동인가’라는 글로 민노총으로부터 명예훼손혐의로 고소를 당하고 1억원의 손해 배상을 하라는 것이 형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고소당한지 5년 만인 2005년 1월 22일 대법원은 이도형의 손을 들어줬다. ‘公的인 존재의 명예’보다는 ‘언론의 자유’가 우선 된다는 취지의 판결은 한국 언론의 승리였다.
1997년 10월 8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한국논단 주최로 ‘대통령후보 사상검증 대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는 자민련 김종필,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민주당 조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차례로 나왔고, 3개 지상파 방송이 생중계했다. 그해 12월 김대중 후보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때를 전후하여 경실련, 참여연대 등 5개 시민단체는 이도형을 명예훼손으로 민․형사소송을 제기하고 서울 청운동 집(당시 시가 6억원)을 가압류했다. 출국금지도 당했다.
#고집 꺽지 않는 ‘獨不人’
정권이 바뀌면서 새정치국민회의는 ‘공직선거법위반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이도형을 형사고발했다. 그동안 국민회의측에서는 똑같은 사안으로 그를 세 번 고발했으나 모두 무혐의 처리됐으나 같은 사항으로 네 번째로 고발당한 것. 검사로부터 불기소됐던 사건은 이때부터 검찰항고기각, 검찰 재항고기소명령, 서울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대법원 파기환송, 서울고등법원, 대법원 확정판결에 이르기까지 7년 5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중형이 내려졌다. 가압류 당했던 집은 경매에 붙여졌다. “평생 글 쓰고 책 내고 강연 다니며 번 돈으로 마련한 보금자리를 빼앗겨 빈털터리가 됐다”며 씁쓸하게 웃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私怨은 전혀 없어요. 할 말은 많지만 故人아닙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DJ의 기회주의적 처신과 거짓말, 그리고 대북정책입니다.”
이도형 회우는 2007년 ‘반골 이도형의 自傳的 현대사 조선인․ 한국인․ 비한국인’을 펴냈다. 책 말미에 그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가 소상하고 다양하게 기술되어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현 고문)은 ‘이도형은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가는 獨不人 ’이라고 정의했다. ‘수많은 회유와 타협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끝내 지키는 독불인, 할 소리는 상대방이 듣기 싫어해도 하고, 그가 써야 할 글이라면 누가 뭐래도 자기생각대로 쓴다’고 했다.
권력이나 권력기관에 태생적으로 거부 기질이 있는 그는 전형적인 反骨이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1970년 국방부 출입기자 시절 ‘수경사 초병 충돌사건’으로 군에 연행되어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앞에서 ‘당신 언제가 내 손에 죽을 줄 알라’고 큰소리친 데서 그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났다.
‘피고인 이도형’의 무료변론을 맡았던 임광규 변호사는 ‘남의 궂은일에 앞장서는 의협심 강한 언론인’이라고 했다. 임 변호사는 1996년 6월, 당시 서강대학교 박홍신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농성하던 노동조합을 비판하여 소송을 당하자 그의 변론을 맡았다. 박 총장과 면식이 없는 이도형은 이듬해 5월 노재봉, 오제도 씨 등 보수인사 70여명과 함께 후원회를 조직하여 ‘박홍 신부 구하기’에 나섰다. 당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도형 대표는 “대표적인 반 좌익 인사인 박 전 총장에 대한 탄압을 물리치기위해 후원회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25시’ 주인공 모리츠 닮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도형 회우는 서울공업 5학년에 다니던 열일곱 살 때 6.25가 터져 제2국민병으로 징집됐다. 대구에서 단기 훈련을 마치고 군번 0183900을 받은 육군이병이다. 몸이 불편해 의병제대를 했으나 미흡한 병무절차 때문에 군 복무경력이 깔끔하지 않자 군 장교 시험에 응시하여 다시 군복무를 마친 특이한 병력 소유자다. 게오르규의 ‘25시’ 주인공 모리츠처럼 강제노동과 전범, 또 다시 체포되는 비운의 전철이 비슷하다.
-게오르규의 ‘25시’ 주인공 모리츠를 많이 닮았습니다
“의병제대 후 대구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왔고, 굶주림에 지쳐있었죠. 미군 병사를 만난계기로 미 3사단 10포병대대 전방관측병의 일원이 되어 계급도 군번도 없는 전투병이 되어 9개월 동안 전선을 누비다가 파편을 맞아 후송됐습니다.”
포대장은 서울에 가면 통역으로 취직할 수 있을 것이라며 추천서를 써 주었다고 한다. 1951년 12월 추천서를 들고 군사정보대 본부(MIC 현 강북삼성병원자리)를 찾아갔다. 영어시험을 본 결과 ‘2급 통역’으로 합격하여 근무했다. 그러나 의병제대를 입증할 병역필증을 뗄 수 없고 병역미필자로 분류되어 통역생활이 여의치 못해 통역장교 후보생시험에 응시했다. 1953년 9월 대구 육군고급부관학교에 입교하여 육군중위로 임관하여 장교로 두 번째 군복무를 하게 됐다. 1964년 11년 5개월간의 정훈장교를 마감하고 전역했다.
-전역과 동시에 조선일보에 입사하신 건 특채였나요?
“정훈장교시절인 1960년 4월 28일 조선일보 견습기자 시험을 쳤습니다. 5월 14일 1차 합격을 했으나 제대할 가망이 없어 2차 시험은 포기했던 게 조선일보와의 인연이 됐습니다.” 그는 조선일보 입사 후 주월특파원, 주일특파원, 외신부장, 논설위원 등을 거치며 28년 동안 펜으로 사회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고발해 왔다. 외신부 기자 시절, 이영희 부장과 갈등을 겪었고, 좌편향 데스크 밑에서는 일을 못하겠다며 전쟁터인 월남특파원을 자원할 정도로 개성이 강했다.
#정통보수파 결집에 앞장
-신문기자시절 기억나는 특종은?
“1981년 9월 일본 특파원시절 일본교과서 왜곡기술 폭로였습니다. 일본 문부성을 비롯한 관계부처의 담당자들을 면담하고 확실한 자료를 근거로 기사를 쓴 것이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그 결과 조선일보가 앞장서 벌인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급캠페인에 400여억원의 성금이 들어왔지요. 당시 문화공부부에서 훈장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을 거절했습니다. 한․일 기사로 훈장을 받는다는 게 기자의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교과서 왜곡기술 고발의 주도적인 보도로 그는 1983년 중앙대학교 설립자인 승당 임영신 선생을 기려 제정한 제1회 승당언론상을 수상했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보수의 길을 걸어 온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정통보수파들의 결집체인 ‘미래한국 국민연합(한국연합)’의 창립에 앞장섰다. ‘한국연합’은 종북 세력과 반국가단체를 척결하고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바로세우기 위해 발족했다. 이도형 회우는 ‘한국연합’ 공동 대표로 이 달 7일과 9일 프레스센터에서 창립1주년 기념 지도자 포럼을 여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보수의 기치를 펴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인․ 한국인․ 비한국인’(2007, 청미디어), ‘벚꽃은 다시 핀다’(1973, 범서출판), ‘일본, 다시보고 생각한’(1986, 조선일보사), ’黑幕(1986, 조선일보사) 등이 있다.
“10평 남짓한 ‘한국논단’ 편집실 좁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읽고 쓰는 즐거움이 한겨울 새벽 거지가 모닥불 쬐는 맛처럼 포근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는 이도형 회우는 “한국논단 제작을 위해 빚도 얻으러 다녔고, 컴맹인 나를 도와 독자관리를 해주고 발송일도 도와주는 아내가 한 없이 고맙고 아름답다”고 덧붙인다. 50년째 해로하고 있는 權五壽(75)여사와의 사이에 1남 4녀. 아들 鎭旭(42)씨는 삼성 일본지사에 근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