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세월 속에 활자매체와 영상매체를 오가며 언론의 바다에서 40년 간 비교적 순항한 셈이지요”
인생황혼 길목에 접어들었다는 崔瑞泳(79) 회우의 첫 마디다. 그는 신문기자로 출발하여 경향신문 정치부장과 논설위원, KBS 보도국장,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 사장, 노원 케이블TV 사장을 거쳐 대학 강단에서 후진들을 지도했다.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유유자적하게 지낸다. 말꼬리를 말아 올리는 강원도 사투리와 강단 넘치는 작은 체구에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다. 지난 11월 9일 오후 2시 회현동에 위치한 서울렉스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담채색으로 담백하게 풀어내는 인생역정을 들었다.
-내년이면 여든인데 정정 하십니다.
“지병은 없어도 80년 가까이 써 먹었으니 기계라도 낡을 때가 됐잖아요?.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요. 책이나 읽고, 오후에는 바둑을 두거나 헬스클럽에 나가며 친구들과 가끔씩 만나 담소를 나누고, 등산을 하거나 필드에 나가는 정도죠.”
#헬스, 등산으로 건강 유지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은?
“1960년 4․19 당시 서울신문 편집국 기자들과 매월 정기적으로 만나 점심을 먹으며 친목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해가 更子年이어서 모임도 ‘更子會’로 이름 붙였어요. 초창기에는 36명이었으나 대부분 작고하고 이제는 10여 명 남았어요. 주로 나오는 분들은 본회 이혜복 원로회우가 좌장격이고, 본회 회원인 신우식, 이순기, 민기, 이채주 회우와, 동아일보 동우회장인 김광희 씨 등입니다.”
또 다른 모임은 ‘三月會’. 1994년 케이블TV가 도입 될 당시 서울의 각 지구별 사장 출신들의 모임이라는 것. 매월 세 번째 월요일 만나 오찬을 하고 연말 망년회 때만 저녁에 만난다고 한다.
-언론계만 40년인 데 기자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는?
“대학(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57년 3월, 서울신문에서 기자를 모집한다기에 응시했고, 최종합격자는 나와 신우식, 신상현 3명이었죠. 서울신문 사사를 보니 견습4기생으로 기록되어 있더군요. 6․25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그 시절엔 대학을 나와도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었어요. 상경대학을 나와도 은행 말고는 갈 곳이 없었고, 이공계대학을 졸업해도 공장이 없으니 직장을 구할 길이 없었지요. 요즘 청년실업자가 많다고 하는 데 눈높이만 낮추면 일한 곳은 많잖아요?.
최 회우는 강릉상고 재학시절 문예반장을 맡아 교지를 만들었고, 대학 2학년 때 그의 시가 서울대 ‘대학신문상’ 최우수작으로 뽑히는 등 글 솜씨가 있어 신문기자가 적성에 맞을 것 같아 기자시험에 응시했다고 한다.
#서울신문 공채기자, 복간 경향으로
-서울신문 시절 기억에 남는 것은?
“수습기간이 끝날 무렵 당시 고제경 편집국장이 蔣介石 총통의 회상록을 주면서 번역하여 신문에 연재해 보라고 하더군요. ‘장개석 총통 회상록-중국 속의 소련’을 1면 좌측 내리닫이로 53회에 걸쳐 연재한 것이 신문에 실린 최초의 내 작품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서울신문에서 경향신문으로 옮기게 된 계기는?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던 날, 전방부대 地對地미사일 시험발사 취재를 마치고 오니 사옥이 시위대가 지른 불로 전소되어 신문을 발간할 수 없었어요. 귀중한 자료들이 불에 타 사라진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한 일이죠. 4․19를 계기로 강제 폐간 됐던 경향신문이 복간 됐고,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로 옮겼습니다. 당시 宋元英 정치부장 밑에 鄭宗植, 李桓儀, 李相舜, 尹錦子, 方一弘씨 등이 함께 일했습니다.”
-조선일보 정치부로 잠시 옮겼던 배경은?
“1963년은 軍政이 종식되고 民政이 시작되던 해, 조선일보 趙庸中 정치부장의 스카우트제의를 받고 옮겼습니다. 서울신문은 정부 소유로 여당지일 수밖에 없었고, 경향신문도 장면 정권 탄생 이후 여당지로 변하여 옮겨보고 싶었던 거지요” 그는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정치권의 움직임이 바빠졌고, 조간신문에서 밤샘 취재는 비일비재 했다는 것. 몸이 허약해져 1년도 못 채우고 석간인 경향으로 다시 가게 됐다. 최 회우는 13년간 경향맨으로 근무하며 정치부장, 편집부국장, 주일 특파원,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경향신문시절의 비화나 에피소드는?
“경향신문은 아시다시피 가톨릭재단에서 이준구씨로, 다시 기아산업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우여곡절을 겪었어요. 편집 방향이 친 정부 쪽으로 기울자 편집국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1967년 초 제작거부사태가 발생하자 주동자로 몰려 徐東九 외신부장과 함께 파면을 당했지요. 편집권 독립운동은 유신 이후 조선, 동아 등에서 일어난 투위 사건 보다 8년이나 앞서 일어난 언론자유수호운동입니다. 파면조치가 부당하다는 편집국의 항의가 빗발치자 일주일 만에 복직되어 일본 특파원으로 파견됐어요. 일종의 귀양이었던 셈이죠. 또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평양회의 취재가 일선 취재로는 마지막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최 회우는 군 출입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월남에 문제가 있으면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취재했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는 것. 경향시절, 도쿄대학 대학원 신문연구소에 1년 유학을 하기도 했다.
1973년 8월, 그는 활자 매체에서 영상매체인 한국방송공사(KBS) 보도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尹冑榮 당시 문공부장관의 권유 때문이다. 그해 KBS는 문공부 소속 중앙방송국에서 독립 공영조직으로 출범했다. 보도국장 취임 후 가장 먼저 이룬 성과는 ‘KBS 기자들을 기자단에 가입시키는 일’이었다고 한다. 언론사 숙청의 회오리바람 속에 3000여명의 직원 중 10%가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정권 교체 뒤 사장이 바뀌는 등 새 정부 사람들로 물갈이 되어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 자진 사퇴를 했다”고 한다. “방송생활 9년 동안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고 덧붙인다.
#언론계 40년 CEO로 마감
-그 뒤 영자신문으로 간 계기는?
“방송계를 떠나 1981년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 전무로 갔어요. 영자신문은 국제사회에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 만든 매체지만 살림살이를 맡고 보니 경영이 말이 아니게 열악했어요. 신문의 주 수입원이 광고인 데, 광고 효과가 별로 없는 영자신문에 기업들이 광고를 외면한 탓이죠.”
코리아헤럴드 소유주는 무역협회로 그동안 ‘내외경제’를 발행하여 코리아헤럴드의 적자를 메워왔다. 경영합리화를 위해 경제지 복간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폐간 된지 9년 만에 내외경제는 복간됐으나 경기침체로 광고수주가 어렵고 구조조정도 노조의 반대로 뜻대로 되지 않아 1989년 말 경영권이 무역협회에서 대농그룹으로 바뀌면서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경제지는 5개로 경영합리화를 이루기란 역부족이었다고 술회한다. CEO 임기 3년을 간신히 채운 뒤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 사장자리에서 물러났다.
언론현장에서 물러난 뒤 1993년부터 6년 동안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등 방송위원으로 활동하며 방송에서 쌓은 경륜을 펼쳤다. 방송과의 인연은 케이블TV 지상파로 연결됐고, 대농그룹이 경영권을 따 낸 노원구 케이블TV 사장으로 발탁됐다. 3년 동안 재직하며 초창기 케이블TV 활착에 공헌했다. 다양한 경륜과 폭넓은 인맥, 그리고 성실함이 높이 평가됐다.
언론계에 발 디딘지 만 40년이 되는 1997년 언론계를 은퇴했다. 최 회우는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주(北周)의 문인 유신(庾信)의 시구 ‘음수사원(飮水思源)’을 좌우명을 삼고 살아왔다는 것.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듯’ 근본은 잃지 않았고, “언론인생 40년 후회는 없다”고 소회를 밝힌다.
-언론계 은퇴 후 대학 강단에 섰지요?
“대전 한남대학교 초빙교수로 1999년부터 3년 동안 신문과 방송매체의 체험적 실무지식을 가르쳤습니다.” 강의 노트를 토대로 ‘한국의 저널리즘’(커뮤니케이션북스, 2002)을 펴냈다. 지난 2009년에는 자서전 격인 ‘한 언론인의 비망록-내가 본 현장 여울목 풍경선 을 출간하기도 했다.
#“기자 공채방식 보완해야”
-우리언론에 영향을 끼친 대기자와 대 논객으로 누구를 꼽으시나요?
“저는 洪鍾仁, 吳宗植, 崔錫采 세분을 꼽습니다. 우리언론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들이죠. 특히 ‘洪博’으로 통했던 홍종인 선생은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 언론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초인적인 노력파였죠. 8․15 광복 후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 주필, 회장 등을 거친 야전형 언론인이죠. 어느 신문이든 눈에 거슬리는 기사나 글이 발견되면 전화를 걸어 ‘글 좀 똑바로 써라’고 호통할 정도였지요.”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시절, 국회를 출입했던 최 회우는 태평로에 있던 옛 국회의사당에 날씨가 궂어 잠바 차림으로 취재를 나갔다. 기자실에서 스피커로 들려오는 의원 발언을 기록하고 있는 데 ‘홍박’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시간이 날 때 마다 일선 취재현장에 나타나 후배들 현장교육(?) 시키는 것을 즐겨했다. “최 군 복장이 그게 뭔가”라는 지적을 받았다. 기자라는 직업은 언제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만큼 복장은 정갈하게, 예의는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게 ‘홍박’의 지론이었다고 소개한다.
오종식 선생은 한국 언론에 인문학적 문명비평론을 도입하여 저널리즘을 질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고, 최석채 선생은 대쪽 같은 선비정신으로 정론을 편 분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수습기자 공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공개시험을 통해 뽑는 제도는 종전의 추천제가 지녔던 약점을 보완했다는 점에서는 개혁적이지요.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고, 객관적인 평가는 기자 공채의 장점이죠.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찮지요. 가장 큰 병폐는 언론사의 인적교류가 차단되다시피 된 것이죠. 언론은 어느 직종 보다 자유로운 경쟁과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어야 할 업종이기에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다방면의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야하는 데, 우리 실정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신문과 방송할 것 없이 수습출신 기수들 중심으로 똘똘 뭉쳐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진정한 자유경쟁을 막고 있습니다.”
기자들의 자유로운 ‘이동의 자유’가 봉쇄된 탓으로 기자들의 위상은 ‘무관의 제왕’에서 ‘월급쟁이’로 곤두박질치고 언론사 오너의 충복으로 타락해버렸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대학에서 신입생을 뽑듯이 연도별로 수습기자를 채용하다보니 대기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것도 아쉽다고 한다.
-대안은 무엇입니까?
“미국 언론사들은 필요한 인원을 수시로 채용합니다. 기자를 희망하는 사람은 언론사 편집장에게 자기소개서와 추천서가, 자기가 쓴 샘플 기사 5~6건을 보내면 서류심사를 거쳐 인터뷰 등 개별적으로 시험 절차를 거쳐 뽑아요. 채용 정보는 미국 편집인협회가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취업박람회를 열어 알선해 줍니다. 말하자면 추천제와 시험제를 혼합한 제도라고 볼 수 있어요.”
일본의 경우 공채방법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채용한 뒤에는 지방지사로 발령을 내고, 몇 년에 걸쳐 활동 상황을 체크 한 뒤 인사고과에 따라 자질이 인정되면 본사로 발령 내는 제도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요즘 기자들은 어떻게 평가 하시는지요?
“똑똑하지만 기자정신이 없습니다.” 짧지만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자유분방하게 한 시대를 풍미한 노 기자의 눈에 비친 후배기자들의 샐러리맨화, 관료화가 안타깝다는 것. 술은 원래 잘 못하는 편이고, 담배는 골초였으나 20여 년 전 가래가 심해 끊었다고 한다. 회혼을 1년 앞둔 부인 한정희 여사(76)와의 사이에 1남 4녀. 외아들 정욱(52)씨는 국민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