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기자로 출발해서 사장에 이르기까지 41년 4개월 동안 신문사의 거의 모든 중책을 고루 맡았으면서도 구속 없는 생활을 추구했던 우리 시대 최후의 로맨티스트 언론인 신동호(申東澔). 내게는 고등학교와 직장의 선배이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신비의 존재였다. 70세가 된 2003년부터 일체 공직과 관련을 끊고 칩거 중이지만, 관심은 여전히 언론이고, 많은 시간을 신문과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는 데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그는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8년째 살고 있는 서울 방배동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안색이 좋으시고 목소리에서도 활기가 느껴져 마음이 놓입니다. 요즘 건강은 어떻습니까?
“최근에는 척추협착증이 추가되어 보행이 불편하고 전립선도 좋지 않아. 한 주일에 세 번 가던 산에도 못가고 있지. 신문도 한 시간 이상 계속해서 보지 못해. 당뇨병도 40년이 넘어 아마 나처럼 고단위 인슐린을 맞는 사람도 드물 거야.”
-그래도 신문은 계속 읽고 계시겠죠. 선배님이 매일 몇 시간씩 여러 신문을 꼼꼼히 읽고 오자탈자를 귀신같이 잡아낸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되어있는데.
“요즘도 오전 중 중요 일과야.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발견해도 전처럼 전화는 걸지 않아. 요즘 신문들이 내가 현직에 있을 때보다 발전된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혁신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아. 심층 분석과 다양화란 면에서는 새로운 뉴미디어에게 지위를 빼앗겼어.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영상보도의 우위성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거의 모든 매체에서 한미FTA 반대시위를 매일 보도하고 있는데 한 개 정도는 다중에 영합하지 않는 고집이 있어야지.”
-초등학교 때 시작했다는 일기는 지금도 쓰고 있습니까?. 선배님의 메모와 기록 열의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계속 쓰고 있고 6․25 때 없어진 것을 빼고는 다 보관하고 있어. 훗날 어떤 책을 쓸 때 기초자료로 쓰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고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거야.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쓴 것은 아니야. 여권도 모두 보관하고 있는데 외국여행 이야기를 쓴다면 기초자료가 되겠지. 요즘은 그 많던 신문 스크랩이나 사진을 정리하고 있고, 받았던 편지도 본인에 돌려주고 있어. 책도 꼭 읽을 책만 남겨놓고 모두 도서관에 기증했어.”
-그런 자료를 기초로 책을 쓰실 생각은 있습니까?
“그걸 누가 봐? ‘어느 기인의 일생’이라고 책을 낸다고 해도 그게 불후의 명작이 되겠어? 다 자기과시고 자기최면이야.”
-38세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신 후 스포츠조선 사장에 이르기까지 신문사에서 거의 모든 중요한 직책을 맡으셨는데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식구처럼 생각하고 있던 기자들과 대결했던 일이야. 첫 사건은 봉급인상을 요구한 편집국 기자들의 파업이었는데 다행히 회사에서 봉급인상을 약속해주어 이틀 만에 사태가 수습되었지만 그 배신감과 충격은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지. 내가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지만 75년 3월 6일에는 여당 국회의원의 기고문을 빼라고 국장에게 요구하다가 파면된 두 기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농성투쟁이 벌어졌지. 명분은 언론자유였지만 외부세력과 연결되어 있었어. 농성장 단골로 유명한 신부도 들락거렸고. 대표이사 부사장이었던 88년에는 노조결성투쟁을 겪었는데, 나중에 스포츠조선의 사장으로 있을 때도 노조가 기습적으로 결성되어 또 한 번 시련을 겪었지. 나는 지금도 왜 기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대드는지 이해할 수 없어. 대학을 졸업하고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땅바닥에 앉아서 꽹과리를 치고 구호를 외쳐야 하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막가려는 사회풍조에 편승하려는 것이 아주 못마땅했어”
-지금은 노조가 일반화되었고,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상황이 되었는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4․19 전날 고대생들의 국회 앞 시위를 비롯해서 많은 시위와 농성현장을 돌아보면서 정치인의 한계를 느꼈어. 그들은 장택상(張澤相)씨나 이철승(李哲承)씨 등 정계거물이나 학교 선배들의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 후 나 역시 그런 상황에서 글이나 말 같은 커뮤니케이션으로 설득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나약함과 모자람을 절감했어. 분명히 잘못되고 오도된 대중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리 기사를 쓰고 칼럼을 써봐야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비애감... 신문기자 생활을 통틀어 아직도 남아 있는 회한이야.”
-고급지에서 일하시다가 스포츠신문 창간은 의외였다고 생각되는데...
“조선일보에서 필요하니까 만든 거야. 당시 한국일보와 서울신문만 스포츠신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도 젊은 독자층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어. 특히 판매 쪽에서 강력히 요구했지. 그래서 해마다 신청을 했는데 허가를 내주지 않았어. 그러다가 노태우(盧泰愚)정부가 들어서면서 특별히 운동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허가를 내주더군. 서울올림픽이 성공하고 스포츠붐이 일어나자 공급이 모자라게 되고, 마침 우리가 단독으로 계속 신청을 하니까 허가를 내준 것 같아. 89년 9월이었는데 급히 서둘러 다음 해 3월 21일 창간호를 낸 거야.”
-조선일보라는 모체가 있었지만 신문을 창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많은 도움을 받았지. 하지만 어려움도 있었어. 너무 잘 나가 모지의 성장이나 발전에 장애가 되면 안 된다는 거지. 스포츠신문들 사이의 경쟁은 치열해지는데 우리는 모지의 품격을 생각해서 마구 벗길 수도 없었고. 지금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종교단체가 항의를 하고 시위를 했어. 모지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지 않을까 고민이 많았지. 하지만 보람도 컸어. 3년째부터 흑자를 냈고 전국 언론기관 납세액 3위에 올랐지. IMF 위기 중에도 목동 신개발지에 지상 20층 드림타워 사옥을 세웠고. 청룡영화상을 부활시키고 뮤지컬 붐을 일으키는 등 대중문화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어. 한 해에 문화와 스포츠 관련 사업을 30건 이상 했으니. 그때는 내가 안 본 뮤지컬이나 국산영화가 없었어. 조선일보의 31년 생활이 국가기반 확립을 위한 메신저의 심부름꾼이었다고 한다면 스포츠조선의 10년은 경영인으로서 소신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시기였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내가 창간하고 내가 지은 사옥에서 창간10주년 기념식과 준공식을 마치고, 10년 사사를 낸 뒤 퇴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3개월이 모자랐어.
-재직 중 유명한 ‘밤의 대통령’ 사건이 있었죠. 저도 방일영(方一榮)회장의 자택에서 열린 고희잔치 현장에 있었는데, 밤중에 신문을 만드는 조간신문의 특성을 절묘하게 대비시킨 위트이고 덕담이라고 감탄했는데 그런 식으로 곡해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 사보를 통해 외부에 알려졌는데 그때까지 사보편집자를 포함해서 아무도 그런 식으로 발전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대중에 영합하려는 악의적인 포퓰리즘이지. 앞뒤를 멋대로 잘라버리고 필요한 말만 잡아서 공격한 거야. 사설을 쓴 신문까지 있었지. 사실 재직 중 나도 싸움을 많이 했어.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와 싸웠고, 신아일보와도 싸웠어. MBC와도 싸웠고. 그것은 한 편으로 경쟁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어.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싸움은 89년에 일어난 이른바 ‘조평전쟁(朝平戰爭)’이야. 주간조선의 기자가 지금 신민당의 전신인 평민당 의원들을 수행하면서 쓴 일종의 가십기사를 가지고 야당탄압이라고 조선일보를 공격했고 싸움은 1년 동안 계속되었어. 결국 유야무야로 끝났는데 그 기간 중 불매운동으로 조선일보는 큰 타격을 입었지.”
-요즘 언론계 동향을 어떻게 보십니까?
“수요와 공급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주유소가 잘 된다고 한 지역에 몰리면 결국 공멸하게 되지. 최근 종편방송이 4개나 나왔는데 보도기관이 왜 그렇게 많이 늘어나는지. 인터넷을 통한 매체는 창궐(猖獗)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야. 언론인 단체까지 마구 생기고 있어. 구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사회가 혼탁해진 원인의 하나가 언론에게도 있어. 신부가 추기경을 욕하고, 학생들이 총장을 납치하면서 스승을 우습게 알고. 지금 이 사회에는 원로가 없어. 로마시대처럼 영향력이 있어야 원로라고 할 수 있지. 언론계에도 원로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은데 충고를 해도 경청하는 풍토가 없으니 원로(元老)가 아니라 연로(年老)지”.
-한 직장에서 한 우물을 팠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다원화 사회에서 슬기롭게 사는 지혜로서는 적당하지 않을 수 있어. 내 경우는 훌륭한 선배와 동료들 덕택이었지. 행복한 생활이었어. 하지만 한편에는 내가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만과 안일 속에서 살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회한이 있어. 부모님 덕에 서울의 북촌에서 편하게 살고, 명문이라는 학교를 다녔고, 이름 있는 직장에서 고속승진을 했고 노후에도 강남에서 살고 있으니 바로 노무현(盧武鉉) 전대통령이 미워할 타입이지. 취미가 다양하지 못하고, 경제관념도 희박한 내가 지금 백면서생으로서 제대로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불안이 없는 것도 아니야. 심신이 노화되어 가는데 지금 반성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누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라도 된다면 그나마 보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새해를 맞아 심기일전의 새 설계를 하신 것은 없습니까.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지만 평생 활자미디어와 영상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아왔고 소통해온 버릇과 관성이 어디 가겠나. 지금 다른 인생을 선택하라고 하면 마감시간에 쫓기지 않고 책무와 직책이 없고 윗분과 아랫사람도 없는 나 혼자만의 창조적인 삶을 살고 싶어. 자아(自我)를 상실한 요즘에 느끼는 꿈이지만 꿈은 잠을 자야만 이뤄지는 것이고 자력갱생으론 턱도 없지. 최근 존경해온 언론계 동료인 권오기(權五琦)형이 식물인간으로 1년여 고생하다가 작고했고 아직도 병상에서 고생하는 언론인이 적지 않아. 그래서 지난달 우리 내외 명의로 존엄사요청서를 작성해서 공증인 인증을 받았는데 그것이 내겐 올해의 가장 큰 성과야. 9988의 허황된 꿈은 아예 없어. 언제 자다가 깨어나지 않아도 후회나 원망을 하지 않을 채비는 되어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