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사양하는 위상욱(韋相旭·80) 본회 회우를 지난 1월 13일 여의도 앙카라공원부근에 위치한 고려빌딩 8층 ‘위성시스템’ 회장실에서 만났다. 한 쪽 벽면을 가득채운 서적, 테이블과 소파가 가지런히 놓인 소박하고 작은 공간이다. 방주인도 아담한 키에 소탈하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활자 인생’을 실꾸리처럼 풀어낸다. 이름과 연도가 쉽게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이래서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니까”하며 미안해 하지만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나이 들어 가물거리는 기억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위성시스템’은 어떤 회사인가요?
“컴퓨터와 관련된 업무를 하지만 워낙 문외한이라 구체적인 것은 잘 몰라요. 미국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큰 아들(재성․50)이 대표로 있고, 둘째(재현·47)와 함께 운영해요. 커피를 가지고 온 사람은 큰 며느리죠. 오전에 사무실에 들러 신문을 보고 책이나 읽다가 나가는 게 고작입니다.”
1991년도에 창립한 ‘위성시스템’은 지상파 방송사와 케이블 TV의 시스템 구축과 솔루션을 제공하고 디지털 영상과 3D 편집 등을 하는 첨단업체다.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위상욱 회우는 고려대 정법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이듬해인 1957년 한국일보 견습 5기로 언론계에 투신, 한국일보 사회부 차장과 조선일보 제2사회부장을 거쳐 ‘주간시민(주)’과 새마을신문을 창간한 발행인이다.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공부를 잘 하지도 못했는데 공채시험에 합격했고, 살아오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추억을 먹고 산다는 실버세대 특유의 자기과시와 수식 없이 솔직담백하게 지난날을 반추한다.
“시경을 출입하던 선배가 갑자기 퇴사를 하게 되자 당시 김현제(金顯濟) 사회부장이 수습딱지도 안 떨어진 내게 시경 출입을 하라고 지시하여 맡게 된 것도, 출입처에 나간 첫날 큰 사건을 놓치지 않은 것도 운이 좋은 때문이죠” 기자의 감각으로 낚아 올린 특종도 운이 좋은 것으로 돌린다.
시경에 나간 첫날 분위기가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뭔가 낌새를 느낀 韋기자는 시경국장 비서실의 젊은이를 잡고 무슨 일이냐고 다그치니 YMCA 부근으로 가보라고 귀띔해 준다.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曺奉岩)을 비롯한 간부들을 체포하던 날이다. 진보당이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평화통일 방안을 주장한다는 혐의로 조봉암이 사형당한 ‘진보당사건’이다.
이듬해 김현제 부장이 자유신문사 편집국장으로 가면서 본인 의사는 묻지도 않고 韋 기자의 입사발령 방을 붙여 옮기게 됐다. 자유신문사에서는 서울시청과 재무부를 출입했다. 김현제 국장이 서울경제신문 창간 국장으로 가면서 韋기자는 창간 멤버로 다시 한국일보사와 인연을 맺었다. 5․16 이후 병역기피자로 퇴사했으나 장기영 사주가 불러 한국일보로 복귀, 사회부 차장으로 서울 시청을 출입하게 된다. 그는 당시 ‘100억원의 행방’이라는 기획시리즈를 통해 서울시청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했고, 윤치영(尹致暎) 서울시장이 인책 사임하게 됐다. 1966년 4월, 43세의 최연소 김현옥(金玄玉) 서울시장이 취임했고 그와 오랜 인연이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신문기자에서서 발행인으로
1967년 韋회우는 조선일보로 옮겨 2년간 사회부에 근무했고, 2년 뒤 제2사회부장으로 12년간의 일간신문기자를 마감한 뒤 1970년 ‘주간시민’을 창간한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게 된 동기는?
“두 가지 이유지요. 첫째는 술에 절어 산 탓인지 B형 간염에 걸려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오전에는 말짱 하다가도 오후만 되면 나른하여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없었죠. 술과 담배를 끊고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어요. 또 한 가지는 어느 날 김현옥 시장이 부르더니 시민과 소통할 수 있는 시 홍보 신문이 필요하며 박 대통령의 내락까지 받았으니 맡아 달라는 제의를 했어요” 韋회우는 “김 시장은 열정적이고 추진 동력이 대단했다”고 강조하면서 닉네임이 된 ‘불도저 시장’도 그가 붙였다는 것.
-시 홍보신문 대신 ‘週刊시민’을 창간했나요?
“그런 건 아니고요. 관청에서 발행하는 신문은 맡지 않겠다고 거절하면서 내가 직접 신문을 만들겠다고 제의하니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막상 일간신문을 창간하려니 자금동원 등 걸림돌이 만만찮았다. 서울시장 알선으로 당시에는 큰돈인 4,000만원을 융자 받고 윤전기까지 구입했는데,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김 시장이 물러나 물거품이 됐다.
그는 일간지 창간은 무산 됐으나 주간지라도 만들어 볼 요량으로 가족회의를 열었다. 보르네오가구 창업주인 형(韋相植)의 도움과 십시일반으로 자본금을 모아 1970년 주식회사 ‘週刊시민’을 창간, 대표이사 발행인을 맡았다.
-‘週刊시민’의 반응은 ?
“창간에 참여한 멤버들은 쟁쟁했으나 제작비와 인건비 등 적자누적을 감당 할 수 없어 판권을 넘기고 3년 만에 문을 닫았어요” 현재 발행 중인 ‘주간 매경’의 전신이 ‘週刊시민’이라는 것.
-새마을신문을 창간한 계기는?
“1970년 초 박정희 대통령의 발의로 일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이 확산될 무렵인 이듬해 김현옥 씨가 내무장관에 임명됐어요. 늘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가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마을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1973년 창간하게 됐습니다”
-들불처럼 번지던 새마을운동의 열기와 내무부에서 신문을 구입하여 전국 이장 등에게 무료 배포까지 했으니 경영은 잘 되었겠네요?
“10년 동안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신문 1면의 칼럼은 직접 쓰고 장관과 동행하여 전국 곡곡을 누비며 취재 했지요. 호사다마라고나 할까요.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동생 전경환씨가 새마을운동 중앙본부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새마을신문사를 양도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캔두 정신 심어준 새마을운동”
-아무리 서슬 퍼런 시절이지만 대가도 없이 순순히 양도했나요?
“내 주지 않으면 내무부가 새마을신문 구입을 중단하여 경영 압박을 받을 것은 뻔하고, 형제들이 사업을 하고 있어 전 씨의 압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두 가지를 제의 했어요. 하나는 공무국 직원들의 일터를 지키고 인쇄시설만이라도 살리고 싶어 인쇄 권한은 계속 맡기로 했으나 이행되지 않았어요. 또 하나는 전 씨가 측근을 보내 주간공업신문을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신문허가가 나오지 않아 무산됐습니다.” 1981년 9월 전경환씨는 새마을신문 대표이사가 됐다. 이듬해 새마을운동중앙본부 경리부장을 통해 판권 명목으로 3000만원을 받았으나 신문사를 빼앗긴 울분은 삭히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마음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상당 기간 마음고생이 심했지요. 교회 권사인 아내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장로 장립을 받았습니다. 아내의 간병 덕에 간염도 항체가 생겨 말끔히 나았고, 마음의 치유를 하니까 편안해졌어요.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내 청춘에 후회는 없습니다.”
-새마을신문은 빼앗겼지만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는?
“저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캔두(can-do)정신을 국민에게 불어넣은 정신운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마을에 시멘트를 무료로 공급한 뒤 스스로 성과를 낸 마을에는 더 지원하되 자립 의지가 결여된 마을은 제외시킨 경쟁의식 고취가 성공요인이죠.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도 7개년, 5개년 개발계획을 입안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강력한 자립정신을 투입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중국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 하는걸 보면 성공사례가 아닙니까.” 가난을 극복한 기적의 역사를 일군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을 오늘에도 되살려 나가야만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강조한다. “청년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중소기업에서는 일손을 못 구해 외국인 근로자를 쓰고 있지 않느냐”고 덧붙인다.
-비록 소수의 견해지만 새마을운동을 북한의 ‘천리마운동’ 등에 반응한 냉전의 산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인민의 착취로 실패했지만 우리는 토지개혁을 통해 열심히 노력하면 내 땅을 가질 수 있고, 잘 살 수 있다는 잠재력을 농민들에게 일깨워 준 게 성공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만보 걸으며 건강관리”
-韋氏는 매우 드문 성인데…
“본관은 강화로 단본이지요. 시조 위수여(韋壽餘)는 고려시대(960년 ․ 광종 11년) 때 중국에서 건너와 사선관(司膳官)이 되어 관복의 제정과 과거제도 도입에 공헌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때 인동현감을 지낸 위조(韋組)를 중시조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일으킨 가구산업은 지속되고 있는지요?
“아버지는 의사로 우리 형제는 9남매입니다. 큰형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보루네오가구 창업주, 동생 위상균은 동서가구를 만들었으나 경영권을 모두 넘겼습니다. 막내 위상돈은 바로크가구를 창업했으나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가구의 명맥을 잇고 있어요.”
-장남과 함께 사시는지요?
“혼자 삽니다. 아내(윤우근)는 6년 전 72세로 하늘나라로 갔어요. 큰아들 내외는 여의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요”
-혼자 지내시기 쓸쓸하지 않습니까?
“아내 생각 가끔 떠올리죠. 여동생(위은숙·민음사 대표 부인)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어요. 아내와 서울대 약대 동창입니다. 서울시청 구내에서 약국을 10년 정도 운영했으며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들 형제만 둔 위 회우는 손녀 한명 뿐이라고 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손녀가 2학년 전교 수석을 하여 그 재미로 산다”며 웃는다. 저서로 위상욱 등 3인 공저 ‘4․19 혁명’과 韋相旭 칼럼선집 ‘새마을 運動과 農村’상하권(1981)이 있다.
-건강관리는?
“몸은 건강한데 기억력이 가물거려요. 예전엔 수영도 곧잘 했으나 지금은 헬스클럽에 들러 역기를 가끔 듭니다. 일주일에 나흘 정도 만보걷기를 꾸준히 하는 편이죠”
앙카라공원에 들러 사진촬영을 한 뒤 공원을 몇 바퀴 돌아야 만보를 채운다며 돌아서는 老 기자의 어깨에 포근한 겨울 햇살이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