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식(吳田植·78) 본회 회우는 인맥 활용의 달인이다. 李炯均 본회 편집고문은 그를 “대인관계의 천재”라고 평가한다. 그의 폭넓은 인맥은 대학과정을 세군데 거친 학맥이 뿌리다. 육군사관학교 13기로 입학했으나 몸이 불편해 중퇴했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경찰전문대학(경찰대학 전신)에 들어간 것이 군과 경찰에 인맥의 뿌리가 깊은 이유다.
지난 2월 15일 경기도 남양주시 팔당댐부근에서 상경한 吳 회우를 프레스센터부근 음식점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라기보다 반주를 곁들여 두 시간 가까이 풀어내는 인맥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기자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吳 회우의 목소리엔 신바람이 묻어났다.
인맥의 뿌리는 학맥
-군인을 꿈꾸다가 법대를 다녔고, 경찰대학을 나와 기자가 된 동기는?
“경찰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강의하던 장병림 교수가 서울신문 객원논설위원을 겸했는데, 너는 영어도 잘하고 예쁘장하니 기자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서울신문 수습기자 2기로 입사했어요. 金珖熙(본회 회우) 수습 동기는 육사와 고려대 동기로 흔치않은 인연이지요” 서울신문 사옥이 4.19혁명 때 불타 휴간할 때 吳 회우는 경찰국장 부속주임(경위)으로 경찰에 잠시 몸담아 해외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당시 서울신문 李蕙馥(본회 원로위원) 사회부장이 “신문사에서도 특파원으로 해외근무가 가능하다”면서 동아일보 사회부기자로 추천해줘 경찰복을 벗었으나 동아일보 입사는 무산됐다. “이혜복 부장과 함께 대한일보와 민국일보를 거쳐 서울신문 복간 때 다시 돌아왔다”는 것.
서울신문에서는 “육사 인맥도 있고 하니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출입하라고 해서 나갔어요.” 최고회의 발표문만 받아 기사를 쓰던 시절,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광맥을 찾듯 인맥을 찾아 나섰다. 金炯旭 최고회의 내무위원집을 아침마다 찾아갔다. 사흘째 되던 날 출근하던 김형욱은 “너 뭐하는 놈이냐”며 지프차에 타라고 했다. 보안사 요원처럼 스포츠머리를 하고 드나들라는 언질을 받았다. 그 때부터 최고회의를 프리페스로 출입하며 김형욱과 친해졌다.
최고회의 출입시절 全斗煥 대위와도 가까워졌다. 전두환은 육사 2기 선배로 재학시절부터 알던 사이다. 당시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의 민원비서관이었던 全 대위가 朴 의장한테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 “박 의장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느냐고 묻기에 밭 田, 심을 植입니다고 말씀드렸더니 너 우리 편이야. 하더군요” 권력핵심에 파고드는 계기가 됐다.
全斗煥 중령이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으로 청와대 외곽경비책임을 맡고 있던 1967년 무렵 全 중령은 吳 회우에게 “朴鍾圭 경호실장에게 부탁하여 朴 대통령이 30경비단에 시찰 나오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부탁은 실현됐고, 吳 회우가 언론사 퇴직 후인 1974년 박종규 대한사격연맹회장 보좌관 및 섭외이사를 맡은 계기가 됐다. 吳 회우는 1978년 국제사격연맹 조직위원들을 접대하며 아시아지역 국가로는 처음으로 멕시코를 누르고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는데 기여했다.
‘월남 파명’특종 소스는 ‘朴統’
吳田植 기자의 ‘월남파병’ 특종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특종의 소스(Source)가 궁금해 물었다. 1965년 5월 朴대통령이 세 번째 미국을 방문 할 때 吳 기자는 수행 취재기자로 따라갔다. 존슨대통령과 워싱턴DC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방문 일정이 잡혔다. 웨스트포인트에는 취재단 중 한 사람만 수행 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육군사관학교를 둘러보고 싶기도 했고, 타사에선 대부분 부장과 국장급 이상 간부급 기자들이어서 저가 수행 취재를 할 테니 선배들께서는 야구 구경이나 하고 계시라고 하면서 수행하게 됐어요” 그 때 朴 대통령은 “기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 “기자를 하니까 이렇게 각하를 가까이에서 수행 취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대답했다.
吳 기자는 朴 대통령에게 “정상회담 발표문을 보니 별게 없다”고 하자 朴 대통령은 연신 기분 좋게 웃으며 “존슨대통령의 요청으로 한국군 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키로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실을 귀띔해줬다”는 것. 월남파병의 대가로 막대한 경제원조는 물론 한미안보동맹을 굳건히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특종을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吳 기자는 당시 李厚洛 비서실장에게 돈을 얻어 뉴욕 수행기자단 숙소인 아스토리아호텔까지 택시를 타고가 서울 본사에 ‘한국군 월남 파병’기사를 긴급 타전했다. 타전 후 선배들에게 당할 질책이 두려워 혼자 비행기를 타고 LA로 날아갔다는 것.
吳田植 회우는 그 뒤 중앙일보를 거쳐 경향신문 정치부장과 부국장을 역임하면서 대부분 정치부 기자로 청와대와 국회를 출입하며 마당발 인맥의 폭을 넓혔다. 1963년 11월 26일 제3공화국 때 치러진 6대 국회의원 선거는 처음으로 지역구와 전국구로 나뉘어 치러졌다. 육사 8기로 5‧16혁명 주체세력의 한 사람이었던 吉在號가 충남 錦山에서 당선된 이면에는 吳 회우의 지략이 한몫했다.
“길재호씨는 평안북도 영변 출신으로 황해도가 고향인 나와 이북출신이었지요. 그는 민정이양 때 吉 氏들이 많이 사는 충남 금산을 정치적 고향으로 염두에 뒀지만 야당 중진 柳珍山이 버티고 있어 고민을 많이 했어요” 당시 李忠煥 의원으로부터 유진산 씨가 전국구로 선회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길재호를 만나 “당신 금산에서 출마해라, 단 조건이 있다. 치안국 감사관 염보연을 충남 경찰국장에 임명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길재호는 금산에 출마해 무난히 당선, 정계에 진출했다. 고대 동기 염보연은 충남 경찰국장을 거쳐 1987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서울시장을 역임했다.
“길재호 의원은 공화당의 실세로 기자들의 민원을 열성껏 도왔다”고 회고한다.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길재호는 ‘10‧2 항명파동’(1971년)으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주에서 농장경영을 하며 여생을 보다 1985년 타계했다.
기자협회 기금마련 뒷얘기
한국기자협회는 1964년 군사정권이 추진하던 언론윤리위원회법 저지를 위해 창립됐다. 하지만 기자들의 후생복지사업을 펴기에는 기금마련이 필요했다. 李厚洛 대통령비서실장을 찾아가 협조를 구했고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3선 개헌’ 날치기 통과(1969년 10월 20일) 후 야당의 공세로 이 실장과 김형욱 정보부장이 해임되는 바람에 약속은 무산됐다. “이후락 실장이 이임인사를 할 때 박 대통령은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물었고, 경황이 없었을 텐데도 ‘오전식 기자에게 약속한 기자협회 기금마련을 지키지 못하고 떠난다’고 말했다”는 것. 얼마 뒤 퇴근하여 술자리에 있을 때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늦은 시간 점퍼차림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을 만나 “복장이 결례라 죄송하다”고 하니 “오전식이 언제 예의 찾았느냐”고 농을 던지며 내일 대변인실에 들르라고 했다.
다음날 宋孝彬 기자협회 회장(현 본회 감사)과 함께 대변인실에 들러 1000만원을 받아왔다는 것. “비서실장에서 물러나면서도 약속을 지켜 준 이후락의 의리가 고맙다”고 강조한다. “술을 마시다가도 내가 청와대에 호출되자 동료들은 ‘채홍사’ 아니냐며 각하 만나면 내 얘기 잘해달라는 우스개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락은 그 뒤 주일대사를 거쳐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했고, ‘7.4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1973년 ‘윤필용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됐다. 80년대 신군부등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은둔생활을 하다가 2009년 10월 타계.
기자촌 건립 ‘오해와 진실’
대화가 기자촌 건립당시로 이어지자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60년대 후반 진관외동 기자촌 건립위원장을 맡은 吳 회우는 “기자촌 탄생 주역의 한사람으로 오해와 욕을 먹기도 했으나 되돌아보면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주장한다. 기자촌은 1969년 무주택 언론인들이 북한산 자락 국유지를 매입해 조성한 마을로 1974년 420가구가 입주했다. 당시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 었으나 기자촌 조성사업 마무리 직전인 1973년 7월1일 서울시로 편입, 은평구 진관외동이 됐다.
첫 번째 오해는 평당 분양가에서 불거졌다. 吳전식 주택건립위원장은 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평당 70만원에 짓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락은 鄭周永 현대건설 사장을 불러 각하가 관심 갖는 사업이니 부탁한다고 당부했어요. 그 자리에선 알겠다고 나온 鄭 사장은 그 뒤 70만원으로는 부실공사가 될 우려가 있다면서 평당 72만원에 대구 건설업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어요” 중앙무대 진출을 노리던 그 업체는 공사를 따주면 하겠다고 했다. 그 안건을 주택조합 총회에 붙였더니 90%가 반대해 무산 됐다. “오전식이 인센티브를 노린 게 아니냐는 오해가 저변에 깔려 있었지요” 결국 합자회사(신진건축)에 공사를 맡겼다. 그는 “기자협회에서 그동안 수고 많았다며 감사패와 함께 해외여행경비를 줘서 떠났지요. 홍콩에 들려 망중한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데 주택조합에서 SOS를 보냈어요. 주택은행이 자금부족으로 융자를 안 해줘서 공사가 중단 위기에 처했다는 거죠”
급거 귀국한 그는 주택은행장을 만났다. 주택은행장은 “금고가 바닥났다. 총무처와 교통부는 타 은행에 예금한 여유 자금이 있는 데 주택은행으로 돌려주면 가능하다”는 귀띔을 받았다. “청와대를 찾아가 전후사정을 설명하니 朴 대통령은 총무처 장관을 불러 서민들 주택건설이 중요하니 주택은행으로 예금을 돌리고 결과를 내일까지 보고하라는 지시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공사는 재개됐다. 그 뒤 합자회사 부도로 공사가 중단 위기에 처하자 吳 회우는 “또 朴 대통령을 만나 정부보조금 5000만원을 특별지원 받아 기자촌 조성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두 번째는 “기자촌 입구의 땅을 오전식이 특혜 받은 것 아닌가”하는 오해다. 기자촌 들머리에 놀이터로 변한 묘역이 있었다. 그 땅 600평을 친구와 함께 1500만원에 매입한 뒤 나누어서 각각 집을 지었더니 특혜 논란과 함께 ‘기자촌 주택과 위화감을 느낀다’는 오해를 받았다. 등기부등본도 확인하지 않은 채 파견 나온 경찰관이 청와대까지 보고했다. 결국 정상적인 거래로 밝혀져 오해는 풀렸으나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도로 부지’가 낳은 황금알
그동안 吳 회우에 대한 오해를 한방에 날리고 만루 홈런을 친 게 ‘기자촌 도로 부지 보상금’이다. 사연인즉 5만여 평의 기자촌 부지 가운데 도로부지가 1만5000여 평에 이른다. 吳회우는 “앞으로 자가용시대가 열릴 것을 대비하여 도로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전식이나 자가용 굴리지 우리에겐 해당 없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40여년이 흘러 그 도로 부지가 150억대 땅으로 변했고 訟事로 이어졌다. 개발 당시에는 기부채납제도가 없어 기자촌 내 모든 도로가 사유지로 남아 있었기 때문.
재산권 다툼은 서울시가 기자촌을 뉴타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한 뒤 이곳에 사는 전직 언론인 37명으로 구성된 ‘기자촌운영회’가 자신들이 주택조합을 승계했다며 땅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반면 주민들은 1973년 조합원 입주와 융자 상환 업무가 마무리되면서 주택조합 활동이 끝났다며 조합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합 활동이 끝난 뒤 도로나 체비지는 서울시에 기부채납하거나 주민들과 논의해 소유권 문제를 정리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지난해 대법원은 ‘기자촌운영회’의 손을 들어줘 보상금을 차지하게 됐다.
보상금이 나오게 되자, 이곳에 거주해 사는 언론인 37명과 이곳을 떠난 300여명의 전직 기자들 사이에 보상비를 둘러싸고 소송까지 갔으나 원만하게 합의됐다. 150억원대의 도로 보상비 가운데 기자촌을 떠난 300여명의 전직 기자들에게는 3000만원씩 보상비를 일괄 지급하고 기자촌을 지킨 기자들에게는 몇 곱절 많은 돈을 지급하면서 일단락됐다. “포도주를 오래 숙성시킬수록 깊은 맛이 나듯, 도로 부지도 오래 묵혀두니 황금알을 낳았다”며 환하게 웃는다.
吳 회우가 20대 중반부터 20여년간 신문기자로 보낸 시절은 현대사의 격랑기다. 그 시절 집권층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관계 진출은 하지 않았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아마 구속 됐거나 맘 편히 여생을 보내지 못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팔당댐 부근에 살면서 여름이면 이름 그대로 텃밭을 가꾸고, 가끔 상경하여 옛 동료와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산다는 것. 부인 方恩淑(75) 여사와의 사이에 1남 2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