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제2중학교(平壤高普)를 졸업한 열일곱 살 鄭光憲은 1948년 청운의 꿈을 안고 혈혈단신 남하했다. 서울에서 그가 머문 곳은 金玉吉(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이화여자전문학교 사감 집. 금광사업을 하며 면장을 하던 김옥길의 부친 金炳斗씨와 광산자재를 취급하며 철강대리점을 운영했던 정광헌의 부친 鄭基福은 의형제 세교지간 이였다. 金 옥길 전 총장의 동생 金東吉 연세대명예교수는 정광헌 보다 두 살 위. “유일하게 형님으로 호칭한다”는 것.
정광헌의 목표는 연세대 편입이었다. 학제가 바뀌고 편입시험 6일 전에 6.25 한국전쟁이 터져 그의 꿈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사춘기 시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그는 또래 친구들이 많았던 단국대에 들어갔다. 육군본부 헌병으로 5년간 군 복무를 마칠 무렵, 신문기자가 되려고 ‘서울신문학원’을 이수했다. 서울신문학원은 당시 신문기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유일한 통로였다. 1947년 언론인 양성을 목적으로 문을 연 ‘조선신문학원’은 郭福山이 설립했고, 연희대학교 총장 白樂濬, 새한민보 사장 薛義植을 비롯하여 여러 대학의 교수들과 吳蘇白, 金庚煥 등 언론인들이 참여했으며 신문기자에게 필요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와 실무과정을 포괄적으로 가르쳤다. 한국 전쟁 때 부산으로 내려가 ‘서울신문학원’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수복 뒤 언론학이 4년제 대학의 정규과정으로 정착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鄭光憲은 서울신문학원의 추천을 받아 조선일보 연수생으로 들어갔다. 요즘의 인턴기자와 비슷하다. 연수를 마친 그는 1958년 5월 조선일보 견습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 때 나이 스물아홉. 편집국에서 부국장까지 13년, 총무국과 공무국으로 옮겨 국장, 이사14년, 조선일보 부설 ‘朝光出版印刷會社’를 창설하여 대표이사 사장 14년 등 41년 동안 조선일보 울타리에서 지내다가 1999년 1월 일흔 살로 퇴임했다.
#국방부 ‘탈모비누사건’ 등 특종
꽃샘바람이 심술을 부리던 지난 3월 14일 낮 鄭光憲 본회 회우를 프레스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갈색 콤비에 노란 조끼를 받쳐 입고, 짙은 갈색 행커치프로 포인트를 살려 한껏 멋을 부려 여든 두 살이 믿기지 않는다.
-편집국 부국장과 야간국장 등 관리직을 빼면 일선기자로 활동한 기간은 9년입니다. 그 기간 ‘시경 캡’을 세 번이나 맡았었지요?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시경 캡을 세 번 맡은 것은 유일한 기록인 것 같습니다. 사건기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趙東午, 魚壬泳 선배도 시경 캡을 두 번 맡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회부 기자의 꽃'으로 불리는 시경 캡은 서울지방경찰청을 출입하며 사건팀을 지휘하는 사건데스크로 紙面결정에 많은 역할을 한다. 당시 신문사 지프차 2대 가운데 한 대는 사장이, 한 대는 사건팀에 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는 자유당 시절인 제1공화국과 제3공화국 군사정권까지 시경, 법조, 특검, 혁검, 내무치안 등을 출입하며 사건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鄭 회우는 “최첨단 취재시스템을 갖춘 요즘에 비하면 그 때는 선사시대 취재와 마찬가지였다”고 회고. 취재비는 전차표 10장이 고작. 을지로 3가 중부경찰서를 출발하여 동대문 경찰서, 종로경찰서 등 9개 경찰서를 돌고 신문사로 돌아오면 전차표 10장이 떨어졌다는 것. 1961년 6월시경기자실이 폐쇄되는 바람에 “길거리를 떠돌다가 종합병원 시체실을 취재원으로 개발하여 밤새 숨진 사건사고를 체크하던 것은 관행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 때는 창경원 사슴뿔을 베어가던 것도 기사가 됐다.
-‘선사시대’ 같은 취재환경 속에서도 기억나는 특종은?
“1958년 법조 2진으로 있을 때, 국방부 ‘탈모비누사건’ 재판기록을 무단으로 빼돌려 특종을 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 군요”
-‘탈모비누사건’이란?
“비누에 양잿물 등을 많이 섞어 군인들이 머리를 감으면 머리칼이 많이 빠졌어요. 쉽게 말하면 불량비누를 군납한 사건이죠.”
-국방부에서 재판기록을 빼다니요?
“국방부에서 자체 수사 후 사건에 연루된 군인은 군법회의에 넘기고 민간인 관련자들은 검찰에 수사기록과 함께 송치한 것이죠”
-1만부 분량의 수사기록을 빼돌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貞洞 법원 건물 1층에 경비실과 기자실, 서기국이 있었어요. 서기국에 들려 사건 기록을 창문틀에 올려놓은 뒤 밖으로 나와 경비의 눈을 피해 무단 반출했다”며 웃는다. 백지에 약도까지 그려가며 상황을 꼼꼼하게 설명한다. 조선일보 특종을 부러워했던 서울신문 모 기자가 ‘재판기록 모방 탈취’를 시도하려 사건과에 잠입했다가 들켜 도둑으로 몰려 곤욕을 치루었다는 에피소드도 소개한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다.
격동의 시대일수록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게 기자의 역할, 3.15부정 선거가 일어나기 전 정치적 사건도 많았다. ‘12시 파고다’. 언론사 전화도청이 심하던 시절 사회부장에게 걸려 온 암호 같은 전화제보다.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갔다. 동아일보 시경 캡 李孝植 기자가 먼저 와 있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 제보를 받았던 것. ‘반독재 민주투쟁’ 내용이 담긴 삐라기 떨어졌다. 방증은 없지만 심증은 민주당. 당시 선전부장은 曺在千 의원, 차장은 金大中(DJ)씨 였다.
4.19 때 숱한 사상자를 내고 계엄령이 선포되던 날 밤. 동대문경찰서가 습격당했다는 전화제보를 받고 申東澔 사회부 기자, 鄭範泰 사진부 기자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종로 4가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던 중 趙光集 운전기사가 총탄에 맞아 순직한 사건은 잊히지 않는다고 술회한다.
#花無十日紅 일선 취재 9년
-시경 캡을 세 번이나 했는데 일선 취재 9년은 짧은 게 아닌가요?
“(하하)시쳇말로 물먹은 거죠. 첫 번째 요인은 시경 캡 세 번을 하면서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건방져졌어요. 파이프 담배를 물고 멋을 부렸죠. 당시 수집한 파이프가 100개 넘었거든요. 당시 모 기관장이 사장에게 귀띔까지 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도 많이 나빠졌고, 1962년 내무부 대변인 스카우트설이 나돌아 눈 밖에 났다고 한다. 당시 내무부 장관은 韓信 씨(당시 육군 소장). 대쪽 같은 성격에 청렴결백하고 신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홍보에 관심이 없는 분이기에 거절했다는 것.
“언론계를 떠나 사업이나 하려고 생각하던 와중에 중앙일보 창간을 앞두고 면접까지 보았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지방부장(1966년)으로 승진되는 바람에 조선일보에 눌러 앉았다. 대신 김천수 지방부장을 추천해 줬다는 것. 중앙일보 창간 당시 스카우트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실명을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본 인터뷰와는 거리가 있어 기사화 않지만 기록으로 남길 가치는 있다.
-그 뒤 편집부국장 겸 야간국장(1969년)을 마지막으로 편집국을 떠나 총무국 부국장 겸 자재부장으로 가게 된 동기는?
“金桂元 중앙정보부장 시절 공보관실 스카우트설이 외부로부터 떠돌아 바람을 맞은 게 아닌가 생각해요” 총무국 부국장 겸 자재부장 시절의 일화 한 토막. 1971년 김대중 씨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조선일보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方 사장에게 “정광헌 기자 요즘 어디 있나요”하고 물었다. “총무국에 있다”는 답변을 들은 DJ는 임원실과 나란히 있던 총무국에 들러 “난세에는 관리직이 살아가는 데 편리하다”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주고 갔다고 한다. “일찍이 바람을 맞았으나, 인내 하면서 한 우물을 판 덕에 41년 이란 기록을 세우며 장수를 했다”고 강조한다.
#공무국장, 이사 거쳐 '朝光‘ COE로
-공무국장과 공무담당 이사로 14년 일한 것을 보면 노하우가 많으셨던 건 아닌지요?
“일본어 신문을 보면서 일본어 실력이 많이 늘었고, 대부분 인쇄관련 시설이 일본제품에 신문편집 용어도 일본식이 많잖아요. 1975년 일본신문기자재전시회(JANPS) 참석차 일본을방문하니 동아일보 공무국장은 남한에서 오고, 나는 조선일보에서 왔다고 하니 북조선(북한)에서 온 줄 알던 그런 때였죠. 어쨌든 인쇄분야에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고, 그 당시 가져온 일본 서적을 참고자료로 ‘新聞印刷技術(1976년/조선일보사)를 출간했습니다.”
활판편, 사진제판편, 인쇄편 등 3장으로 구성 된 저서는 1977년 제1회 한국신문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인쇄사상 처음으로 인쇄 전반에 걸친 기술을 체계화하여 신문인쇄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수상 이유다. 또한 노무관계를 다루는 저력과 공무국을 장악한 리더십을 회사에서 높이 평가한 것 같다는 게 부연 설명. 그는 ‘포도청(경찰)’ 출입을 하면서 카리스마를 터득한 것도 보탬이 됐다고 한다.
-사건기자로 출발하여 이사를 거쳐 COE로 마무리 했는데...
“당시 조선일보사에서 지출하는 신문과 잡지 등 인쇄비용은 연간 60억원 규모였어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인쇄시설을 갖추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사업계획서를 만들었어요. 당시 尹冑榮 고문도 같은 견해였습니다. 그래서 창설한 것이 ‘朝光出版印刷會社’였고, 尹 고문이 사장이 되지 않겠느냐는 예측은 빗나가고 제가 대표이사 사장을 맡게 됐어요.” 鄭 회우는 1975년 조선일보 컬러신문 인쇄를 비롯하여 14년 동안 인쇄기술의 노하우를 펼쳤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동길 교수가 운영하는 (사)태평양시대위원회 연구위원과 교수로 강의를 가끔합니다. 또 平壤高普同門會誌 ‘大同江’(연간, 신국판 508P)편집인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있어요” 會誌는내용도 풍부하고 장정이 깔끔하다. 美 議會 도서관에도 납본됐다는 것. 지난 10여 년 동안 병원과 양노원에서 노인 수발 등 성당봉사활동을 통해 “노인의, 노인을 위한, 노인에 의한 자원봉사에 보람을 느끼며 산다”고 한다. 담배는 1992년 장파열 수술을 받을 때 끊었고, 술은 여전히 가볍게 마신다는 것. 인터뷰를 하면서 청하 1병을 비운다.
-봉사활동을 하려면 경제력과 건강이 뒷받침 돼야 하지 않습니까?
“봉사는 돈이 아니라 마음이죠. 노력봉사에 돈이 듭니까? 3남매 출가시키고 노부부가 살 여력은 됩니다” 학창시절 럭비와 권투 등 와일드한 운동을 즐겼다는 鄭 회우는 헬스센터를 20여 년 째 꾸준히 나가며 건강을 유지한다.
서울고검 출입당시 검사장실에 근무하던 南姬子(75)씨와 결혼, 슬하에 3남매. 생명공학을 전공한 장남 우석(50)씨는 건국대 교수, 맏사위 조영호씨는 서울의대 출신 암센터 의공학과장, 둘째 사위 이동호씨는 두바이에서 무역업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