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으로 ‘외길 인생’ 57년을 살아온 전 ‘코리아 타임스’ 사장 겸 한국일보 고문 정태연씨(80·鄭泰演)를 만나뵈었다. 대담은 후배 언론인이자 소설가 생활 50년을 넘은 오인문씨(70·吳仁文). 총선이 치러진 이튿날인 12일 낮 12시 정각, 프레스센터 19층 한국기자클럽에서 이 대담이 이뤄졌다.
팔순의 정태연씨는 지팡이에 의지하고는 있었지만 165cm의 키에 67kg의 체증으로 비교적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독서와 여행, 음악 감상의 취미생활로 삶의 균형을 잘 잡아온 것 같았다.
― 안녕하십니까? 정태연 고문께서는 한국일보 견습 3기(1955년)로 출발하여 주일 특파원, 영자(英字) 신문인 '코리아타임스' 사장을 거쳐 한국일보 고문 등 오로지 언론인으로 ‘외길 인생’ 57년을 살아오셨습니다. 견습기자 시절부터 얘기를 풀어갈까요?
“중앙대 법대 졸업을 앞두고 고시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 장기영씨, 김활란씨의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6·25전쟁이 끝나고나서 아직 어수선할 때 1955년 11월 한국일보 견습기자 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때 면접은 오종식 주필(당시)이 했는데, 웬 사람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왔다 갔다 하며 실내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그가 바로 장기영 사주였지. 7백명 응시생 중 최종 5명이 뽑혔는데 그제서야 나는 사법고시냐, 언론인이냐, 둘 중에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느냐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때 만약 떨어지거나 신문기자의 길을 포기했더라면 ‘법조계의 큰 별’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그때가 운명의 갈림길이었던 셈이군요. 후회는 안되십니까?
“언론인이 더 적성에 맞지 않았나 생각이 돼요.”
―신문기자 체험 중 기억에 남는 일은?
“1959년에 태국 방콕 ECAFE 본부에 특파되어 한·일 민간항공기 비행관할 구역 설정을 위한 ICAO회의 취재 보도, 금문 마조도 해협 긴장상태 특파 보도, 그 이듬해 3개월간 라오스 콩레 반란으로 인한 내전을 종군 취재했죠. 그 뒤 61년도엔 미국 중남미 등 14개국과 유럽 아프리카 26개국을 순방하며 특별 취재를 했어요, 전현직 국가 수반을 단독 회견한 것도 일본의 이케다 수상, 브라질의 꽈도로스 대통령 등 여러명이었죠.”
―62년도엔 올림픽 예선 원정 축구단 취재를 하는 길에 최초로 공산권 국가에도 특파됐었죠? 이스라엘, 터키, 버마, 태국 등과의 친선축구 경기 보도를 했었구요. 그 이듬해인 63년도부터 65년도까지는 축구가 아니라 취재를 위한 각국 특파원으로 베트남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버마 인도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두루 돌았구요.
“예. 장기영 IOC 위원의 특별 보좌관으로 76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그레노블, 멕시코, 로잔 등 그밖에도 여러 곳을 돌며 총회에 참석했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88년 서울올림픽때는 대회 공식 신문 제작 총책임을 맡아 영어 프랑스어판 신문을 매일 64면씩 34일간 발행을 하여 역대 올림픽 공식신문 중 가장 우수하다는 IOC 공식 평가도 받았습니다.”
― 세계를 가장 많이 돌아본 언론인이 국제적 감각으로 만든 신문이 어련했겠습니까. 국제언론인협회(IOC) 한국대표로 마드리드, 카이로 등 8개 총회에도 참석하였었죠? 95년 5월엔 미국, 1996 에틀란타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IOC 보도분과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었구요. 개인적으로는 56년 사회부 기자로 출발, 63년 사회부 차장, 64년 8월 기사심사부 부장을 거쳐 65년 2월 주월 특파원이 되셨는데 그때 얘기도 좀 해주시죠.
“베트남 종군기자를 두 차례 했어요. 처음 주월 특파원으로 갔을 때 ‘기자는 위험한 현장에도 발로 뛰어 취재해야 된다’는 생각에 저 혼자 특별 사정을 하여 퀴논서 15km쯤 떨어진 곳으로 전투병과 함께 들어갔죠. 그때 베트콩에게 포위를 당해 미군 대위 1명이 전사하는 현장에 있었어요. 사람이 죽는다는 게 별것 아니구나, 실감하게 됐죠. 부상병을 후송하는 헬리콥터에 간신히 올라타 사지를 탈출했는데, 이것을 안 장기영 사주가 <앞으로 절대 그런 모험하지 말라>고 전문을 보내왔었어요.”
― 65년 8월 외신부장이 되고, 68년 4월 편집부국장겸 주일(駐日)특파원이 되셨는데, 그때 기억나는 일은 뭐 없습니까?
“주일 특파원으로 만 4년을 근무했는데 임삼, 이원홍, 내 뒤에 조두흠이 좀 오래 했죠. 그때 일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겠고, 내 얘기만 할 게 아니라 오인문씨 얘기 좀 들읍시다. 사실(事實)에 기반을 둔 신문사에 허구(虛構)를 생명으로 하는 소설가가 입사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 네, 당시는 요즘과 달라서 1년에 전국의 소설가래야 10명 안팎 배출되는 때였는데 61년도에 데뷔를 했으니까 어느 새 반세기가 지났군요. ‘주간한국’이 창간되던 해인 1964년 한국일보사에 입사하여 ‘주간여성’ 부장을 끝으로 1988년에 그만두었습니다. 퇴직후에도 대학 등에서 겸임교수로 신문 편집론, 문예창작 등을 강의하며 보내왔습니다. 그 동안 ‘한국문학상’ ‘예총 예술문화대상’ 등을 받았고, 문단 감투도 더러 썼지만 이제는 후배들에게 물려준 상태입니다. 사실에 근거를 둔 저널리즘과 허구(虛構)를 본질로 하는 소설, 이 두 가지 길은 전혀 이질적인 것 같지만 둘 다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고문께서도 재클린 수잔의 최고 베스트 셀러 소설로 기네스 북에도 등재된 <인형의 계곡>을 번역 출판하신 적도 있으니 번역문학가로 진작 등단하신 셈 아닙니까?(웃음)
“저널리스트는 속성상 문학만이 아니라 꾸준히 다른 분야를 이해하고 포섭하고 융합해내야 하는 숙명같은 걸 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역기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언론인회 회원 중엔 현직을 떠난 분들도 많으신 것같은데 해병대의 유행어처럼 <한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다>라는 지론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도 비록 현직을 떠났지만 공공(公共)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기자정신이 몸에 배어 ‘문단의 정의파’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원칙과 순리에 어긋난 범법행위는 용서 못하고 끝끝내 진실을 밝혀 소위 ‘정관(定款)파동’ 등을 바로잡아 놓았습니다. 저널리스트를 거쳐 정계나 관계, 경영계로 진출한 분들도 적지 않은데 그분들이 이런 기자정신을 계속 유지한다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한번 저널리스트는 영원한 저널리스트이다>라는 말은 우리 언론인회에서부터 퍼져나가게 해야 될 것같습니다.”
― 정고문님 개인 얘기로 돌아가서 기자시절 잊을 수 없는 사건이나 비화같은 게 있으시다면 공개해 주시죠.
“뭐 비화랄 건 없고… 내가 사회부에 재직하던 무렵인데 공항 담당 기자로 <오는 사람 가는 사람>난도 그 무렵 만들었습니다. 그때 무슨 사건으론가 일본에 체류중인 한국 경제계의 대표적 재벌인 L씨가 검찰의 요청으로 귀국을 종용받고 있었어요. 그런데 귀국 승객들이 다 내린 비행기 안을 들여다 보니까 한 사람이 끝끝내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었어요. 내가 카메라 셔터를 눌러 렌즈에 담았지. 그가 바로 그 재벌의 총수였거든. 검찰과 묵계가 되어 있었던지 그 길로 도로 그는 출국을 하고, 그 비서실 멤버들에 의해 나는 어디론가 끌려가서,,,”
그 기사를 작성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강요하며 그들은 두툼한 보증수표 뭉치를 찔러넣었다. 실랑이 끝에 신문사로 돌아가자 장기영 사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사주 앞에서 보수 뭉치를 내팽개치며 사실대로 보고를 했다. 그리고 기사를 썼다. 특종이 될 수 있는 그 기사는 신문에 한 줄도 보이지 않았고, 당시 사회부장 이목우씨가 그에게 “이 바보야...”하던 말만 오랜 여운을 남겼다. 그 사건에 항의하며 사표를 써내고 언론계를 떠날 결심이었지만 사회부장의 끈질긴 만류로 그 사건은 그런채로 흘러갔다.
4·19 후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 체류중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고있을 때 그를 ‘마지막 인터뷰한 기자’가 정고문이었음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미국 유학생으로 위장해서 “경의(敬意)를 표하고 싶다”고 사정하여 하와이 해변의 미군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박사를 간신히 면회허락을 받았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박사는 망연히 태평양 바다를 내다보고 있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접시를 닦고 있었다. 유학생이 아니라 한국일보 기자임을 영어로 밝히자 이박사는 대뜸 한국말로 “한국사정이 어떤가?”고 믈었다. 그때 한창 보릿고개로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얘기를 하자 한숨을 길게 내쉬던 이박사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이박사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자 프란체스카 여사가 갑자기 이박사의 뺨을 때렸다. 중풍으로 입이 옆으로 돌아간 걸 그렇게 해서나마 임시로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모국의 신문에 ‘이박사의 정상적인 모습’이 보도되게 하려는 노력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렇게 특종한 기사를 당시 노스웨스트 항공기 화물담당자 편에 특별히 부탁하여 보내자 그 기사를 본 장사주는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고 들었어요. 또 그 뒤 K.T. 사장 때였는데 전주 예수병원 원장을 만났더니 ‘이틀 전 기사가 실린 걸 신문이라고 내려보내느냐며 항의를 해요. 그 당시는 영자신문인 K.T. 기자들은 오후에 츨근해서 석간신문 보고 기사를 영역하다시피 했던 시절이죠. 그 얘길 장사주에게 해서 당시 한국일보처럼 K.T.도 지방판 시내판 하루에 두 번 발행을 했어요. 근무시간이 앞당겨지니까 기자들은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경영 측면에선 개선할 요소가 발견되면 과감히 밀어붙여야 되는 거예요.”
그의 좌우명은 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된 생각을 깨뜨리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자는 의미다. 그 말을 할 때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인 그의 기질이 그대로 느껴졌다.충북 제천서 당시 면서기를 하며 “인근에서 글 잘 쓰고 인정 후하기로 소문났던” 정인택(鄭仁澤)씨와 권희숙(權喜淑)씨 내외의 4남 중 장남으로 그는 태어났다. 그리고 6살 때 전가족이 서울로 이사, 용산고와 중앙대를 거쳐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 신문대학원을 수료했다. 자녀는 1남1녀에 손자가 4명이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노부부가 단출하게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모교인 중앙대에서 <자랑스런 중앙인상>으로 뽑혀 상도 받았다.
―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저널리즘의 가치를 논할 때 미디어 경영자, 기자의 자질, 소유와 경영 부문의 문제와 함께 ‘저널리즘의 철학’이 심각하게 대두되는데 <좋은 기사는 시민을 현명하게 만들고, 나쁜 기사는 오도한다>는 말을 염두에 두고, 저널리즘 종사자들이 어떤 철학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에 그는 그의 이름자 발음 그대로 ‘태연’히 대답했다.
“저널리스트의 철학?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 변화해야 하고, 이 ‘변화’와 ‘발전’의 방향이 제대로 잡혔는가부터 볼 줄 아는 안목부터 갖춰야 된다고 봐요. 지금은 지난 3백년간 이 지구촌을 주도해온 세력이 숨가쁘게 변화하는 시대예요.”
- 이런 때 우리 사회는 인터넷, SNS. 등 새로운 매스 미디어 환경의 등장으로 요동치고 있다. 컴퓨터와 ‘나노’산업 등의 영향으로 십수년 안에 현재의 인류 수준을 능가하는 ‘신(新)인간’까지 등장하리라고 예언하는 과학자도 있다. 이런 때 저널리스트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대중적인 분노’의 문제 등으로 시련을 치르고 있어요. 본능에 가까운 감성의 표출 등 말입니다. 감성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한 이성과 판단력으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소신을 지닌 저널리스트들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인터넷이나 SNS는 종이신문이나 공중파 방송보다 대중을 즉흥적 감각적으로 몰아가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올바른 비판의식은 사라지고 말아요. 대중이 이런 위헙에 빠져들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하는 문제도 슥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