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志鎬(80) 본회 회우의 이력은 독특하고 화려하다. 신문기자로 출발하여 신문경영에 ‘예산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시행한 관리형 언론인이다. 관계에 진출, 문공부 해외공보관으로 한국을 알리는 데 힘썼고, 외교통상부 대변인을 시작으로 외교관이 되어 주 예멘 대사 등을 지냈다. 두 차례에 걸쳐 해외에서 신문학을 공부했으며 퇴임 후에는 대학 강단에서 통일문제와 국제관계학을 강의했다. 훤칠한 키에 짙은 눈썹과 화색이 감도는 얼굴, 쉼표 없이 쏟아내는 달변에 에너지가 넘친다. 기자의 면모 보다 관리형에 학자풍의 노신사다. 지난 5월 15일 프레스센터 부근 음식점에서 다양한 경력의 人生 歷程을 들었다.
#“애증 교차하는 아버지”
-선친이 柳鴻烈(1907∼1966) 제헌의원이시죠?
“그렇습니다. 선친은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충북 제천에서 출마하여 네 번째로 가장 많은 표를 얻어 당선 됐어요. 그 뒤 2대에서 6대까지 국회의원 선거에 잇달아 출마했으나 연속 차점으로 낙선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국회 진출의 집념을 버리지 못해 살림이 기울어 학창시절을 거지처럼 보냈지요.”
-정치인 아버지와 자연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반세기가 지난 어느 날, 아버지의 발언이 제헌국회 본회의장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국회속기록과 자료 등을 뒤져 확인해 보면서 처음으로 선친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참 많았구나 생각했습니다. 민주화가 된 요즘 국회는 툭하면 단상을 점거하며 난투극을 연출하는 것에 비해 제헌의원들은 긴장된 상황에서도 의사진행 규칙을 비교적 잘 준수하고, 격한 논쟁에서도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조용중 저 ‘대통령의 무혈혁명’에 따르면 ‘1950년 3월 10일 본회의 이틀째 질의에서 일민구락부의 유홍렬은 이(헌법개정안) 문제로 “공산당 프락치사건이 나지 않을 것을 보장해 준다면 모를까…”라고 말한 것이 큰 소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6척 장신의 선친은 제천군 청풍면 문화 류씨 종가에서 태어나셨고, 유교 전통을 고수하며 원칙에 완고하고 청렴하셨어요. 수원에서 통학하며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 전신)를 나와 청풍, 주문진, 문막 금융조합에 근무하시다가 8∙15 광복 몇 해 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셨어요. 1945년 해방이 되자 주민들에 의해 청풍면장에 영입되었고 제헌의원에 출마하는 계기가 된 거죠” 1966년 해외유학시절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늘 가슴 한 켠에 남아 짠하다고 덧붙인다.
-선친과는 경복고 동문이시군요
“청주에서 중학교를 나왔고, 1948년 서울로 이사하여 경복고를 다녔어요. 가세가 기울어 대학교(고려대 생물학)는 시쳇말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녔습니다.”
#“영어 잘한다”코리아타임즈 발령
-기자가 된 동기는?
“대학졸업을 앞두고 신문기자 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했어요. 취직하여 자립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앞선 거죠. 1958년 한국일보 공채 8기로 입사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영어 성적이 좋다며 자매지 ‘코리아 타임즈(KT)’로 발령을 냈어요”
영자지 코리아 타임즈는 한국일보 기사를 번역하여 게재하던 것이 그 시절의 관례. 경제분야 기사를 번역해 게재했던 그는 기자단에 가입 안 된 부흥부에 드나들며 자발적으로 취재하여 기사를 썼다. 발로 쓴 기사 덕에 코리아 타임즈 기사는 한국일보 기사와 다르고 정확하다는 입소문이 당시 宋仁相 부흥부장관의 귀에 들어가고 주한 외국인 사이에 퍼지면서 KBS와 함께 기자단에 가입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KT에 근무하면서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해 아시아재단 후원으로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에 유학, 신문학을 공부했다. 1962년 말에 귀국한 그는 한국일보로 복귀했고, 정치부에서 중앙청과 공보부 등을 출입하며 의욕을 불태웠다.
-1964년 서울신문사로 스카우트될 때 편집국이 아닌 기획실로 옮기 이유는?
“미국신문협회(우리나라 신문협회와 비슷한 기구지만 발행인 뿐 아니라 제작국장 등 참여)가 국제신문인협회(IPI)의 후원을 받아 개도국인 한국 언론의 경영실태와 개선안을 마련하기 위해 신문경영 전문가를 파견했어요. 파견단 대표는 프랭클린 셔즈(Franklin. D. Schurze) South Bend Tribune紙 저널 매니저였지요. 60일 동안 체류하면서 활동하는 기간에 그를 보좌할 수 있는 영어를 잘하고 신문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신문협회에 의뢰했고, 張基榮 사장의 추천으로 셔즈 일행과 전국 신문사를 순회하며 경영실태를 조사하여 개선책을 권유 했습니다”
당시 한국 신문의 경영실태는 열악했고, 대부분 구멍가게 식으로 운영했다는 것. 서울신문사를 방문한 셔즈는 張太和 사장에게 “신문경영에 예산제를 도입하라”고 제의했다. 張 사장은 “적자가 나는 형편에 예산제 도입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셔즈는 “적자를 메우는 방법은 수입을 늘리거나, 지출을 합리적으로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며 경영합리화를 촉구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지호 기자는 장태화 사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망설임 끝에 수락하여 기획실 부장으로 입사, 언론경영의 관리자가 됐다.
-예산제 도입은 성공하셨나요?
“그 시절 신문용지 확보가 무척 어려웠는데, 인쇄 때 파지가 20%나 났어요. 미국과 일본의 1%에 비하면 엄청난 손실이죠. 낡은 윤전기도 문제지만 가장 큰 요인은 실무자들의 인식 부족이었죠. 실무자 교육과 처우개선 등을 통해 파지를 줄이는 대안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한국 신문사에서는 처음으로 예산제를 도입하고 지출 항목과 수입항목을 점검하며 제작 및 지출 일지를 작성하게 만드는 등 경영합리화에 기여했다는 것. 예산제 도입 6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서는 등 경영체계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1966년 두 번 째 유학길에 올라 콜롬비아대학에서 신문학을 수학했다.
“장태화 사장은 제게 참 고마운 분입니다. 유학 떠난 후 선친이 작고했는데 ‘공부하러 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으며 총무처 출입 시절 丁一權 총리실 비서실에 근무하던 지금의 제 처와의 결혼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주셨어요. 1년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신문사에서 총무, 광고, 제작국장, 기획심사실장 등을 두루 거쳤습니다.”
#“해외홍보관으로 관계 진출”
-언론계를 떠난 계기는?
“1972년 대한일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으나 사양했고, 한양대학교에서 기획실 신설 제의를 받아 내정된 상태에서 李揆現 코리안리퍼블릭 편집국장(전 문화공보부 장관)의 추천으로 해외공보관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심할 때 尹冑榮 문화공보부장관이 장태화 서울신문 사장을 만나 설득해 달라고 요청하여 14년간 재직한 언론계를 떠나 관계로 진출했어요”
-해외공보관 첫 임지는?
“주 인도대사관 공보관입니다. 당시 盧信永 전 국무총리가 공관장이었고, 북한의 영향력이 큰 시절이었습니다. 우선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지 알리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영어로 정기간행물(월간)을 2만부 발행하여 배포했습니다”
-현지 반응은?
“북한 견제와 비판 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한국의 발전상 홍보에 역점을 두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여 좋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어요”
-1975년 주 일본 대사관 공보관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당시 李元洪 전 한국방송공사사장이 직속 상사였고, 수석공보관으로 문화를 담당하게 됐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韓國美術五千年展’입니다. 李源京 문화공보부장관과 李用熙 국토통일원 장관의 협조를 받아 東京, 京都, 福岡 세 도시를 순회 전시하여 한국문화가 일본문화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인식시킨 게 큰 성과였지요”
-2년 뒤 LA문화원장으로 부임하셨군요?
“문화원으로 사용할 낡은 건물만 있을 뿐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려니 애로점이 한두 가지 아니었지요. 미국 문화계 전문가들을 만나 자문을 구했더니 한국에 독창적인 문화가 없는 것으로 인식할 정도였으니까요. 독창적인 언어와 다양한 문화가 많다고 했더니, 한중일의 건축, 정원 등을 비교하여 알리라고 하더군요. 인도에서처럼 ‘코리아 컬쳐’ 라는 정기간행물 을 만들어 언론사, 박물관, 도서관 등에 배포했어요” 하지만 교민들은 “우리를 위하는 게 없다”고 반발하여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 놓았다. 당시 브레들리 LA시장 등과 함께 코리아타운 청소 등 가시적인 활동을 펴며 정착단계에 접어들 무렵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국보위가 설치되면서 소환됐다.
#예멘 대사 거쳐 통일문제 강의
-외교통상부 대변인이 된 배경은?
“산사에 들어가 6개월 동안 외무공무원 시험공부를 한 뒤 합격하여 해외공보관에서 외무공무원이 된 뒤 1981년 대변인 발령을 받았죠” 그 뒤 유지호 회우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주 일본 센다이 총영사, 주 서베를린 총영사관 총영사,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인도네시아 공사 등을 거쳤다.
-예멘 대사 시절은 남북예멘이 분단된 시기였지요?
“그렇습니다. 남북예멘간의 통일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90년 3월 초 북예멘에 부임하여 정부 훈령에 따라 남예멘 정부와 수교 교섭을 추진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달리 남예멘 외무장관과의 단독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의 수교제의를 수락하여 두 달 뒤 5월 17일 외교관계 수립이 발표됐어요. 이 보다 4일 앞서 통일 예멘 공화국이 선포됐습니다.” 그러나 1993년 8월 북부정권이 남쪽의 발전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남북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 1994년 5월 전면 내전으로 확대되었고, 같은 해 7월 북예멘의 일방적 승리로 남예멘의 분리 독립 기도를 가까스로 좌절시켰다.
“‘아랍의 봄’으로 33년 넘게 이어진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마감하는 예멘 대통령 선거가 지난 2월 치러졌고,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취임했으나 각 부족과 무장세력으로 갈라진 예멘 사회의 통합은 아직도 풀어야할 과제”라고 설명한다.
그 뒤 워싱턴 소재 존스 홉킨스대학 SAIS 부설 외교정책연구소에서 예멘과 독일 통일문제에 관한 연구를 한 유 회우는 1996년 국제교류재단 감사를 끝으로 공직을 떠나 대학 강단에서 통일문제와 국제관계학을 강의했다.
저서는 남북 예멘이 평화통일을 이루기까지의 과정과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예멘의 남북통일’(서문당 1997)과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인류국가의 길’(문학사상사 2001)역저 등 다수.
일주일에 서너 번 헬스클럽에 들러 운동하고 평소 산책을 하면서 건강을 다진다고 한다. 술은 체질에 맞지 않아 잘 마시지 않고, 담배는 첫 아이를 낳고 끊었으니 40여년 됐다는 것. 부인 전영상 여사와의 사이에 1남 2녀. 아들 산권(35)씨는 뉴욕에 있는 종합미디어그룹 캠캐스트 팀장, 장녀 유미(41)씨는 한국문화교육진흥원, 둘째 딸 난이(40)씨는 ‘리움 미술관’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