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리 급하여 서둘러 떠나시려합니까. 그동안 쌓아 오신 영광의 길, 큰 걸음. 그보다 힘에 넘치는 그 음성이 귓전에 남아 있는데 어인 일이신지 허망하기만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저희들의 장탄식을 듣고 계십니까. 나무가 조용하려 해도 바람이 멎지 않는 것처럼 세월과 함께 인걸도 사라지게 마련입니까.
언제나 정이 넘치신 선배님은 때로는 한 가족처럼, 또는 큰 스승처럼 저희를 이끌어주셨지요. 그래서 더욱 저희들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지는듯합니다.
선배님은 일을 위해 태어나신 분, 끝없는 열정과 의욕으로 올해 미수를 맞으시기까지 항상 현장을 뛰면서 펜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수수한 모자와 운동화에 밴 땀방울, 그리고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선배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스포츠기자, 평론가로서 걸어오신 한 평생은 한국스포츠 무한전진의 역사와 함께 빛날 것입니다. IOC 공로트로피, 소강체육대상, 아산체육대상 등 많은 수상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선배님과 함께 한 세월이 어느새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지난날 서울-부산간 역전마라톤대회 때는 가파른 언덕, 흙길을 마다않고 코스를 달리며 대회운영을 진두지휘하시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또 비킬라 아베베를 불러 국제마라톤대회를 열고 장사씨름, 국제농구대회 또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초청 전국순회경기 등 1960년대 들어 한국스포츠의 동맥을 만들어 가실 때의 열정적 추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한국일보에 들어가 그 대오에 서서 땀 흘리던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아울러 IOC위원인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와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께서도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을 해주셨지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신 손기정 선생님과 함께 마라톤진흥에 앞장서서 도쿄올림픽에서, 또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고함지르시던 일,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안은 양정모 선수를 얼싸안고 기뻐하시던 일, 그리고 86, 88 영광의 행진에 동분서주하시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이제 런던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감동의 순간을 하늘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응원하시겠지요.
선배님의 의욕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지요. 인물체육사와 칼럼집 10여권을 쓰신 뒤에도 올해 미수를 기념하여 또 한 권의 저술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도움을 청하셨지요. 바로 한 달 전의 그 약속을 지키려합니다. 하나 더 소망이 있다면 올해 착수된 한국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선배님의 60년 스포츠생애를 모시고 싶습니다.
안타깝고 죄송한 일은 부장님, 국장님 당시 꾸중을 받고 자란 저희 후배기자들이 조촐한 미수축하자리를 마련하려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너그러이 받아주시기를 빕니다.
언젠가 저에게 말씀 하셨지요. 신문기자는 정년이 있지만 평론가의 길은 무한한 것이라고- 더구나 저술가가 되려면 세월의 벽을 초월하는 정보력과 지구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입니다. 노년에 접어들면 펜을 놓아버리는 저희들에게 주시는 소중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남겨놓으신 일이 있다면 그 뒤를 잇겠습니다.
근심 없는 저 세상에서 편히 안식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영혼을 통하여 저희들에게 변함없는 격려와 사랑을 보내주십시오.
조동오 선생 영전에 성병욱(전 중앙일보 주필)
법조기자의 전설이셨던 고 조동오 선배님!
창간 1년이 훨씬 지난 어느날 중앙일보 사회부에 나타난 선배님을 먼 발치에서 처음 대하며 느꼈던 그 형형했던 눈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저 분이 바로 법조를 주름잡는 ‘조똘’이야 하는 수근거림이 편집국 전체로 번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똘’이란 애칭을 지니셨던 선배님은 그때 이미 법원·검찰청을 주름잡으며 수많은 특종 보도로 모든 법조 기자들의 경외의 대상이셨습니다.
한국일보 근무 시절이던 1963년 세상을 뒤흔들었던 세칭 ‘4대 의혹사건’을 비롯한 숱한 특종 보도는 선배님을 법조 기자의 전설로 등극시켰습니다.
공화당 사전 창당 자금 마련과 관련, 한전 주식 10여만 주를 미리 싸게 확보해 놓고 거액의 차액을 챙긴 증권 파동, 워커힐 부정 도박사건, 새나라차 부정 사건 등은 5·16 군사혁명 정권 하에 벌어진 최대 의혹 사건으로 정치·사회적으로 군사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선배님은 후배 기자 한 명과 밤중에 비밀영장 담당 부장판사실에 잠입해 서랍과 서류함을 뒤져 영장 부본을 찾아내 손전등을 비추고 중요 내용을 베끼기를 2주 동안 수차례나 감행해 완벽한 취재를 하셨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부지런함과 열정으로 여러 검찰 간부들과 돈독한 친분을 맺어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해주는 취재원이 많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하기야 인사를 포함해 중요 고비마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자문을 청하는 언론인이니 검찰 간부들도 선배님을 특별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선배님은 이렇게 뛰어난 기자셨을뿐 아니라 후배들을 잘 챙겨주는 속정 깊은 선배이셨습니다. 후배들과의 그 숱한 회식 자리에서 언제나 비용은 철저히 선배님 차지였습니다. 신문사에 그런 경향이 있긴 했지만 선배님은 유별날 정도로 철저하셨습니다.
제가 1969년 3월말 첫 해외 출장중 도쿄에 들렀을 때 주일특파원으로 바쁜 중에도 반나절 시간을 내 서울에서 볼 수 없었던 곳을 안내해 주시고 저녁까지 같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1990년대 대명레저 사장으로 계실 때 저를 비롯해 많은 후배들이 휴가철에 선배님 덕을 또 얼마나 보았습니까.
선배님은 언론인 답게 위 아래 가릴 것 없이 바른 말을 서슴지 않으셔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셨지만 또 손해도 보셨던 것 같습니다. 편집국장이셨던 1974년말 동아일보 광고 사태와 관련해 경영진과 기자들의 대립과정에서 국장단이 낸 사표를 철회해 달라고 댁으로 찾아간 후배들에게 부국장은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거두어 드리도록 권하겠지만 나는 마음을 비웠다고 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언론인의 꽃이라 할 편집국장에 오르셨지만 우리 후배들로선 오래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컸습니다.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기신지 한 달여만에 교수 위주 논설위원실 체제가 기자 출신 체제로 바뀌면서 저 같은 평기자와 차장들이 논설위원이 되자 선배님은 자원해 동서문제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젊은 후배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속 깊은 배려로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언론계 후배들이 모여 장의를 모시는 것을 선배님도 기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잠드소서.
우리시대 영원한 사회부장 민규호 선생님
김재영(본회 원로회우· 전 서울신문 지방부장)
그토록 자상하고 부지런하셨던 선생님과의 전화통화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그저 할 말을 잊곤 했습니다. 전화를 받으시고도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시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 필설로 다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까. 졸지에 부음을 받고 보니 망연자실, 선생님과 한 시대를 살며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칼날을 번득였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듣자오니 많은 대한언론인회 회원들이 참석해 애도해야 할 선생님 영전이 너무도 허전했던 것 같습니다. 연락이 제대로 안 돼 마땅히 조문해야 할 저도 몰랐으니 이 또한 비통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저승에서나 안식을 누리시기를 삼가 비오며 사모님을 비롯한 유가족 분들에게 이 지면으로 나마 조의를 표하며 사과를 드립니다.
돌이켜 보니 선생님의 걸어오신 90평생은 고집스러운 언론 외길이었습니다. 6·25 전쟁, 4·19학생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문민, 국민의 정부출범 등 반세기에 걸친 우리 근현대사의 언론 현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체험하면서 살아온 우리들, 전후의 언론세대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 격동하는 역사적 배경과 암울했던 한 시대의 사회 환경은 가히 무진장의 뉴스 원을 우리들 앞에 쏟아 냈습니다. 선생님은 바로 그 폭발적 뉴스원의 풍요(?) 속에서 사회부기자와 사회부장이 되고 마침내 기자의 최고 보직인 편집국장까지 맡아 보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선생님은 20여년간 법조계를 출입하시면서 특종에 특종을 수도 없이 보도해 동료 언론인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했습니다. 지금도 예외가 아니지만 선생께서 그토록 발이 닳도록 출입하시던 법창(法窓)에는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줄 대 사건에서 부터 한낱 잡범에 이르기 까지 모든 세태가 투영되곤 했습니다. 특히 장면 부통령 피격 사건에서부터 정판사 위폐사건 특종보도는 선생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보람을 느끼는 단독 취재였음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박인수 엽색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 선생의 번득이는 취재안목은 요즘도 가끔 화제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민규호 선생님!
이제 선생님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나시지만 선생께서 남기신 그 값진 족적은 우리 후진들에게 영원한 귀감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극락왕생 하시는 길에 명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선생님과의 이별을 통곡하며 거듭 유가족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문제안 선생 영전에
대한언론인회 회장 홍 원 기
존경하는 문제안 선생님!
이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입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익장을 과시 하시며 후배들을 격려 해주시던 선생님이 졸지에 가시다니 저희들은 그저 망연자실, 말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먼저 선생님의 가심에 삼가 명복을 빌며 졸지에 상을 당하신 유가족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1920년 4월 9일 경성부 회동(현재 회현동)에서 태어나신 후 양정고등학교 와 일본 명치대학 영화과를 졸업하셨으며 방송국 공채로 입사 하신 후 ‘아나운서’로 언론계에 들어오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언론계에 입문하실 무렵은 사실 어렵고 혼란스러운 격동의 세월이었습니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하실 때 광복을 맞이하시고 1945년 9월 제1방송을 한국어 방송 채널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 광복 이후 국내 최초의 방송 취재 기자가 되신 후 많은 언론계 후배, 특히 방송인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빛나는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특별히 한국전쟁 당시 서울신문 종군기자로 활동을 하신일이라든지 1953년 정전협정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신 일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선생님은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고 계시던 1958년 8월, 정부수립10주년기념 사업으로 ‘폭스바겐’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며 ‘베를린에서 판문점까지 5만킬로 자동차 주파여행을 단행,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전쟁 이후 최현배 선생과 함께 ‘한글운동가’로 한글학회 단체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시면서 늘 올곧은 언론인으로서 우리 언론계는 물론 한글학계 어디에서나 존경 받는 선비로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지만 그 바쁘신 중에도 많은 저서를 남기시는 열정을 본보이셨습니다. 남기신 저서가 모두 독보적이어서 또한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선생님께서는 특히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는 결코 참지 못하시는 꼿꼿한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이 늘 강조하신 ‘올바르고, 슬기롭고, 부지런하게’라는 가훈과 늘 좌우명으로 중시 하셨던 끝없는 전진, 끊임없는 투쟁은 바로 선생님의 올곧은 삶을 웅변으로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큰 행적을 남기신 선생님의 가심은 가뜩이나 원로의 목소리가 아쉬운 오늘, 우리 언론계로서는 큰 별을 잃은 충격을 느끼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문제안 선생님 !
이제 선생님께서 가시는 저 하늘나라는 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편안한 세상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부디 이 세상에서 갖고 계시던 일체의 미련일랑 떨쳐버리시고, 그리고 모두의 후고의 염려를 훌훌 털어 버리시고 인간의 마지막 생명이 영원히 잠드는 그 곳에서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언론인들은 선생님의 영적인 삶이 항상 강녕하시기를 빌고 또 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