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처럼 캄캄한 밤. 高 哲 공작대장은 영흥만 호도반도 적진지 깊숙한 곳에 착륙했다. 북파공작원과의 접속 장소인 해변 기슭 큰 바위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폈다. 바닷가 바위 뒤에 검은 물체가 보인다. 권총을 빼든 채 낮은 포복으로 서서히 접근했다.
“동무! 야밤에 왜 여기에 서성거리우까?”
“내래 영흥에 사는 농사꾼이우다. 소응진 딸네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다 길을 잘 못들어 헤매고 있수다. 여기 당원증과 통행증도 가지고 있수다” 너덜너덜 헤진 농부 복장 조끼에서 종이쪽지를 내민다. 내무서원이나 보위부원으로 알고 위기를 모면하려는 증명서다.
고 철 대장은 바짝 다가가 농부의 귀에 대고, “동무! 나 국군이요. 공군 특무대원이요. 걱정말고 오우다.” 농부(북파공작원)는 어리둥절해하며 우물거린다. “여기는 위험하니 저쪽 숲 속 해변으로 갑시다” 그제서야 반신반의하던 농부는 허리춤에서 신호용 플래시를 내보이며 “고맙수우다. 이렇게 위험을 무릎 쓰고 마중까지 나오다니 정말 고맙수우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다를 향해 황색 플래시로 신호를 보냈다.
0시 10분. 작전시간 10분이 초과됐다. 이세환 분견대장은 육지에서 300m 떨어진 해상 전마선에서 고 철 공작대장과 북파공작원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신호를 보고 황급히 해변으로 접근했다. 두 사람은 쏜 살같이 전마선에 올랐다. 북파공작원 귀환 작전은 무사히 끝났다.
‘동무! 나 국군이요’(예서원/2004년)는 6·25 때 공군특무대 대북 첩보작전 요원으로 활약했던 李世煥 본회 원로 회우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애국가는 그냥 나라 사랑하는 여러 노래 중 하나일 뿐 국가(國歌)가 아니다”라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발언이 나온 지난달 15일 적 후방 깊숙한 원산 영흥만 모도와 함경북도 성진 앞 양도에서 첩보작전을 펼쳤던 이세환 회우를 만났다.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1호선 개봉역에서 전철을 탄 뒤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 강남역에서 신분당선을 갈아타고, 정자역에서 하차, 다시 분당선으로 바꿔 탄 뒤 오리역에서 내려 기다리던 이 회우를 ‘접선’했다. “최근 ‘요도협착증’ 시술을 받아 멀리까지 오게 하여 미안하다”며 반긴다. 나중에 눈치 챘지만 훈장과 군 시절 비망록, 신문기자 시절 특종한 신문스크랩, 50년 간 모은 우표 등 보여줄 것이 많아 집으로 오라고 한 ‘작전’이었던 것 같다. 올해 여든 네 살. 딱 벌어진 어깨에 걸음걸이는 흐트러짐이 없다.
용인시 수지구 죽전2동 벽산아파트. 거실 벽에는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목에 걸고 찍은 사진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안방 액자에 넣어 걸어놓은 훈장도 당시의 공훈을 기리며 금빛으로 빛난다. 금성화랑무공훈장은 양도 분견대 설치 후 첫 침투공작을 성공리에 마친 1952년 10월 1일 통신문을 통해 알았다. 충무무공훈장은 휴전 후 원대 복귀하여 국군포로들을 신문하던 1953년 8월 15일 받았다. 첩보공작 공로로 특무부대원이 훈장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부대 안에서도 화제가 됐다는 것.
“死線넘나들며 첩보작전”
-첩보작전 특성상 비밀 유지가 의무인데 50년 만에 ‘동무! 나 국군이요’를 쓴 계기는?
“사선을 넘나들며 첩보작전을 폈던 고 철 공작대원이 휴전으로 철수하면서 소식이 끊겨 생사를 몰랐어요. 50년 만에 감격적인 재회를 했습니다. 분당 야탑 부근에 살더군요. 지척의 거리에서 만나지 못한 거죠.”
고 철 씨는 이 회우가 모도 분견대장 시절 현지에서 특채한 공작대원이다. 가족이 모도에 있어 신원이 확실하고, 학력도 있고 판단력과 통솔력이 있어 보였다. 분견대장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첩보작전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고 씨의 아들은 공군 대령(공사 26기)으로 아버지가 6·25 때 참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원이란 특수 신분 때문에 아무런 인사 기록이 없어 6·25참전 사실마저 의심받는 것이 안타까웠다. 확실한 입증 자료와 증인이 있으면 ‘6·25참전유공자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일한 증인은 이세환씨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듣고 국가보훈처에 의뢰하여 수소문한 끝에 수원 보훈지청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고 철 씨는 대가나 보상을 받기위해 목숨을 건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내건 사실을 잘 알지요. 고 씨 부자를 만난 뒤 공군시절 서류가 담긴 상자를 꺼내 입증할만한 자료를 찾았어요. 고철 공작대장이 캘빈소총을 들고 있는 당시의 빛바랜 사진과 비망록 ‘追憶’을 발견했어요. 고 씨 부자를 다시 만나 전해주며 ‘인우보증’을 써 주었습니다.”
-고 철씨가 ‘6·25참전유공자증’은 받았나요?
“2003년 6월, 고 철 씨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곧바로 만났어요. 그는 지갑에서 하늘색 ‘참전유공자증’을 내보이며 ‘이제 가족과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감격스러워하기에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 졌어요” 전쟁이 끝난 뒤 50년, 유공자증을 신청 한지 1년 2개월 만에 고 철 씨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그 일을 계기로 첩보공작의 실제와 공작원들의 활동상을 기록으로 후대에 남기려고 집필하게 됐다”고 한다.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戰時에 첩보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목숨을 건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지요? 모도 분견대장 때 고 철 공작대장과 서울에서 교육을 받으려고 섬을 잠시 비운 사이, 북파공작원 침투작전에 투입 된 나의 부하 4명과 북파공작원 1명이 침투지점에서 인민군에게 발각 되어 총격전을 벌이다 전사했어요. 가족같이 지냈던 대원들을 잃은 슬픔과 충격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고, 그분들의 영전에 바친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양도 분견대장 시절, 양도에는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곳이다. “거센 파도로 급수 VP 보트가 들어오지 못해 C-레이션으로 끼니를 때우고, 비오는 날이 샤워하는 날이었다”고 열악한 전시 환경을 털어 놓는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空士를 지원한 동기는?
“청주사범학교 6학년 졸업반 때 6·25가 터졌어요. 휴교가 되고 피난길에 오르면서 자원입대를 생각했고, 마침 공군 제2기 사관후보생 모집 공고를 보고 원서를 냈어요.” 합격통지서를 받고 1951년 1월 8일 대구 칠성초등학교로 이전한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입대와 동시 다음날 작전상 공사가 제주도 모슬포로 옮기면서 LST를 타고 이동했다.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2월 초, 입대 1개월 만에 공군 특무대로 차출돼 특수교육을 받았다. 6월 중순 영흥만 원산 앞바다 여도의 공군 첩보작전요원으로 임명됐다. 공군 조종사의 꿈은 무산된 채 전선을 누비다가 1956년 5년 8개월 만에 제대한다.
창공을 날아 현장 취재
이세환 원로 회우는 1958년 연합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 한국일보 기자와 경향신문 차장, 한국경제신문 편집부국장 등을 지냈고, 한국사진기자회 6, 7대 회장을 역임했다.
-사진기자는 자원한 것인가?
“청주사범 시절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아 사진 찍기를 좋아했고, 현상과 인화를 했었지요. 공군 정보교육 때도 첩보활동에 필요한 커리큘럼 가운데 적외선 촬영 등 사진에 관련된 과목은 자신 있었어요. 그래서 사진기자가 적성에 맞아 연합신문사에 들어가 사진부를 자원했습니다.”
신문기자 시절로 화제가 이어지자 안방으로 들어가 신문 스크랩을 가져온다. 누렇게 퇴색한 신문은 가랑잎처럼 부서질 것 같다. 스크랩은 빈틈없는 첩보작전처럼 꼼꼼하고 치밀하다. 분견대장 시절 ‘비망록’은 50년 만에 저서로 빛을 보았다. 부서질까봐 조심스럽게 넘기는 스크랩에는 많은 특종들이 담겼다. 공군 출신답게 창공을 날며 취재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정초 속초 앞바다서 참사, 어부 31명 행방불명’
한국일보 1962년 1월 3일 석간 1면 톱 기사다. 이세환 기자는 신정 연휴를 맞아 중앙청 부근 집에서 모처럼 망중한의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2일 밤 속초지국에서 태풍 피해가 심각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기영 사장에게 “경비행기로 현장취재를 떠나면 3일자 석간은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장 사장은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며 “잘 다녀오라”고 격려했다. 3일 새벽 4시 이강훈 조종사와 함께 수색비행장으로 갔다. 혹한에 얼어붙은 엔진을 연탄불로 녹여 2인승 L4 경비행기를 타고 이륙했다.
대관령을 넘으니 검은 바다가 포효하고 속초 앞바다는 인산인해다. 저공비행으로 고공촬영을 한 뒤 대포리 비행장에 착륙했다. 미군 지프를 얻어 타고 속초항에 도착하니 아비규환이다. 1군 사령관의 브리핑을 듣고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양양군수를 통해 인명 피해와 침몰 어선 숫자를 파악했다. 기수를 돌려 서울로 향했다. 사전에 연락하여 중앙청 광장에 신문사 차량을 대기시킨 뒤 필름과 기사를 돌돌 말아 비행기에서 떨어뜨렸다. 낮 12시 40분. 3개 면에 걸쳐 대서특필됐다. 장 사장은 기분이 좋아 “2000부를 찍어 현장에 무료로 배포하라”고 지시했다. 신문을 싣고 경비행기가 다시 속초에 갔을 때 타사 취재차량들은 대관령을 넘고 있었다. 특종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경향신문 1965년 1월 1일자 신년 특집에 ‘휴전선 155마일’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서해 강화도서 동해 속초까지 휴전선을 고공 촬영한 표제의 사진이다. 공군 동기생인 金東鎭 소령이 조종하는 T-33에 동승하여 4만5000피트 상공에서 촬영하여 세컷을 이어 붙였다. “요즘이야 위성사진이 선명하게 나오지만 그 때만해도 휴전선을 카메라에 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4·19와 5·16 격변의 현장, 정치깡패 이정재가 사형집행을 사흘 앞두고 가족과의 마지막 면회하는 모습(한국일보 1961년 9월 16일자), 이 중령 일가를 무차별 살해한 고재봉의 사형집행을 포착한 ‘인간을 죽이지 않고, 죄를 죽였다’는 사진(한국일보 1964년 6월 10일자) 등 많은 특종으로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들의 조국은 어디인가?”
-主思派들의 국회 입성과 종북 좌파에 대한 견해는?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고, 反共이 國是입니다. 공산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전선을 누볐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애국가를 국가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從北보다 從美가 더 문제라는 세력들의 나라는 도대체 어디인지 되묻고 싶어요. 체제를 부정하는 그들의 의식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광화문에 인민군이 쳐들어오면 만세 부를 사람들이 수두룩할 겁니다.” 6·25 참전 노병의 언성이 높아진다.
-종북 좌파가 수면위로 떠 오른 이유는?
“가능한 한 정치 얘기를 안 하려고 합니다. 젊은이들은 늙은이들을 ‘보수 꼴통’으로 폄훼하며 오늘날 이 만큼 살게 된 것 조차 모르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북한에 퍼준 돈이 얼마나 됩니까? 그 돈으로 북한은 핵개발을 했잖아요.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그동안 법원이 반국가단체로 판결한 사건들에 대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여 많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습니까?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날개를 달아 준 꼴이지요”
-대안은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요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옛날처럼 공안 정국을 조성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집시법과 국가보안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들을 법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MB 정부가 더 이상 눈치 보지 말고 강력하게 법집행을 해 달라는 주문이다.
보건사회부 출입 때 이화여대 사회복지과를 졸업하고 아동복지 관련 부서에 근무하던 金龍淑(78) 여사와 1962년 결혼, 슬하에 2남 1녀. 장남 내외와 대학생인 손녀 2명과 함께 산다. 핵가족 시대에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