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회혼식(回婚式)을 치른 김용수 회우와 부인 유윤순 여사 부부가 동네 식당에서 외식하며 대화를 나눈다.
먼저 부인의 말이다. "당신은 행복한 남자예요."
김 회우의 화답이다. "당신은 복 받은 여자요."
서로 바라보는 눈길이 따사롭다. 믿음과 정이 눈처럼 쌓인 부부의 모습이다.
김 회우는 1927년생으로 올해 여든 다섯이고 부인은 세 살 아래다.
지난 해 까지도 해마다 미국 보스턴에 사는 둘째와 셋째 딸집에서 두세 달씩 보내곤 했는데 지난해 골프를 치다보니 18홀 돌기에 벅차고 비행기 타고 17시간 씩 여행하는 것도 힘들고 해서 올해부터 그만 두기로 했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단독주택에서 큰 아들 가족과 한집에 살지만 식사 같은 살림은 부인과 단 두 식구가 오순도순 꾸려나간다.
아들 가족과의 프라이버시는 최대한 지키면서 옆에 아들네가 있다는 뿌듯한 안정감은 최대로 누리는 것이다. 이 시대 노후를 보내는 최고의 패턴을 김 회우가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단독 주택 1층과 지하층을 세 주고 받는 월세로 생활비와 용돈 쓰고 이따금 손자들에게 용돈 주기에도 부족함이 없다니 정말 복 받은 부부가 아닌가.
더하여 1남 4녀와 그에 따른 손자, 손녀 10명이 모두 잘 살고 잘 자라고 있으니 기쁘고 때로는 어린 손녀의 재롱을 보거나 사회인이 된 손자가 용돈이라도 내밀 때는 정말 좋다고 한다.
행복이 가득한 김 회우에게도 근심거리가 있기는 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건강 문제다.
두 달 전 갑자기 오한이 나고 구토와 설사가 심해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폐렴이래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별일 없이 완치됐고 혈압과 당뇨 그리고 전립선 등으로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약물 치료를 계속 받고 있어 활동과 생활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매달 병원에 갖다 주는 50~60만원이 아까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큰 사위가 병원을 하고 있는 동해시를 다녀왔다. 손수 왕복 운전해서 부부가 함께…
'운전은 삼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고 권했더니 "집 사람이 갈 때 마다 싸 가는 것이 많고 올 때도 그렇고…" 아직, 운전은 끄떡없다고 한다.
김 회우은 거의 매일 근처 대청공원을 30~40분 동안 산책하며 기분에 따라 양재천 변을 1시간 정도 걷기도 한다. 김 회우의 유일한 근심은 부인이 더 아파 밥을 못해주면 "어쩌느냐"는 미리 하는 걱정뿐이다.
기자출신이 뉴스에 빠지는 것은 숙명일 테지만 김 회우도 매일 뉴스는 꼬박 꼬박 챙긴다. 여러 해 전부터 컴퓨터에 몰입해서 강남구청에서 시행하는 무료 정보화 교육을 받아 실력이 대단해졌다고 자랑한다.
포토 샵도 능숙하고 파워포인트도 수준급이다. 지금은 고급 과정인 PC 관리반을 수강한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각국의 국제 뉴스를 섭렵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참 좋은 나라라는 자랑을 빠뜨리지 않았다.
- 중국 유학 때부터 영어공부, 6‧25때 통역관으로 종군
김 회우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고 강원도 통천에서 자랐다.
고등학교까지 공부는 원산에서 했다. 1944년 원산상고를 졸업하던 해 형님이 사업하고 있던 중국 천진으로 유학했다. 중국 유학 때부터 특히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그래서 영어와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천진서 해방을 맞았고 이듬해 2월 미군의 LSD 귀국선을 타고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경성제대 경제학부(지금의 서울 상대)로 편입해서 다닐 때 하숙집 딸이 지금의 부인이다.
대학 졸업 후 영어 학원 강사로 인기를 누리던 중 6‧25를 맞는다. 수복 후(1951년) 함흥에 본부가 있던 미군 10군단의 민간 통역관으로 종군했다.
흥남 철수 때 부산으로 귀환했다가 HID(육군첩보부대)의 미군 소속 연락책임자로 그리고 다시 공군특무대원으로 백령도와 진남포 앞 초도 등지의 서해안 일대에서 대북 첩보원을 북한 해안에 침투시키는 작전을 미군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공작원을 북한으로 들여보내고 다시 마중 나가 데려오는 작전인데 대부분은 잡혀서 처형당하거나 변절해서 북한에 항복했다고 한다.
-죽을 고비 수없이 넘겨
40~50톤 규모의 어선을 무장시키고 쾌속 모터를 달아 모선(母船)으로 이용했는데 한번은 돌아오는 첩보원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늦어져서 썰물 때가 됐고 갯벌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저만치 북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으로도 보이는 가까운 거리였다. 길고 긴 시간이 흘렀다. 하늘이 도왔던지 밀물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렸다. 별일 없었다. 배가 뜨자 쾌속으로 냅다 달리던 서해바다의 상쾌함은 무어라 형언할 길이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휴전 직전, 칠흑 같은 밤이었다. 돌아오는 공작원과의 접선을 기다리는 데 난데없이 총격을 가해오는 게 아닌가? 응사하면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상대방에서도 신호탄을 쏘고…
그런데 이게 뭐야 다른 첩보부대의 아군이 적으로 잘못 알고 공격한 것이었다.
- 대학 때 하숙집 딸과 결혼
1951년 어느 날 휴가 길에 옛 하숙집을 찾았다. 그 집 딸이 보고 싶었고 그리웠다. 그녀도 반겼고 그래서 연애했고 사랑했다. 처갓집 대청마루에서 전통의례로 혼례를 치렀다. 그렇게 60년을 함께한 부인은 김 회우가 총각 때 날씬했고 깨끗해 보여 좋았고 믿음직해서 사랑하게 됐으며 술, 담배도 안하고 가정적인 데다가 부지런하고 지금까지도 무엇이든 배우려고 하는 남편이 최고라며 흐뭇해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 1954년 동양통신사 외신부 기자가 됐다. 다음해 계약사인 UPI 통신사 한국지부 특파원으로 발탁됐고 58년에 지국장이 됐다.
그리고 다음해에 판문점에서 김용수 지국장은 세기적인 특종을 낚는다.
김 회우의 회고담이다.
- 기자 동무! 이남으로 가고 싶소,
1959년 1월27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판문점 정전회담을 취재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회담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북측 보도요원이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인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 거렸다.
"기자 동무! 이남으로 가고 싶소. 도와주시오." 깜짝 놀라 알겠다는 눈짓을 보내고 유엔군사령부 공보실장에게 알렸다. 반시간 가량 지나 망명을 받아들이라는 통보가 왔다. 유엔군 측의 비밀 작전이 시작됐고 망명 당사자인 소련 프라우다지의 평양지국 이동준(李東濬)기자는 극적인 망명에 성공한다.
이 과정을 김용수 기자가 지켜보며 특종 취재했고 간단한 인터뷰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동준 기자는 극비리에 판문점을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점심 시간, 판문점이 요란해 졌다.
누군가 라디오를 켜니 프라우다 기자가 판문점을 통해 망명했다는 UPI 통신발 뉴스가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김 회우는 세기적인 특종의 주인공이 되었다.
훗날 이동준을 만난 김 회우가 왜 나를 골라 망명의사를 알렸느냐고 물었더니 "김 기자가 미국인들하고 제일 친한 것 같았고 또 미더워 보였다." 라고 했다고 한다. 김 회우의 믿음직한 인간성이 프라우다 이동준 기자의 신뢰를 사게 했던 것 같다.
이동준 기자 망명사건 이후 김 회우는 한 동안 판문점 출입을 삼가야 했다.
북한 측의 있을 지도 모를 보복이 우려되기도 했고 미군측에서도 이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1년쯤 지난 후에 김 회우가 비밀 경호를 받으며 회담장에 나가 보았더니 북측 보도요원들은 모두 새얼굴로 바뀌었고 그들 중 한명이 김 회우를 신참 기자인 줄 알고 말을 걸어왔다.
"어느 신문 소속입네까?"
"서울의 UPI에서 왔소."
"요새는 어찌 샘 킴이 안 나타납니까?
"나하고 같이 일하는 데 그 사람 잘 압니까?
"아, 잘 알다 뿐입네까!"
"그 사람 요즘 많이 바빠서요…"
샘 킴은 새뮤얼 김이란 김 회우 필명의 약칭이었다고 한다.
망명한 이동준 프라우다 기자는 그 후 서울신문에 입사해서 국회출입 기자까지 지냈는데 5‧16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이동준 기자 망명사건이후 판문점의 분위기도 달라졌고 북측에서는 판문각을 지었고 남측에서도 평화의 집을 지었으며 감시도 강화되었다고 한다.
-군부 등장 예상 칼럼으로 파문
김 회우는 UPI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4‧19와 5‧16을 취재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취재했던 일이 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털어놨다.
4‧19 때는 경무대 총격 사건 때 학생들과 함께 총탄을 피해 골목길로 숨었던 기억이 생생하고 4‧19 이후 정부는 무능하고 경찰까지 데모를 벌이는 등 사회질서가 어지러워졌고 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군부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썼는데 한 달 후 5‧16이 터졌던 기억도 새롭다고 했다.
이 칼럼은 당시 국방대학에 다니던 지인 등의 말을 듣고 쓴 것이었다.
이 글로 예정되었던 장면 총리와의 회견이 취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또 5‧16이 발생한 후 군부가 유태하 주일대사를 소환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확인하려하자 군부가 문제를 삼고 연행하려해서 미국대사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 취재 비화 중의 하나였다.
5‧16 후 박정희의 민정 이양 관련 기자회견 장에서 "민정이양 한들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니겠느냐?" 는 질문을 했더니 크게 화를 내서 무슨 일을 당하는 줄 겁이 났었는데 그냥 넘어간 것은 외신에 대한 계산 때문인 것 같다는 회고도 했다.
김 회우는 1974년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78년에는 코리아 헤럴드의 편집국장직을 맡아 한국신문 최초로 CTS(Cold Type System)를 도입하는 업적을 쌓는다.
기자생활을 되돌아보면서 김 회우는 이승만 대통령의 국제 감각은 뛰어났으나 장면 총리의 통치 능력은 크게 모자랐고 박정희의 정권 장악은 불법적이었지만 나라를 바로세우고 국력을 키운 공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촌평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다음 대통령들에 대한 촌평을 궁금해 하자 그 얘긴 그만하자면서 대한언론인회의 6‧25 종군기자모임에서 전방시찰 때 나눴던 원로들의 나라 걱정으로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어떻게 종북 주사파가 국회까지 진출 할 수 있으며 정부는 무엇을 했냐고 한탄하면서 대통령의 시국대처 능력이, 정치력이 있기는 한 것이냐고 꾸짖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더구나 종북 세력이 통합이니 연대니 하면서 집권에 참여하게 되면 이 나라는 어찌할 것이냐고 깊은 시름을 털어 놓기도 했다.
지나친 복지와 포퓰리즘 그리고 부패에 대한 김 회우의 걱정은 나이만큼이나 깊어 보였다.
김 회우는 또 후배 기자들에 대해서도 과거의 기자들은 정의를 위해서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사명감과 프로근성 같은 것이 뿌리 깊었는데 요즘은 월급쟁이 그리고 이기적인 존재로 퇴락한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했다.
험난한 현대사를 믿음과 성실로 지켜낸 김용수 원로 회우는 개인적으로는 걱정이 없이 평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으나 나라 걱정에는 시름이 깊었다.
김용수 회우는 부인의 평가처럼 평생을 부지런하게 딴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결과, 그 열매로 평안한 노후를 보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하지 않던가, 젊어서 노력하면 늙어서 호강한다는 아주 쉬운 공식이 살아나는 사회는 환상일까?
한 달에 한차례씩 만나는 김 회우의 통천 군민회 모임과 원산 상고 동기생 모임이 건강하고 재미있는 모임으로 더 실속 있어 지기를 바라고 김 회우가 갈고 닦은 컴퓨터와 인터넷 활용 실력이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김 회우 내외분의 건강을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