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인 청여(靑餘) 이구열 회우를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의 연구소로 찾았다. 책들이 벽을 둘러쌌고 바닥에도 수북이 쌓여 있다. 이 회우가 직접 썼거나 편집하고 출판에 간여했던 책들도 상당수였다.
직접 타 주는 커피 냄새가 이회우의 따사한 인품과 열정 그리고 성실과 노력이 응집된 향기인 것을 한참 인터뷰를 하면서 깨달았다.
이회우를 만난 이틀 뒤에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 50년, ⌜신문과 방송⌟ 500호 기념 세미나가 있었다. 주제는 ‘이 시대 기자는 누구인가?’ 였다.
한 젊은 문화담당 기자의 발제 중에 “기자는 전문가일까? ”라고 회의하면서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면 기자로 기억되는 것조차 어려워질지 모른다.” 라고 발표하는 것을 듣고 미술 전문기자 이구열이라는 훌륭한 선배가 있음에 기뻤다. 전문 기자의 전설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구열 회우는 20년 전 회갑기념 논문집 ⌜근대한국미술논총⌟에 쓴 ‘나의 회고’라는 글에서 살아온 과정을 세 시기로 대별했다.
1) 6·25전쟁과 피난부터 7년간의 군복무 2)15년간의 신문기자 생활 3)미술평론과 한국근대미술사 조사연구에 전념해온 자유생활. 그런데 그 자유생활을 팔순의 지금까지도 계속 누리고 있었다.
이 회우는 지난해 8월 KBS라디오의 일요초대석에 출연해서 ‘풍운의 여류화가 나혜석 연구 40여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고 지난 1월에는 OBS의 명불허전에 출연해서 미술전문기자로, 미술평론가로, 저술가로 활동한 삶의 파노라마를 풀어내는 등 귀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초, 그리고 최고의 미술 전문기자
1958년 포병장교로 복무하다가 대위로 제대한 이구열 회우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아현동 셋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군에서 가깝게 지낸 전우의 소개로 임방현씨를 알게 되고 그 연줄로 세계일보에서 일하게 된다. 어렵지만 공부해야 겠다는 열망으로 홍익대 미술학부 3학년에 편입했다.
그 시절 고서점을 다니면서 엄청난 책을 읽었다. 대부분이 미술관련 서적이었다. 특히 유명 화가들의 전기를 탐독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유별났고 중학교 때에 벌써 서양화가들의 전기에 심취하곤 했었다.
한국일보로 옮겨 문화부장을 하고 있던 임방현씨가 이회우의 실력을 인정해서 어느 날 “이형, 미술평 하나 쓰쇼.”라고 한 것이 계기가 돼서 미술평론가로 자리 매김하기 시작했고 세계일보가 민국일보로 바뀐 뒤에는 문화부 미술담당기자로 빛을 발하게 된다. 능력이 평가를 받으면서 1962년에 경향신문으로 스카우트 된다.
바쁜 취재 일정에도 열정이 남아 1964년에는 계간 잡지 ⌜미술⌟의 주간으로 편집도 담당한다. 혁명주체로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서울신문 장태화 사장이 미술관련 사업을 벌이고자 문화부장에게 물었더니 경향신문의 이구열 차장을 데려와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당장 데려오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서슬이 퍼렇던 장 사장에게 잡혀 가다시피 1970년 문화부장대우로 자리를 옮긴 뒤 원로작가 초대전 등의 새롭고 큰 일들을 해냈다. 이시기에 사장 특별기를 타고 지방 출장을 다녔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국문화재 비화’를 100회 연재했으며 ‘잃어버린 한국문화재’란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역돼 도쿄 교포신문에 실린 일도 보람이었다.
1972년에는 대한일보 문화부장으로 전직했으며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발한 미술평론 활동을 펼친다.
대한일보로 자리를 옮기고 6개월이 되던 어느 날 아침에 출근했더니 “대한일보가 어제 문을 닫았다”고 했다.
대한일보가 문을 닫기 전 동화출판공사의 임인규 사장과 이근배 주간이
⌜한국미술전집⌟을 함께 출간하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는데 대한일보가 문을 닫자 다시 함께 일하지고 찾아왔다. “너도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냐.”면서.
그러나 이 회우에게는 같이 일한 6명의 문화부원들이 있었다.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경향과 서울신문 등에 부탁해서 부원들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문화부 미술담당 이구열 기자는 부지런했고 열정적으로 취재했으며 계속해서 공부했다. 그래서 그는 미술 분야 최고의 기자였고 평론가였다.
대한일보가 문을 닫아 15년간의 기자생활을 마감한 이 회우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나도 나이 40인데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일, 글 쓰고 책 쓰고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겠다”고.
* 출판과 평론 그리고 연구와 조사
미술전문기자로 실력을 키우고 열정을 태웠던 이 회우는 기자의 일자리를 잃으면서 자유 생활로 들어서서 더 큰 비상을 펼친다.
다음해(1973년) 동화출판공사로 옮겨 ⌜한국미술⌟전집을 만드는 큰 일에 빠져든다. 2년 반 동안, 열정으로 선사시대의 토기부터 시작해서 근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한국미술전집⌟ 15권을 출간하는 데 상임편집위원으로서 진행을 총괄하면서 보람 있게 마무리 지었다.
한국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거사요 쾌거였다. 학계와 출판계, 사회각계로부터 커다란 찬사가 이어졌다.
동화출판공사는 이회우의 노고에 보답의 의미를 담아 이회우가 하고 싶어 하는 이경성 선생의 근대한국미술 관계 논문을 묶어 ⌜한국근대미술연구⌟로 출간하도록 도왔고 이회우가 서울신문에 재직할 때인 1971년 1월부터 17회에 걸쳐 월간 여성동아에 연재하여 화제가 되었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부제,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영욕의 생애’ 를 단행본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회우의 근대한국미술연구의 첫 단행본인 ⌜한국근대미술산고⌟도 주위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모두 이회우의 한국근대미술사 연구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회우는 이런 과정을 통해 미술 평론가로, 작가로, 미술사가로, 저술가로 활동공간을 넓혀 간다.
* 한국근대미술연구소, 후반생의 자화상
이회우는 자신의 후반생, 자유생활이 1975년부터 시작됐다고 밝힌다.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차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 연구소를 유지하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시절이다. 그리고 연구소의 설립부터가 후반생의 자화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연구소의 창설일은 8월15일로 정했다. 역사적인 광복절을 자유생활의 시작과 합치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개화기 이후의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변화, 발전해온 과정과 구체적인 작품 및 작가를 연구‧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미술창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한국근대미술연구소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연구 활동의 결과를 담아 ⌜한국 근대미술⌟창간호를 그해 11월에 발간했고 1977년 11월에 5호까지 발간하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근대미술연구소는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1980년대에는 ⌜한국 근대미술 자료집⌟과 ⌜국전 30년⌟을 간행했고 금성출판사의 ⌜한국근대회화선집⌟전 27권의 편집주간을 맡아 5년 만에 완간하는 보람을 이뤄냈다. 이밖에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지원하는 ‘북한 문화예술 연구’ 가운데 ⌜북한의 미술, 그 체제 종속의 실상⌟에서 북한의 미술을 본격적으로 조사·정리하는 큰일을 맡아 하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과 근대미술연구소가 이룬 업적을 일일이 거론하기는 너무 크고 벅차다.
근대미술연구소는 1991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근처 지금의 자리에 독자적인 사무실을 갖는다. 이당 김은호 화백의 도움과 부인 김경희 여사의 힘이 컸다고 한다.
*은인들, 고마운 사람들과의 만남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이회우는 연안중학교에 다니던 18살 때인 1951년 1월 중공군의 남침을 피해 홀로 월남한다. 구월산부대 철수 병력들과 같은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으나 너무 늦어 충청남도 당진에서 내려 뿔뿔이 흩어졌다. 이회우의 은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화된다.
배를 타게 해준 은인, 피난 길 충청도에서 밥을 먹여주던 아줌마 은인, 잠자리를 마련해준 시골 아저씨 은인도 있었다. 중학교 때 미술부장 선생님이었다가 전쟁 때 군부대 문관으로 있으면서 숙식문제를 해결해 준 선생님도 은인이고 군 장교로 입대할 수 있는 정보를 준 거리 광고도 은인 못지 않은 감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군 생활을 하면서도 숱한 은인들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금화지구 전투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도,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친 것도 은인인 전우들의 도움 덕이었다.
임방현 부장에게 이회우를 추천해 새길을 걷도록 도와준 전우와 그의 청을 들어 자신을 기자의 길로 이끌어준 임방현부장도 은인이었다. 미술기자로 만난 이당 김은호 선생도 은인중의 하나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계속해서 은인을 만난 것은 지금도 은인들을 잊지 않는 이회우의 고운 심성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부인 김경희 여사도 은인중의 큰 은인이다. 개성출신인 부인이 잘 해 주어서 지금도 걱정 없이 잘 살며 슬하에 남매도 잘 자라주었고 잘 살아 고맙다고 했다. 자녀도 은인 중에 포함되는 것 같았다.
미술기자로 일할 때 이화여대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부인을 만났는데 키가 컸고 역사를 공부해서 대화가 됐으며 미모도 괜찮아서 결혼했다며 또 고맙다고 했다. 부인은 이회우가 기자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았고 미술에 대한 공감이 이뤄졌으며 성격이 따뜻해 결혼했는데 지금도 남편의 모든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 믿음에 신앙과 같은 깊이가 느껴졌다.
이회우는 근대미술이란 한 우물을 팠고 열정을 갖고 꾸준히 열심히 취재하면서 연구·조사하고 글을 썼다. 기록하며 기록으로 남는 성공의 삶을 계속해서 쌓고 있다.
기억력도 놀랍고 근대미술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가 않았다. 아직도 많은 일을 더 해야 할 능력과 소명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들에게 전해 주려고 지난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이회우는 지금 6·25 근처를 더듬고 있다고 했다. 손녀에게 쓰는 그의 이야기 자서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