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7일 저녁, 태풍 산바가 비 바람을 몰아치던 날이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무조건 택시를 집어탔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종하 회우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이었다. 택시 기사가 “길 건너편에서 타셔야 하는 데…” 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냥 갑시다. 그럼 U턴 하면 되네요”라고 내뱉었다.
몇 차례인가 ‘실버 화이팅’을 인터뷰 할 때는 늘 여유로운 마음으로 선배 회우들을 뵙고는 했었다.
요즘 필자는 나름대로 나만의 3가지 생활 원칙을 마련해 놓고 있다. 지키지 못할 때가 많지만 말이다. 첫째가 일일일사(一日一事)고 두 번째가 일일일서(一日一書)다. 남은 세월 서두를 일이 뭐 있나. 하루에 한 가지씩만 하되 글 한줄 쓰거나 한 줄을 읽기라도 하자는 것이고 세 번째로는 일일일성(一日一省)이다. 하루에 한번쯤은 자신을 되돌아보며 옛 사람 흉내라도 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원칙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 김 회우와 인터뷰해야 하는데 내일은 또 지방에 약속이 있다고 한다.
오늘이 아니면 마감 시간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라 서둘러 밤길을 나서야 했다. 오늘의 一日一事는 끝났는데 말이다. 뭐가 그리도 바쁘시다는 말인가? 솔직히 우산을 접고 아파트 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심사가 편치 않았다. 내가 왜 비를 맞으며 이러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였다.
내성적이고 공부 잘한 모범 학생
졸업 전에 서울대, 졸업 전에 기자시험 합격
일단 김 회우의 집안으로 들어서자 정갈하고 온화하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방문객의 심사를 정감 있게 감싸주었다.
사모님께서 내어놓으신 다과를 들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첫 질문을 던졌다. 고향이 창원이시지요?
김 회우는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34년에 태어났다. 상남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키가 작은 순서로 3번째였지만 공부를 잘했다. 내성적이었지만 모범생이어서 늘 급장을 맡아 했다. 김 회우의 리더십은 이미 이때부터 자리 잡기 시작했었다. 어린 나이에 일제의 근로봉사대로 동원돼 남천에서 모래 채취 작업을 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진해중학교로 진학했다가 부산 동래중학교 수학 교사이던 자형의 권유로 동래중학교로 전학했다.
동래고 2학년 때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해서 서울대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그때부터 정치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서울대학에서 제일 어려운 과(科)가 정치학과라고 해서 지원했더니 붙어서 다니게 됐다고 했다.
대학3학년 때 한국일보 견습기자 시험을 봤다. 공채4기로 또 합격했다.
이때 같이 합격한 이들이 이원홍. 김성진 전 장관 등이었다. 김회우는 기자생활을 미루고 대학생활로 돌아갔다가 다음해인 1957년 졸업반 때 다시 한국일보 기자 시험에 또 합격했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 등과 함께 견습 5기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로 대학 가고 대학에서도 재학생 때 기자 시험에 합격한 일을 회상하면 후회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앞당기기 보다는 취미생활을 즐겼으면 인생에 그만 큼 더 플러스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대학생활 중에 신진회. 개진회 등의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아쉽다고 했다.
한국일보에서 사회부기자와 정치부기자로 열정을 불태운 김 회우는 5․16후에 서울 신문 사회부로 옮겼다가 3년 뒤 호영진, 임성준 등과 함께 신아일보 창간 멤버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신아일보는 재정적인 뒷받침이 약했던 사세를 보완하고 독자의 인기를 얻으려고 군부의 비위를 건드리는 기사도 과감히 썼고 가판 전쟁을 벌이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신아일보 기자들은 월급도 많았고 이병주와 심연섭 칼럼 등은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었는데 후발주자인 중앙일보에 밀리다가 정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정계에 입문
정일권, 존경스럽고 훌륭했다
5․16후에 한국일보에서 서울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던 김 회우는 10월 유신 후에 정일권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정치에 몸담게 됐다. 정치부 기자와 정치부장을 하면서 정계 진출을 생각하곤 했었는데 정일권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그 생각이 실현된 것이다. 정 의장이 터키 대사였던 시절부터 맺어온 각별한 관계의 결과였다.
정일권 의장을 지근에서 보좌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정 의장은 아랫사람에게도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운전사가 와도 꼭 일어나 악수로 맞았다. 누구든 앉은 채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약속이 있으면 항상 미리 도착해 기다렸다. 매사에 성실했고 글도 잘 썼다.
‘이북서 월남한 알라스카(?)’ 정일권이 승승장구했던 비결을 옆에서 확인했던 시기였다.
동갑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정일권 의장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데 어색하지가 않았다고 했다.
그런 박정희 대통령도 자기 자리를 노리는 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는데 정일권 반대 세력이 이를 제거 전략으로 이용했다.
의장비서실장으로 일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이 야당의원들과의 관계였다고 한다.
“유신 땐데 막 밀어 붙이지 않았나요?”라고 묻자 김 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종필 총리, 정일권 국회 의장 땐데 정의장이 야당 협상 창구였지요. 그때 정의장은 신민당 유진산 당수를 대할 때 가장 공을 많이 들였지요”라면서…
70년대 시대상황으로 봐서 5‧16과 10월 유신이 경제 개발에 기여한 역사적 공로는 평가 받아야 하고 긴급조치 등의 초헌법적인 조치들이 지나쳤음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선 먹고 살게 해놓아야 한다는 당위론을 인정해야 하고 인권침해 등의 부작용과 어두운 면이 있었음도 인정하는 바탕에서
오늘을 보고 내일을 설계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경제개발이 바탕이 돼야 민주화도 달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지내면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던 관례대로 김 회우는 자연스레 유정회 국회의원이 됐고 10대와 11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하다 보니 지역구 국회의원이 돼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향인 창원에 출마해서 14대와 15대, 16대 지역구 의원이 된다. 생각하면 이뤄지는 것이 김 회우의 인생인 것 같다. 이때 기록을 보면 지역구 득표율이 48~49.6%였다. “서울서 주로 생활하시면서 지역관리를 제대로 못하셨을 텐데 비결이라도”라고 묻자 심플한 답이 돌아왔다. “제가 김해 김씨구요. 지역구에 김해 김씨들이 많이 살지요.”
자랑을 늘어놓기보다 진솔한 김 회우의 답변에서 소박한 인간미가 우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박한 인간미와 소탈한 성품으로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위원장과 제 16대 국회부의장 등의 중책을 맡아 원만한 의정활동의 결실을 맺었다.
2001년 국회부의장이 될 때는 경쟁 상대였던 서정화. 정재문 의원 등의 양보를 얻어내 경선을 거치지 않고 부의장이 됐다.
요즘 언론들 국가정체성에 문제, 선배들의 책임도
기자와 의장 비서실장, 국회의원 등을 지내셨는데 어느 때가 제일 좋았느냐고 물었더니 순박한 대답을 했다.
“기자 때가 제일 좋았어요. 쉽고 편했고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썼으니까. 자부심도 있었고…” 정말이냐고 되물으려다가 참았다.
요즘 언론과 기자들에 대해서는 “언론의 식견이 모자라고 질이 낮아 진 것 같고 지사적 프라이드가 약해진 것 같다” 고 걱정하면서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김 의장님을 비롯해 저를 포함한 선배 기자들이 잘못된 유산을 남긴 결과가 아닐까요”라고 물었더니 “과거의 누군들 현실의 문제에서 자유롭겠어요” 라며 웃었다.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면서 굳이 사양하시는 사모님을 함께 모셨다. 김 회우 동래고 동기생의 외사촌 동생인데 소개 받고 바로 좋아해서 연애 좀하다가 결혼했다고 했다. 사모님 강귀희(姜貴熙)여사는 69세의 나이에 걸맞지 않아 보일 정도로 건강미가 넘쳤고 밝고 명랑했으며 고왔다.
경남여고와 부산여대 출신인 강 여사가 맹렬(猛烈) 내조지공(內助之功)의 주역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역구의원 뒷바라지가 힘들지 않으셨냐고 물었더니 김 회우의 대답이 또 쉽다. “국회의원 반 이상을 마누라가 했지. 여자들 상대 많이 해야 하니까.”
자매를 두었는데 서울대 출신의 큰 딸은 미국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고 첼로가 전공인 작은 딸은 예일대와 독일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귀국해서 같이 사는 데 10월 연주회 준비에 정신이 없다고 했다. 두 딸 모두 자기 일에 만족하는 모습이 보기 좋기는 한데 결혼을 안 해서 좀 그렇다고 했다.
김 회우의 근황은 꾸준한 걷기 운동으로 건강은 좋은 편이며 이런 약속과 저런 만남으로 매일 같이 바쁘다고 했다.
필자 보기에 그런 약속들이 그렇게 급하고 귀해 보이지는 않았다. 인터뷰 스케줄을 잡기에 힘들었던 일이 다시 생각났으나 모든 모임과 약속을 귀히 여기는 것이 김 회우의 성품인 것 같았다. 그런 성품이 오늘 까지 평탄하고 평안한 김 회우의 삶을 이끌어온 동력으로 보여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은 짜증스러웠던 부족함에 일성(一省)을 더해야 했다.
후기: 지난 9월호의 <찬란한 불꽃 실버 파이팅>에서 이구열 회우가 서울신문화부에 근무할 때 “사장 특별기를 타고 지방 출장을 다녔다”는 부분의 특별기는 과장되었다고 합니다. 특별기가 아니고 ‘사장의 특별 배려로 비행기를 타고 지방 출장을 갔다’는 뜻으로 바로 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