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金珖熙) 회우는 연임해서 3년 째 東亞日報 東友會 회장이다. 충정로에 있는 동우회 사무실로 찾았다. 대한언론 회우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더니 ‘건강’이라고 했다.
가장 귀한 것이 건강, 운동 열심히 합니다.
“며칠 전, 같은 날에 한국일보 체육기자 출신이며 논설위원을 지낸 오도광 씨와 프로야구 산파 역할을 한 원로 야구인 이호헌 씨의 부음을 듣고 허무함을 절감 했습니다. 빈소엔 가지 않았죠, 양해는 구했지만.”
주변 친구들이 세상을 뜨는 것을 보면서 건강의 중요함을 절감한다며 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김 회우는 기상하면 침대에 누운 채 30분 정도 몸 푸는 요가를 하고 아침 식사 후에는 1시간 정도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데 3천보 정도 걷는 운동이 된다.
그리고 오후에 집 근처 홍제천 변을 3㎞정도 걸은 다음에 저녁 식사를 하고 실내에서 자전거 타는 운동을 30분 정도,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아령을 좀하고 샤워한 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상이라고 소개했다.
기본적으로 건강해야 일을 하든 뭐를 하든 한다는 김 회우는 혈당이 좀 있어 당뇨식단 등 신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3~4년 전에 당뇨발로 입원했던 끔찍했던 사연을 들려줬다. 당뇨발로 입원해서 엄지발가락 절반을 잘라낸 뒤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됐고 그 뒤로 건강과 운동에 공을 들인다고….
다이어리에 일정이 비어 있으면 답답해요. 약속 없으면 만들죠
외출했다 귀가 하면 첫 번째 일이 다이어리 정리다. 약속한 기억을 되살려 다이어리에 메모하는 데 꽉 차야지 빈 공간이 있으면 답답하단다.
‘비는 것이 답답하다’는 말에서 김 회우가 얼마나 사람 만나고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 하는지를 느끼게 했다. 다이어리를 채우는 것은 주로 점심약속이고 친구들을 만나는 모임이 대부분인데 다이어리가 비어 있으면 전화해서 약속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이다.
요즘 일주일에 3일 정도는 동우회 사무실로 출근하는 데 옛 동료들을 만나는 게 참 좋은 시간이라고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김 회장의 인품이 반영되어서 인지 東友會 사무실 분위기도 다른 社友會 사무실과는 다르게 활기차 보였다.
인터뷰 중 전화가 왔다. 통화 내용을 훔쳐 들었더니 식사를 함께 하자는 전화였다. 선약이 있어 미안하다면서 다음에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느낌이 좀 그래서 누구시냐고 실례인 줄 알면서 물었더니 동아 사우이며 대한 언론인회의 안평선 회우라며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안평선 선배의 온화한 미소가 생각나서 후배인 필자도 덩달아 행복했다.
여가가 있으면 건강을 위해 보내야 한다는 김 회우는 집에서 TV나 보고 있으면 몸도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게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
아차! 여가 있으면 집안에 박혀 TV 채널에 매달리고 시간 있으면 신문과 책에 의지하는 필자에게 주는 따끔한 충고로 들렸다.
원하지 않은 스포츠 기자, 처음 쓴 기사가 사회면 톱이 되다
올해 희수(喜壽)인 김 회우는 경북 경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를 마친 후 대구로 진학해서 계성중․고를 다녔다. 고2때 6․25를 맞았는데 육사 출신 대령이었던 형님이 멋져 보여 뒤따르려고 육사 13기로 합격해 진해에서 공부했다. 그 때 자신도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다른 생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도 봤다.
육사는 정말 공부 열심히 하는 대학이었다. 6․25가 끝나면서 생각이 바뀌어 자퇴하고 사병으로 재입영해서 상병으로 제대했다.
서울로 진학해서 고려대학교 상과를 졸업했다.
그 때도 취업은 어려웠다. 고대 상과 졸업생도 15% 정도만 취직이 됐다.
졸업후 학교의 추천을 받아 한국은행에 응시했는데 면접에서 탈락해 怏怏不樂하던 중 서울신문 견습 기자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했다.
그런데 신문사의 공고가 묘했다. ‘김광희 任 見習記者 命 休職’이었다.
성적은 우수했으나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진단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3개월 요양 후 견습 기자로 출근을 시작했다. 동료들은 이미 경찰서 야근 찰찰이 경험 등으로 또록또록한 기자 모습들을 하고 있었는데 혼자 꿔다 놓은 보릿자루 형국이었다. 경찰서 출입기자로 출발해서 사회부 기자가 되려고 했는데 고재경 편집국장이 불렀다.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필리핀 야구팀을 초청했는데 체육부는 이유형 부장뿐이고 취재기자가 없으니 도와주라는 명령이었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데….
필리핀 야구팀 도착 3일전인가 이 부장의 지시가 간단명료했다. “김 기자 취재해!” 그걸로 끝이었다. 서울 운동장 야구장으로 달려가서 야구 용어 등을 배웠다.
드디어 D-Day, 생애 처음 취재를 하는 날이다. 데스크의 지시는 “본대로 쓰라!”였다. 첫 기사, ‘본대로’ 썼다.
그런데 그 야구 기사가 다음 날 사회면 톱에 실린 것이었다. 김 회우의 취재능력과 필력이 처음부터 두드러진 결과였다. 동료들은 난리였다.
그래도 사회부 기자가 돼야 하는 데 시간이 갈수록 체육기자로 굳혀지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놔 줘야지, 꼼짝 못하게, 미치겠더라구!”
용기를 내서 고재경 편집 국장을 만났다. 고 국장은 체육부에 그냥 있으면서 사쯔마우리도 함께 하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남대문서와 중부서를 맡았다.
12월 남대문서에서 취재하고 있는데 심각한 표정의 시경국장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알아보니 설을 앞둔 서울역에서 압사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31명 사망, 41명 중경상.
대 동아일보는 그 사건을 취재하지 못했다. 속된 말로 물을 먹었다. 이것은 언론계에선 그 사건 만큼이나 큰 사건이었다.
다음해인 1960년 4․19가 일어났고 서울신문은 데모대가 지른 불로 사옥이 불타고 기능이 마비됐다.
이때 폐간됐다가 복간된 경향신문의 스카우트에 응해서 사회부 스포츠 담당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일 년 반 정도가 지난 뒤에 다시 그 당시로는 일등 신문이었던 동아일보로 옮겼다. 사회부 기자로 문교부를 출입하며 보람을 누리고 있었는데 최호 편집부국장의 호출을 받았다.
1961년 이었다. 1964년에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데 준비해야겠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 정도 스카우트해서 체육부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대 동아일보의 체육부장 대우가 된 것이었다.
동아 체육부에서 일하면서 보람 있는 일이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해외 취재를 많이 한 것이었고 북한의 신금단, 한필화 선수를 둘러싼 특종 공방도 기억에 남는 취재였다.
1963년 도쿄의 프레 올림픽을 취재했으며 1979년에는 국내 기자로는 처음으로 중앙일보 노진호 기자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해 AIPS(세계체육기자연맹총회)를 취재했고 다음해인 1980년에는 모스크바 올림픽을 취재하는 등 많은 보람을 누렸다.
해외 취재뿐만 아니라 태평양 횡단 요트대회. 조오련 선수의 대한해협 횡단 등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치른 것도 자랑스러운 일들이었다.
1977년엔가 연말에 회사에서 남시욱 기자가 동아 대상과 부상 100만원을 받게 돼 내심으로 섭섭했는데 김상만 사장이 별도로 부르더니 자네도 대상감이라며 격려금 110만원을 건네주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국어교과서에 논술문 실려. 지금도 시론을 계속 쓴다
처음 서울신문에서 ‘임 견습기자 명 휴직’후 사령장을 받은 날 김영진 주필이 지나가는 말처럼 “한․일관계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지”라고 했다. 입사시험 논술 문제가 “한․일 관계를 논하라”였는데 김 회우의 답안지가 뛰어났음을 비친 말이었다고 했다.
김 주필은 논설위원회에서 김 회우의 답안을 거론하면서 “이 정도면 당장 사설로 취급해도 되겠다” 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회우의 문장력은 사건 스케치에서도 뛰어났다.
서울역 압사 사건 때 김 회우는 스케치를 맡았는데 사회면 톱이었다. ‘수십명의 생명을 앗아간 서울역 그 마의 계단 위엔 무심한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이 대목을 들어 편집국장은 “자넨 배짱 한 번 좋구먼. 그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詩 같은 글이 나오다니…”라며 칭찬을 했다고 했다.
1972년 동아일보 광고사태가 벌어지자 지면을 채울 기사가 모자랐다.
김 회우는 본격적으로 지면을 채우기 위한 칼럼을 썼다. 김 회우의 칼럼은 인정을 받았고 필력은 더욱 다듬어 졌다.
1985년 문교부 장학관이 찾아왔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게재할 논설문을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지금도 김 회우는 계속 시론을 쓴다. 東友會報에는 ‘世情낙수’란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글쓰기 이야기를 하면서 김 회우는 70년대 초 도쿄 대학에서 공부할 때 만난 교수가 “글은 함부로 기분대로 쓰면 안 된다. 글을 쓰려면 정보와 자료를 충분히 확보해야 된다.” 고 한 말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교수 집에 초청받았는데 주제별로 정리된 신문 스크랩만 60권 정도 되는 것에 놀랐다. 김 회우 자신도 30~40권 정도의 신문 스크랩 북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부인과의 일본여행 제일 행복했고 공무국장 때 노조관리 가장 힘들었다.
서울신문 견습 기자 시절 사장 비서실에 근무하던 네 살 아래의 장복남 여사를 만났고 수수하고 착한 마음에 끌려 결혼했다.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폴란드 삼성전자의 부법인장으로 손녀와 손자를, 의사인 딸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손자 둘을 두고 있다.
부인 장복남 여사는 2009년 점심을 같이하다가 심장 쇼크로 갑자기 별세 했다. 충격이 컸고 아직도 남아 있다. 김 회우는 1985년부터 3년 동안 도교 지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인과 일본 각지를 여행 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부인 얘기를 하면서 김 회우의 눈시울이 떨리는 듯해서 얼른 화제를 바꾸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라고.
도쿄지사장을 끝내고 공무국장을 맡았는데 노조문제로 골치가 아팠다. 이때가 가장 힘든 세월이었다. 문선 파트 직원 70여명과 맞짱 뜨기 회합을 했는데 일대일로 한잔씩 주고받았다. 소주 70잔을 마시고도 견디었던 일에 자신도 놀랐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회사 분위기를 달라지게 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후배기자들에 대해서는 사명감 보다는 이해관계가 앞서는 것 같아 아쉽고 문제의식도, 물고 늘어지는 끈기도 약해 진 것 같아 답답하다고 했다.
스스로 “나는 독거노인”이라는 김 회우는 활기찬 모습이었고 당당했다. 그리고 공부하고 글 쓰는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자녀 관계에 대한 소신도 확실했다.
“자녀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용돈의 대부분을 주택연금으로 해결하는 김 회우는 노년에 자녀 사업을 돕다가 고통을 받는 ‘자녀 리스크 관리 비법’도 간단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