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5년에 태어났으니 이제 일흔 아홉이 되네요. 건강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비결이지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 되물을까 하고 머뭇거리는데 박회우의 이야기보따리가 저절로 풀어졌다.
“저는 요 실패한 기자예요. 좀 더 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어요.” 겸양의 말 같지만 자랑하고 싶은 사연이 많다는 내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귀 기울이며 메모만 열심히 하면 되는 편한 인터뷰로 이어졌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었어요. 신문기자 되는 게 꿈이었지요. 홍익대학교에 처음으로 신문학과가 생겨서 1회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대학 다니면서 잡지사에서 기자 일을 했죠. 화제 거리를 발굴하는 아르바이트였어요.”
잡지사 아르바이트가 인연이 돼서 일간지인 국도신문의 견습 기자가 됐다.
바로 법원과 검찰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기소가 뭔지도 모르고 영장이 뭔지 공판이 뭔지도 모르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법학교수를 찾아갔다. 사정을 실토하고 도움을 청했더니 책 한권을 내주며 1주일 동안 암송한 뒤에 테스트를 받자는 것이었다.
그 책이 형사소송법이었다. 1주일 간 정말 열심히 읽고 나서 법조출입기자 구실을 했다. 법조 출입 4개월 쯤 됐을 때 거물 법조출입기자인 합동통신의 박남규 기자가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했다. 국도신문 기자에게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 같은 일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6개월간 견습 신분이란 것이었다.
김치열 검사장과의 인연
박 회우는 이때 김치열 서울지검장과 특별한 만남을 갖게 된다. 1957년 8월 어느 날, 무척 더웠다. 대법정 입구에서 30대 여인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이 싸우는 친구들을 말리다가 한 친구를 밀쳤는데 그만 벽에 부딪쳐 죽었고 과실치사로 구속됐다는 사연이었다. 불쌍히 본 23살의 젊은 기자 박진서는 도와주기로 작심했다. 높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하고 검사장 방에 들러 부탁할 게 있다고 했다. 김치열 검사장은 고약한 표정으로 눈을 치뜨고 쳐다보기만 했다.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개인적인 청탁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창밖을 가리키며 아줌마의 사연을 들려줬다. 그리고 선처를 부탁했다. 김 검사장은 까칠하기로 소문이 나서 기자들도 그를 만나기를 꺼리고 있었다.
김 검사장이 얘기를 듣곤 박장대소, 웃어대더니 비로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말을 건넸다. “기자 생활 얼마나 했소?”
박 기자가 “1년이 채 안됐습니다. 높은 분한테 부탁하면 될 줄 알고 말씀드린 겁니다” 라고 말하자 비서를 불러 차를 내오게 하고 훈계를 늘어 놓았다. 김치열 검사장은 30대 후반이었다.
“박 기자 초심을 잃지 마시오. 순수한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세요. 기자나 검사나 사회정의 실현과 사회악의 제거가 목표가 돼야 합니다. 그 정신 가지고 기자 생활하세요. 그리고 내방에 자주 놀러오세요.”
이일로 김치열 검사장과의 만남은 그가 검찰 총장이 되고 법무장관이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인간적으로도 친해져 박회우의 결혼주례도 맡았다.
기자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김 검사장의 말은 박 기자의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개인적인 청탁은 하지 않겠다는 검사장과의 약속을 지켜냈다고 자부한다.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그가 한 모임에서 “박 기자, 쩔쩔매면서 왜 나한테 부탁 안했느냐?”고 농담을 던지던 모습이 가끔 생각난다고 했다. 박 회우는 까다롭고 차가운 반면에 따스한 인간미를 보여준 그가 보고 싶기도 하다.
김 검사장은 치매로 고생하다가 몇 해 전에 세상을 떴다.
박 회우를 합동통신으로 스카우트한 박남규 기자가 폐질환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법조뿐만 아니라 서울 시청과 교통부까지 취재를 떠맡아야 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을 맡게 된 박 회우는 시청과 교통부 기자실을 찾아 고참 기자들에게 경례로 인사드리며 살려달라고 했다.
“저 견습기잡니다. 6개월 못 채우면 잘립니다. 선배님들 살려주십시오.” 모두들 흔쾌히 알았다고 감싸주었다. 그런 박 회우에게 회사는 체육부까지 담당시켰다. 고생을 바가지로 한 시절이었다. 6개월의 수습기간을 견뎌냈고 사회부 기자의 내공을 쌓았다.
1958년 <윤락행위 방지법>을 특종 보도한 일과 <국가보안법 개정안 해설>기사를 쓴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표를 내라…알았지?
당시 합동통신 보도국의 실세는 김진학 정치부 겸 편집부국장이었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발의되자 김진학 부국장이 박 회우를 불렀다. 마감시간이 2시간 남은 상황이었다. “박 기자 마감 전에 해설 기사를 쓰시오.”
개정내용도 모르는 데 어쩔 수가 없었다. 마감 시간을 넘겼다.
김 부국장의 통고다. “사표를 내시오.” 캄캄했다. 어떻게 해서 사회부기자로 자리를 잡았는데… 기가 막혔다. 퇴근도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는 박 회우에게 정치부 조세형 기자가 조언을 주었다. “박 기자, 오늘 밤 취재해서 내일 아침 1편에 싣도록 해요.” 고맙기는 했지만 막막하기는 그대로였다.
김치열 검사장이 생각났다.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거 문인구 검사가 손질을 했어요. 문 검사에게 도움을 청해요.”
청파동 문 검사 집으로 찾아갔다. 늦게야 귀가한 문 검사는 잔뜩 취해 있었다. 사정했다. 못쓰면 큰일 난다고…
술김의 문 검사가 법 개정 배경과 골자 그리고 이점과 전망까지 술술 풀어 주었다. 다음 날 그 해설이 1편에 실렸고, 각 신문 들이 일제히 받아썼다.
책상을 정리하며 김 부국장의 기색을 살폈다. “사표 내라”는 어제의 통고가 유효한지? 아니면 1편 해설기사로 면제가 됐는지?
퇴근하면서 김 부국장이 부르더니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닌가?
회사 얘기는 안하고, 목욕탕을 나와서는 명동의 바 3군데를 들렀다. 많이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 내일 출근은 해야 하는 건지? 다른 신문사를 알아봐야 하는 것인지? 술에 취한 김 부국장이 자기 차에 올라타면서 냅다 따귀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한마디 “알았지?” 그리고는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취재가 뭔지 알았지!’ 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해병대 사령관실로 쳐들어간 일등병
5・16직후인 1961년 8월 병역미필로 합동통신에 사표를 내고 10월에 해병대에 자원입대 했다. 정훈감실에서 <해병>이란 월간 잡지의 취재를 맡았다. 고등학교 선배가 훈련도 안 받고 사회로 복귀해서 방송국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고 박진서 일병은 해병대 사령관실로 무조건 쳐들어갔다. “일병 박진서 사령관 각하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라고 외쳤다.
사령관실이 뒤집어 졌다.
하사관들에게 끌려나와 주먹세례를 받았다. 그 와중에 비서실장 홍성철 대령(후일 내무부 장관)이 부르더니 “네 정체가 뭐고 할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전직 신문기자입니다. 제대시켜 주십시오. 한번 해병이면 죽어도 해병인데 밖에서 해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사령관 김성은(후일 국방부 장관)중장에게 불려갔다. 그리고 귀가조치가 내려졌다.
박진서 일병은 다시 합동통신사 사회부기자로 복직했으며 출입처로 국방부를 배정받는다. 해병일병이 군 출입기자가 된 것이다.
정례기자회견 후 김성은 사령관이 박 일병이며 박 기자인 박 회우를 불러 귀엣말로 “이봐! 사고만 치지 말아”라고 당부했다.
일등병 군 출입기자의 특종과 필화 사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군으로 복귀하느냐 민정에 참여하느냐로 고민할 때 박병권 국방장관이 ‘군인은 군인의 길을 가야한다’고 박정희 의장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박 장관으로 부터 직접 듣고 기사를 썼다. 파급이 만만치 않았고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장관의 말을 전한 것이라서 무사했다.
박병권 장관은 물러나고 후임으로 김성은 사령관이 국방부장관이 됐다. 그리고 박진서 기자가 진짜 대형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한국군의 장비현황 점검 결과 각종 장비 보급률과 화력 등이 크게 떨어진다는 특종기사를 터뜨린 것이다. 박 기자는 악명 높던 506방첩대(현 기무사)에 끌려갔다.
밤새도록 교대로 들어오는 6명의 수사관으로부터 기사 출처를 대라는 조사를 받았다. “맞지는 않았지만 열린 문 사이로 들리는 매 맞는 소리와 신음 소리에 온 몸이 오그라드는 공포가 엄습했어요.” 잔뜩 겁을 먹고 있는데
“윤필용 특무부대장이 전화를 했어요. 박형 차 보낼 테니 나한테 오세요.“ 라고… 또 무사했다.
김성은 국방장관의 배려도 있었던 것 같고 그 보도가 결국 미국에 무기와 장비보강을 요청하는 정부의 입장에 힘을 실어 준 결과가 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박 회우는 1965년 서울신문으로 옮겼으나 계속 국방부 출입 기자였다.
1967년 주월 특파원으로 월남에 종군했고 서울신문 사회부차장과 부장을 거쳐 1973년 논설위원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났다. 본의 아닌 필화사건에 연루돼서 였다.
박 회우는 후배기자들에게 기자는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사회공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고 부단한 자기 노력과 재교육을 통해 재충전으로 지속적인 자기 발전을 이뤄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서울신문을 그만 둔 뒤 일본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關西)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1977년 귀국해서 한국경영컨설팅 대표이사, 아더앤더슨코리아 대표를 역임했다.
-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복지 기관에서 자원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아파트 10개 동을 돌면 충분한 운동이 된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건강엔 신경을 쓰지 않는 다는 말의 의미가 전달되는 대목이었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 난간을 잡지 않고 다니며 술도 소주 1병 정도는 마셔도 끄떡없다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박회우의 얼굴이 더 좋아 보였다. 인터뷰 내내 진지했던 박회우의 표정이 사모님 얘기를 꺼냈더니 금방 환해졌다.
납치해서 결혼했어요.
-사모님과 결혼 하실 때 얘기 좀…
“ 26살 때인 1960년, 합동통신에서 법조 출입할 때인데 김포여상 학생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왔어요. 한진희란 여교사가 가방을 날치기 당했어요. 그 가방에 모든 경비가 다 들어 있어 아주 힘든 상황이 됐답니다. 교사 중 한명이 제 친구였어요. 저한테 도움을 청해서 중부경찰서장한테 부탁했더니 바로 찾아 주더군요. 그 뒤로 한진희 선생이 자주 찾아와서 주말 데이트를 즐기곤 했어요.”
-그럼 박 회우께서 청혼하셨나요.
“아니지요. 한 선생이 연락을 끊더라구요. 알아보니 장인어른이 초등학교 교장인데 제 이야기를 듣고는 기자한테는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감금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오기가 나더군요. 그래서 바로 지프를 빌려 타고 김포로 가서 한 선생을 납치해왔지요. 그리고 결혼했어요.”
박 회우의 사연은 콩트요 단편소설이며 시트콤의 연속으로 보였다.
그리고 77년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여의도 침례교회 장로인 박 회우는 청년부 교사로 유아 도우미로 봉사활동을 계속했으며 가능하면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 문제에 부딪치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늘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고비마다 은인들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곤 했어요 그리고 저 자신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박 회우의 술회(述懷)에는 자긍(自矜)이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