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植(81) 본회 원로회우의 정보는 회원수첩 넉 줄짜리 약력 외에 아는바 없어 막막했다. 인터넷 서핑 결과 단서를 포착했다. 연합통신 전무로 언론계에 복귀한 프로필 기사다. 제목은 ‘결과보다 과정 중시하는 운명론자’(경향신문 1983년 4월 16일자 2면)
<“역시 언론계는 마치 신부가 친정에 온 것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안겨 주는 것 같아요” 정치적 격동기였던 70년대에 국회의원(9, 10대)으로 활동하느라고 잠시 언론계를 떠났다가 복귀한 이종식 연합통신 전무의 ‘귀소의 변’이다. 고령산. 고대 정치과 졸. 1959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장, 편집부국장을 지냈다. 데스크시절 부원들에게 늘 취재 결과보다는 얼마나 열심히 부지런히 뛰었느냐는 과정을 중시해 왔다. 그래서 비록 낙종했을망정 열심히 뛰었다면 술을 사고 위로해 주었다는 것. 일선기자 시절 많은 사건을 취재 했지만 경무대 앞 발포사건,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 취재 등을 가장 잊을 수 없다고. 지금껏 운명을 개척하기보다 주어진 쪽으로 살아 온 편. 부인 황병남 여사와 자주 등산을 즐기는 애처가. 승호 군 등 1남 1녀. 취미는 동전수집. 일본인 친구가 보내주는 신간을 즐겨 읽는다.>
지난 1월 10일 낮 코끝을 알싸하게 하는 매운 날씨에 프레스센터 지하식당에서 만났다. 이종식 회우가 가져온 약력 한 장과 메모 해간 프로필 기사를 앞에 놓고 2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카랑카랑한 경상도 사투리로 막힘없이 대답한다.
-정치부 기자와 국회의원으로 정치적 격동기를 지켜봤다. 12․19 대선을 지켜 본 소회는
“18대 대선은 보수와 진보가 가장 첨예하게 양분 됐다. 40대의 표심을 두렵게 여겼는데 50대의 반란으로 박근혜 후보가 승리했다. 앞으로도 2030세대의 인구는 줄고, 5060세대의 증가로 보수 성향은 늘어날 것이다. 진보정권은 반대만 했지 성장 동력의 어젠다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공산국가와의 외교수립도 보수 정권이 열지 않았는가. 보수 세력 결집으로 첫 여성 대통령, 첫 부녀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박근혜 당선자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결벽증이 있어 보인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은 무리를 범하지 않는다. 매사 신중하게 판단한 뒤 옳다고 생각하면 결정을 내리고 신념으로 밀어 붙인다. 아버지 스타일과 비슷할 것 같다.”
-새 대통령이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씩만 든다면?
“박근혜 당선자는 대선 유세 때 공약을 발표하며 ‘노력하겠다가 아니고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약속은 지킨다는 이미지 때문에 공약 따로 행동 따로 갈 수 없는 게 부담이 될 것이다. 대선 후보 공약집의 제목도 ‘세상을 바꾸는 약속’이다.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 무렵 ‘청와대는 감옥입디다. 모두 퇴근하고 집사람하고 둘만 남으면 적막강산도 그런 적막강산이 없다’고 언급했듯이 청와대부속실은 외부와 단절될 수 있는 만큼 소통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부 청사에 별도의 집무실을 마련하여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곳에 근무하면서 외부 인사 얘기를 많이 듣는 것도 방법이다”고 제시한 뒤 “특히 귀를 넓게 열어둬야”한다고 강조.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즉답을 유보했다가 메일을 통해 “아버지를 의식하지 말고 너무 잘 하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한다”고 밝혀 신중함을 드러냈다.
-정치개혁은 요원한가?
“정치개혁은 쉽지는 않겠지만 생각만 바꾸면 간단하다”고 명쾌하게 말한다. “쪽지예산, 선심 예산, 예산 통과 후 의원 외유는 오랜 관행이었다. 국민의 정치의식은 높아졌는데 정치권의 관행은 변하지 않아 비난받고 있다. 의정활동 때 예결위원을 해봤지만 여야 원내총무는 많은 쪽지를 가지고 다녔다. 계수조정 소위 때 주무 장관은 쪽지 있으면 다 내놓으라고 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새해예산안 법정 기한을 넘겼고, 호텔에서 비공개로 심의했으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관행의 고리를 과감하게 잘라내고 심의과정서 지역구사업도 공개적으로 토의하여 완급의 우선순위를 가리고 회의록을 남기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엄청난 발전을 했으나 제일 뒤진 것이 정치다. 정치를 전쟁하듯 손자병법을 동원하고 거짓과 술수로 일관하여 정치 불신을 자초했다”면서 “이번 대선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모델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인다.
-목숨 걸고 조국을 지킨 참전유공자 명예수당은 12만원에서 올해 3만원 올라 15만원이다. 국회는 전직 국회의원 지원금(월 120만원) 등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약속했는데 올해 예산에 반영됐다.
“나는 두 가지 다 받는다. 올해 3만원 올랐다는 것 처음 듣는다. 전직 의원 지원금은 여론이 좋지 않으면 바꿔야 한다. 그런데 헌정회 회원 가운데 진짜 어려운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국회의원은 남은 재산 선거에 다 털어 넣고 떨어져야 그만두는 직업 아닙니까?”
“살다보니 필연이 있는 것 같다”
-운명론을 믿습니까?
“숙명론자는 아니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필연이 일어나는 걸 보면 운명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195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대구 제1육군병원 위생병 모집에 친구와 함께 응시하여 입대했다. 갑작스럽게 서울로 이송되어 육군 제2사단 창설사에 배치됐다. 종암동 옛 서울상대 자리다. 교실 안에 책상 4개가 놓여있고 아무 곳에나 가서 이름을 쓰라고 했다. 친구는 들어가자 마자 앞에 보이는 책상에 관등성명을 기록했고, 나는 안쪽에 배치된 책상위에 써 놓았다. 나는 사단사령부에 배속됐고, 그 친구는 32연대로 배치되어 참전 중 전사했다. 생사가 엇갈린 운명이다.”
이 회우는 ‘정치부 기자가 된 것도 국회의원이 된 것도 필연적 운명’ 이라고 설명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고려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졸업을 앞두고 학점이 괜찮았던지 김상협 교수가 ‘경성방직 갈거야, 동아일보 갈거야?’ 하기에 동아일보를 가겠다고 했다. 외신부를 찾아가라고 해 들렀더니 올해 수습기자 모집이 있는데 공채에 합격하면 기자생활이 더 유리하니 응시하라고 했다. 그에 앞서 조선일보 제2기 수습기자 채용시험에 실력평가 삼아 시험을 쳤는데 합격했으나 합격 사실을 몰랐다. 동생 친구가 길에서 우연히 만났더니 “형님 축하합니다”하기에 알았다. 수습기자 합격자들을 오전에 소집했는데 부랴부랴 오후에 참석했다.
수습기자 시절, 각 부서를 두 주일 씩 순회할 때 정치부에 배치됐고, 마침 국회가 열려 의원 발언 요지를 기록하여 조용중 조세형 선임기자에게 제출했다. 그 때 잘 보았는지 정치부에 배속됐다. ‘그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타 신문사의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조선일보 외에 가본 적이 없고 정치부 이외 타 부서 취재를 해 본적이 없는 ‘절름발이 기자’라며 웃는다.
“정계 진출도 마찬가지다. 5․16 군사혁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군복무를 마친 사람을 추천하라고 해서 출입기자로 선발됐다. 기자실도 없이 시민회관 계단에 앉아 발표문을 받아썼다. 나중에 명칭이 바뀐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입하게 된 것이 유정회 국회의원 선임의 계기가 된 것 같다.”
-정계진출의 뜻이 있었는지요?
“내 꿈은 정치가 아니라 제호 밑에 이름이 들어가는 편집국장이었다.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도 숙명 아니겠는가”
-데스크 시절은 덕장이었던 같습니다.
“나서는 성격이 아니다. 부장 때도 기자들에게 출입처 간사를 맡지 못하게 했다. 취재원에게 신세지는 일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인간관계도 두루뭉수리하게 어울리는 게 좋은데 그러지 못했다. 유별나게 절친한 사람도 없지만 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술자리에서도 사람 평가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프로필 쓰는 것도 꺼렸다. 내 기준에 맞춰 남을 평한다는 게 어디 쉬운 것인가”
“4․19 현장 전문 시위꾼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4․19 당시 취재비화는?
이 회우는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발포사건 현장을 취재하면서 ‘보이지 않는 시위 전문꾼’들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가 통의동 파출소 앞 현장에 갔을 때 동국대생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다. “경무대로 가자”며 학생들이 상수도 공사를 위해 파헤쳐 놓은 돌을 던지고 경복궁 담까지 진출했을 때 경찰이 담장을 향해 최루탄을 쏜 것이 작전 미스였다. 군중들은 총을 쏜 줄 알고 “와∼” 함성을 지르며 밀고 나갔다. 멈춰선 전차(지상 궤도전차)를 앞세워 전진하여 경무대 방향 바리케이드마저 밀어버렸다. “대학생들이 전차운전을 할 줄 모르는데 누군가 전차를 운전하는 것을 보고 전문 시위꾼이 있다고 느꼈다”는 것.
시위대가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을 때 바리케이드 앞에는 소방차 2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가장 먼저 넘어 간 것은 구두닦이들이었다. 소방차가 물대포를 쏘다가 도망가자 또 누군가가 소방차를 기가 막히게 몰더라. 송고를 하려고 인근 미장원에 들어가 전화 좀 쓰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신문사에 전화를 거는 순간 ‘타∼탕’ 총소리가 들려 밖으로 뛰쳐나왔다.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나타나 부상자 위에 태극기를 덮는 것을 보고 ‘시위 주도세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 와중에 누가 태극기를 준비했겠는가? 시위군중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 신문사 깃발이 달린 지프에 부상자를 싣고 삼청동 육군통합병원에 내려주고 회사로 갔다”고 회고한다.
-전문 시위꾼들은 누구라고 봅니까?
“그건 지금도 모르겠다”
4․19의거는 12년에 걸친 자유당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으나 전문 시위꾼들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평양회담 취재 당시 비하인드스토리는?
“모란봉초대소가 회담 장소였고 기자단은 대동강 변 평양여관에 투숙했다. 숙소에서 회담장 가는 길목 청벽루 담장에 ‘花月玉仙’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기에 안내원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평양기생이라고 한다. 그 옆엔 평양감사와 부마도위 등의 이름도 새겨져있다. 당시엔 기생과 어울린 것을 풍류라 여겼기 때문인 같다. 서울엔 평양출신 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사진을 찍게 차를 잠시 세워 달라고 부탁 했고 안내원도 동의했으나 운전기사가 그냥 가더라. 승용차에서 내려 기사가 더 높은 것 같다고 말하자 안내원이 멋쩍은 듯 웃더라.”
취재를 마치고 평양서 개성까지는 헬리콥터를 이용하고, 개성에서 판문점까지 오는 벤츠 승용차에는 윤양중 동아일보 정치부장과 함께 타고 있었다. 노동신문을 접어 가방에 넣는 데 안내원이 화들짝 놀라며 “신문을 접으면 김일성 수령님의 얼굴이 접히니 펴서 가져가라” 했다는 것.
“등산, 헬스클럽 다니며 건강관리”
이종식 회우는 1988년 연합통신 전무이사를 끝으로 언론계를 떠났다. 그 뒤 방송통신위원회 위원(1990∼1993년), 국회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1998년)으로 활동했다. 지금도 성곡문화재단과 방일영문화재단 이사로 노익장을 과시한다.
-건강관리는?
“1982년 담낭제거 수술 이후 요즘도 매주 등산을 다닌다. 1993년부터 일주일에 4, 5일 헬스클럽에 나가 걷고 뛰고 쭉 해오고 있다.”
-술과 담배는?
“2008년 심장 동맥이 막혀 그 때 끊었다. 지금도 담배 냄새 맡으면 생각난다. 술은 소주 몇 잔 가볍게 마시는 정도다.”
-일과는?
“늦잠을 자는 편이다. 8시쯤 일어나 세 가지 신문을 꼼꼼히 읽는다. 아침은 가볍게 과일로 때운 뒤 점심 식사 후 헬스클럽에 나가거나 지인들을 만난다.”
33세 때 중매로 만나 결혼한 黃柄南(74) 여사와의 사이에 1남 1녀. 씨티은행에 근무했던 딸 紹英(46)씨는 치과의사 尹重校(48)씨와 결혼. 아들 丞浩(44)씨는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