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효빈 회우는 필자의 기자 초년 시절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글에 매료되기도 했었다. 직접 만나본 일이 없는 그를 인터뷰하러 간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안국동에 있는 관훈 클럽 집필실서 만났다.
신문을 몇 개 펼쳐 놓고 칼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기자로 논객으로 살아온 삶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날 인터넷 검색에서 송 회우가 지난해 12월 경제풍월에 쓴 ‘여성대통령 혁신기대, 경제풍월 논객 13년의 소신’이란 제목의 칼럼을 읽었기에 그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첫 여성대통령, 그 자체가 정치적 혁신이고 통합이 시대정신이라며 박 ‘다르크’를 뽑자고 쓰셨던 데요.
“박근혜 당선인이 어머니를 잃고 영부인 역할을 할 때 청와대 출입 기자를 했어요. 그때 가까이서 본 박 당선인에게서 훌륭한 면모를 많이 보았구요. 대통령이 되면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서 생각을 그대로 썼을 뿐입니다.”
-선거도 치르기 전에 박근혜 정권의 탄생을 확신하고 절필을 선언하셨는데요.
“ 1999년 8월 20일 경제풍월을 창간한 배병휴 사장의 권유로 경제풍월에 기고 한 이래, 지난해 말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비정을 비평해 왔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탄생은 시대정신이며 순리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매는 심정으로, 경장혁신 (更張革新),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라고 충언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동양의 등불로 우뚝 설 것 이라고 굳게 믿기에 한국일보 35년의 기자생활과 경제풍월 10여년의 논객으로서의 언론인 생활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펜을 놓기로 한 것이지요.“
-청와대 출입시절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본 인상은 어땠습니까?
“잘 하는 게 많았어요. 국가관이 확실했구요. 열심히 하는 모습도 좋아 보였어요. 테니스도 잘했구, 요가도 열심히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것들이 모두 내공을 키운 것 같아요”
-특별히 인상에 남는 일은요?
“기자들과 테니스도 쳤구요. 상당한 실력을 보였어요. 기타도 잘 쳤어요. 출입기자들에게 기타를 치며 유행하는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어요.”
-그 때 배운 노래 한 곡 불러보시죠.
“노래를 부를 정도는 안 되고요. 그때 배운 노래 중에 ‘꽃피는 봄이 오면 반짝이는 날개를 접었나요’ 뭐 이런 가사가 언뜻 생각나는 군요.”
-출입기자들하고 흉허물 없는 대화도 나누었나요.
“ 기자들이 결혼하라고, 결혼 하는 것이 효도라고 말하면 씩 웃곤 했지요. 기자들이 다시 채근하면 ‘그 얘긴 그만하세요. 듣기 싫네요. 나는 대한민국과 결혼했어요’. 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전에도 국가와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한번은 기자들과 오찬을 하고 청와대 경내를 걷다가 제가 농담으로 아내 얘기를 하면서 와이프라고 했더니 ‘와이프요? 국어순화 운동하셔야 겠네요’라고 해서 일행이 파안대소했던 일도 생각나네요.”
‘민정이양’ 질문으로 곤욕
-청와대 출입기자를 5년이나 하셨다는 데 박정희 대통령 얘기도 좀 해 주시죠.? 가까이서 본 박대통령이란 책까지 쓰셨지 않습니까?
“참 대단한 분이세요.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일 때 였어요. 당시 실권자였지요. 풀기자로 수행취재를 할 때였어요. 순창지방 시찰 길에 비포장 도로에서 쉴 때였지요. 박의장 옆으로 가서 당시 민감하던 민정이양 문제를 물었지요. ‘앞으로 거취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라고. 순간 온화하던 표정이 불편하게 바뀌더니 ‘기자, 당신네들은 이 황금 들판을 봐야지.’ 라며 호랑이 눈빛으로 쏘아보곤 일어섰어요. 순간 죽었구나 했지요. 지켜보고 있던 신동관 경호차장이 내 옷섶을 끌고 가며 머리를 쥐어박는 등 수모를 주는 것이었어요. 다음 날 회사에서 당시 왕초로 불리던 장기영 사장에게 사연을 말하고 최고회의 출입을 못하겠다고 했지요. 왕초 장기영 사장의 말이 지금도 생생해요. ‘기자는 상가 집 개다. 오라고 하는 데 가는 게 아니라 먹을 게 있는 곳으로 가는 거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출입 기자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 있기는 했으나 별일 없었고 그 뒤로도 얼굴을 마주치는 박정희 대통령은 언제나처럼 자상했고 온화한 미소로 대해 주었어요.”
-역사적인 인물, 박정희를 간단히 평가 한다면요.?
“한마디로 5천년 민족중흥의 걸출한 지도자지요. 그 양반 보고 독재자라고 하는 데 개인적으로 보면 매료돼요. 그렇게 겸손 할 수가 없어요. 기자들에게 담뱃불까지 붙여 주기도 했지요. 인간적인 매력이 참 많은 분이었어요. 어느 회의장에서 일인데요. 실내공기가 탁하다고 느꼈는데 박 대통령이 직접 일어서더니 아무 말 없이 창문을 직접 여는 것이었어요 비서한테 시키지 않고 말이지요. 허식이 없고 솔직했어요. 박 대통령한테 직접 들은 말 가운데 ‘세상에 비밀은 없다.’라는 말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천석꾼 맡아들로 태어나
송효빈 회우는 1933년생이니 올해 꼭 여든 살이다.
충남 대덕군 동면에서 천석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때마다 무당을 불러 빌고 고사를 지내곤 했다. 집안 종형들이 떡 먹고 싶으면 효빈이 아프냐고 했다는 우스개가 전해질 정도였다. 초등학교 2~3학년 때 쯤 해서 진짜 심한 열병을 앓았다.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 뒤로 잔병이 없어지고 신기하게도 건강해졌다.
초등학교 때는 창씨개명을 안했다고 일본인 교사로부터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고종황제의 시종을 지낸 송종국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꿋꿋이 견뎌 냈고 성장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집에서 20리쯤 떨어진 대전중고등학교로 거뜬히 통학하면서 끈기와 인내를 키웠다.
대학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로 진학했다. 마침 고모님이 적선동에 살아 기숙하며 편하게 열심히 공부하며 대학을 다녔다. 처음 온 서울에 놀라고 감탄했던 일이 새롭다. 이렇게 멋지고 좋은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대학원 1학년을 마친 후 군에 입대했다. 군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하려니 심드렁한 생각이 들었다. 1958년이었다.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판문점 취재 등으로 이름을 날리던 최병우 기자가 중국과 대만간 긴장의 현장이던 금문도 취재 중 순직한 기사를 읽었다. 20대 청년 송효빈에게 큰 감동이었다.
오늘의 역사를 쓰는기자
그래서 다음해인 1959년 한국일보 입사시험을 봤고 기자가 됐다.
-면접시험 때 멋진 답변으로 장기영 사장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면서요.
“면접 시험관으로 나온 왕초 장기영사주가 묻더라구요. 힐문조 였어요. ‘대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 신문기자가 되려고 하나?’ 순간 당황했으나 정신을 추스르고 대답했지요. 대학 때부터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최병우 특파원의 순직기사를 읽고 감동해서 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사학도가 되려고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의 사실을 알아내는 역사보다 오늘의 역사를 쓰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6개월의 수습기간이 지난 뒤 희망부서를 적어내라는 지시가 있었다. 경제부가 편하다고 해서 경제부를 지망했는데 정치부로 발령이 났다. -경제부가 아니고 정치부로 발령이 나서 속상하지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았구. 사실 경제부니 정치부니에 대해서 잘 몰랐지요. 그런데 일주일 쯤 지났을까? 왕초 장기영 사주가 부르더라구요.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신문기자가 되겠다고 했지. 그러려면 국회와 정당이 제격이야. 열심히 해봐’ 라는 격려를 받았어요. 큰 힘이 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때부터 ‘오늘의 역사를 쓴다.’ 는 각오로 열심히 했구요 그 명제가 ‘나의 신문 기자관’ 이 되었습니다.”
송 회우는 35년이 넘는 한국일보 재직 기간 내내 정치부기자였고 정치담당 논설위원이었으며 퇴직 후에도 정치 담당 논객으로 한길을 걸었다.
1962년 정치부 기자로 뛸 때 은행지점장이던 사촌형의 돈암동 댁에서 기식했다. 그 형수의 소개로 맞선을 봤다.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국립의료원 약사로 일하고 있던 유종숙씨였다.
“아내덕에 부패기자 안돼”
-결혼 할 때 사모님의 어디가 그리 좋으셨어요.
“차도 마시고 영화도 보며 연애를 할 때였어요. 찻집에서 였어요. 핸드백에서 껌 한 개를 꺼내더니 반쪽을 잘라 권하더라구요 근검절약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호감이 더 갔고 그 길로 믿음과 정이 깊어져 결혼 했지요. 결혼 후 아내가 약국을 차려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생활 할 수 있었구요. 정치부기자 하면서 어느 정치인보고 술 한 잔 사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아내 덕에 부패기자가 안됐어요. 고맙지요.”
유종숙 사모님은 뇌종양으로 3년 동안 고생하다가 15년 전에 별세했다.
사모님 병치레에 모았던 돈이 모두 들어간 노년의 송 회우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 송 회우의 형편을 들으면서 생활이 어려운 원로 언론인에 대한 생활지원에 언론계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절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송 회우 보다 더 어려운 원로 언론인들도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아들네와 합치고 난 뒤 손자가 학교에서 가족그림을 그린 것을 보여주면서 “엄마. 아빠 그리고 형과 저 예요.” 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없네?”라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가족이 아니잖아요.”라고 해서 허전했고 죽은 아내 생각이 더 했다고 털어 놓았다.
인터뷰를 대충 마무리하고 식당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오찬을 나누며 미진한 질문을 몇 가지 추가 했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했는데요?
“망나니 동생 품고 가야지요. 그러나 한계는 분명히 하고 나가야 해요.”
-주일 특파원을 지내셨고 <이것이 일본이다>와 <다시 일어난 일본> 등 일본 관련 논문과 저서도 있으신데 현 시점에서의 대일 관계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고 해야 하나요. 일본을 철저히 알고 철저히 대응해야 해요.”
- 8순이신데 약주도 잘 드시고 건강하시네요.
“기력이 약해진 감이 좀 들기는 하지만 모든 게 괜찮아요. 매일 걷는 게 최선의 건강 비법이지요. 청운동 집에서 안국동 관훈클럽까지 걸어가서 신문도 보고 칼럼도 챙겨 보는 게 일과지요. 그리고 옛 언론계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움이구요. 그리고 짬이 나면 대한언론인회에 들러 아는 얼굴들 보는 것도 기쁜 일이지요.”
송 회우는 지난 2005년 중앙언론문화상을 받았다. 이때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동아일보기자 시절 최고회의를 같이 출입하던 송 회우를 회고하며 남긴 축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송 후배는 평소 얌전하게 보이지만 취재 경쟁이 붙으면 선배도 알아주지 않는 맹렬기자 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