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 사거리에 위치한 라 메르(LA MER) 갤러리. 1층 전시관 벽면에 빼곡하게 걸린 50점의 작품들은 난해하다. 수묵담채나 채색화의 한국화가 아니다. 수채화와 풍경화, 회화와도 거리가 멀다. 채색만 다를 뿐 굵고 가는 무수한 선들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겹친 화폭은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몽환의 세계 같다.
서화부문도 다양하다. 노송을 모티브로 삼은 문인화(文人畵), 붉은 매화에 그려놓은 갑골문 ‘매개오복도(梅開五福圖)’는 얼치기 감상자도 약간은 다가오는 느낌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초서체다. ‘10년간 숲속에서 도를 닦아도 깨닫지 못했는데, 강변에 나오니 웃음이 절로 나와 도를 깨달았다’는 의미의 선구(禪句) ‘임하10년몽 호변일소신(林下十年夢 湖邊一笑新)’도 갑골문자다. ‘湖’字와 ‘一’字만 겨우 판독할 수준이니 미적 감각이나 작가 세계를 이해 한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기공서화(氣功書畵) 작품전’의 주인공인 본회 一湖 文俊徹(82) 원로회우를 지난달 8일 라 메르 갤러리에서 만났다.
-그림이 무척 난해 합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보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를 화폭에 담은 것이지요.”
-작품 속에 기(氣)를 불어 넣었다는 의미인가요?.
“기의 흐름을 명상하며 상상 속에 그려지는 기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죠. 오랫동안 컬러 테라피(Coloa Therapy)식의 원색 바탕에 혼색법(混色法)을 활용하여 독창적인 작품 기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신필공 효시는 현종 때 허목
-보통 사람도 작품을 보며 氣를 느낄 수 있는지요?
“일반인의 염파수(念波數)는 20∼50헤르츠(Hz)라고 합니다. 염파수가 500Hz는 돼야 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제 작품에서 방출되는 기장(氣場)은 50∼300m로 기공을 하는 사람들은 이층에 걸어 놓은 작품의 기를 아래층에서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고 작품에 몰입하면 치유의 효과도 있다고 한다.
문 준철 회우는 ‘중국 금강선 신필공 4대 전인(中國 金剛禪 神筆功 4代 傳人)’이다. 그의 사부(師父) 성학연(盛鶴延)대사(신필공 3대 전인)는 ‘문 선생의 서법은 그 힘이 단전에서 나오기 때문에 신필공(神筆功)임을 단언한다’고 했다는 것. 신필공은 일종의 기공인 동시에 예술이며 무술의 소지도 내포 되어 있다고 한다.
-신필공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신지요?
“1662년(현종 3년)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신필공의 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강원도 삼척은 바다의 조수(潮水)가 심해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허목 부사가 부임하여 ‘동해송(東海訟)’이라는 222자의 글을 지어 전서체(篆書體)로 써서 비석(碑石)을 세운 뒤부터 조수 피해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신필공의 효시인 셈이지요”
허목 부사는 시서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명필로 전서체는 동방에서 제1인자라는 평을 들었다. 삼척시 정상동(정라진 육향산정)에 위치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척주동해비가 재앙을 물리친다는 신통력을 믿고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해가는 바람에 비문의 손상을 우려하여 삼척시는 탁본한 비문을 인쇄하여 기증하거나 판매한다. 문 회우도 “2만원을 주고 탁본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림에 강한 氣 에너지 느껴"
다우징 스쿨 원장이자 ‘한국氣에너지연구회’ 崔海運 회장은 문 회우의 그림을 감정하면서 “강한 기 에너지가 발생하여 인체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작품”이라고 인증했다. 한국미술협회 조강훈 이사장은 “깊은 사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오함과 깊은 울림은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면서 “진공상태와 같은 분위기에 수억 광년에 걸쳐 날아오는 가느다란 빛처럼 선들을 중첩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시공을 초월한 공간으로 빠져들게 만든다.”고 평가한다. 종로미술협회 윤평상 회장은 “환상적이면서도 힘이 넘치는 대단한 필력의 작품”이라고 강조.
문 회우는 제10회 서울서예대전 특선(2005년)을 비롯하여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우수상(2006년), 일본 산경(産經) 국제서전 입선 3회(2006∼2009년), 제1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우수상, 입선(서양화 2011년) 등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전시회를 열면 경비도 만만찮을 텐데요?
“대관료와 도록 제작비 등 2000만원 가까이 들었어요. 전시회 첫날 작품 7편이 예약 됐고, 전시회가 끝나면 경비는 충분히 빠질 것 같아요. 많은 관람자들이 ‘기적 같다’고 격려하고 평가해줘 힘이 난다”고 한다.
-언제부터 서화에 정진하셨는지요?
“50대부터 기공생활을 시작했고, 퇴직 후인 60대에 본격적으로 서화에 몰두했습니다. 그동안 만들어 낸 작품 일부를 모아 이번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작품 한 편을 완성하려면 원색을 넣고 그 위에 혼색을 하는 등 7시간 넘게 서서 버텨야 하는 고된 작업이라고 한다. “기공과 서화에 몰두하면서 외부로부터 거의 단절된 호중(壺中)생활을 해왔다”고 덧붙인다.
-기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숨을 쉬는 것도 기 호흡입니다. 혈과 맥이 필요로 하는 정신적 에너지도 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요. 기의 기본은 명상과 단련입니다. 명상을 통해 정신을 맑게 하고, 단(丹)은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문 회우의 역저(譯著) ‘嚴新 氣功學 텍스트(1990년 출간)’ 머리글에는 ‘엄신 선생은 근래에 나타난 젊고 지식교양이 높은 기공사’라고 소개하면서 ‘엄신 기공은 신체를 단련하여 에너지를 발산시켜 현대의학으로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수많은 기공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고 한다.
경제칼럼 첫 집필 재계 등 반향
-신문기자가 된 것은?
“1957년 고려대학교(전 국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면서 산업경제신문사 경제부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내딛었어요” 산업경제에서 경제부장과 부국장을 지낸 문 회우는 1972년 일간 내외경제 경제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산업경제신문은 1973년 소유권이 한국무역협회로 넘어가면서 제호가 내외경제신문으로 바뀌었다. 내외경제에서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1980년 11월 언론기관통폐합 직전에 퇴직했다. 이듬해 원풍섬유 부사장으로 재계에 몸담았다. 1990년 제일경제신문 주필 겸 부사장으로 복귀했다가 1994년 언론계를 떠났다.
-언론현장서 근무하며 기억에 남는 것은?
“산업경제 부장 시절 경제칼럼을 연재하여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재계(財界)와 관계(官界)는 물론 언론계 선후배들도 칼럼이 나오면 관심을 갖고 격려해주어 보람을 느꼈지요”
-칼럼을 묶어 1973년 ‘適期失期’ 책으로 펴냈군요.
“표제는 본회 원로회우였던 고(故) 문인석 선생이 붙여주었어요.” 宋大淳 대한증권협회장은 서문에서 ‘우리나라에 많은 칼럼이 책으로 나왔지만 재정, 금융, 증권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면서 ‘폭 넓은 지식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증권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개선점을 명확히 제시한 지도적 시사평론’이라고 기술했다. 金定台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비뚜러진 시장운영면을 신랄히 지탄하기도 했고, 올바른 주식시장의 체제 확립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정, 금융면에 걸쳐 폭넓은 논평을 가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촉진하는 지침이 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신문사 재직시절 주로 일본 서적을 많이 읽었다는 문 회우는 일본 원서 단행본 350여 권과 백과사전 1질 25권을 한국증권거래소에 기증하여 감사패를 받았다. ‘천리(天理)에 따라 바르게 살자, 남에게 도움을 주며 살자’는 좌우명의 실천이다. 그는 지금도 서예와 미술 관련 서적 등 500여권을 소장한 장서가이다.
-경제지에 문화예술인들을 많이 소개 했다면서요.
“내외경제 편집국장 시절 경제지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벗어나 독자의 정서함양과 읽을거리 제공을 위해 다양한 기획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로 서예가들을 소개하면서 작품을 과감하게 편집하고 좌우명을 곁들여 서예에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의 시리즈 기획물을 본 한 서예가는 “문 선생이야말로 서예계의 숨은 공로자”라면서 “소개된 서예가 중에는 스승도 있고 그 스승을 지도한 소전(素筌)선생도 있는 데, 이제는 대부분 고인이 되고 그분들의 작품만 남았다”고 회고했다.
이밖에도 ‘요가교실’을 지면에 개설하여 국민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며 한국요가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기 수련과 요가로 건강관리”
-지면에 얽힌 이야기 말고 일화는?
“산업경제신문 평 기자 시절, 모 부장이 자기가 쓴 기사를 뺐다며 편집국장에게 욕설을 하면서 발길질을 하는 걸 보고 부아가 치솟아 그 부장을 때렸어요. 불의를 보고 못 참는 성격 탓이지요. 결국 상사 폭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고, ‘부장을 두들겨 팬 기자’라는 소문이 언론계에 나돌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문 회우는 작고 다부진 체격에 깐깐해 보인다. 6‧25 때 생사를 넘나드는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 참전하여 수많은 전우가 전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두려움도 무서움도 없고 다혈질적으로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그는 군산중학교 5학년 때인 1950년 7월 자원입대하여 다부동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되어 이듬해 1월 전역했다.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다부동 전투에 참전한 본회 지용우 논설고문을 아느냐”고 물었다. “지 고문이 서울지역서 참전했으면 모른다”고 한다. 당시 군산중학교 재학 중 참전했던 학우 97명이 전사하고, 3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6‧25참전언론인회 회원인 그는 “올해 발행 예정인 ‘6‧25 참전 수기’에 원고를 넘겼다”고 한다.
-건강관리는?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어요. 요즘도 아침 5시 전후면 일어나 기공수련과 요가를 3시간 정도 합니다. 아침 식사 후 작품을 구상하거나 화폭에 담는 일을 하지요. 가끔 청계산 산책과 인사동 나들이를 하는 정도지요”
-술과 담배는?
“신문기자 시절엔 술과 담배를 많이 했어요. 편집국장 시절 기자들이 제작 거부를 하자 보안 당국에서 ‘내외경제에서 그럴 수 있느냐’는 시달림을 많이 받았어요. 언론통폐합을 앞두고 스트레스와 과로가 겹쳐 입원했더니 심근경색이란 진단을 받았고 그 때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다.”
100세 장수시대라지만 팔순에도 나이를 잊고 기수련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서예와 그림을 그리며 작품전을 연 문 준철 회우는 ‘실버 파이팅’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50년 전 중매로 만나 보름 만에 결혼한 부인 李香林 여사(75) 사이에 1남 2녀. 아들 영주(49) 씨는 외식업체 MPK 대표. 딸 恩宣 씨는 인천서 피아노학원 운영, 막내 딸 貞允씨는 프랑스 거주.